참! 맛있다 / 조영안
장날, 제법 큰 배추 한 포기와 부드러운 열무 한 단을 얻었다. 가게 앞을 지나던 친구가 주고 갔다. 퇴근하자마자 손질하기 시작했다. 겉의 떡잎은 시래기 된장국 끓이려고 떼어내고 부드러운 부분만 겉절이로 담기로 했다. 한 포기지만 잘라 놓고 보니 양이 꽤 되었다. 두꺼운 줄기 부분만 가려서 간을 좀 세게 했다. 나머지는 굵은 소금을 적당히 뿌려 잠깐 절였다. 열무도 짠지로 담으려고 알맞게 소금을 뿌려 숨을 죽였다. 절인 배추와 열무를 보니 오늘은 맛있는 겉절이 김치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작년 김장김치에 길들여진 입맛이라 더 정성을 쏟았다. 식구들은 다른 음식은 그럭저럭 넘어가지만 김치만은 짜니, 싱겁니, 질기니 타박이 많은 편이다.
우리 집 냉동고에는 항상 비법 양념이 있다. 어머니께서 떨어질 무렵이면 양념을 미리 준비해 놓는다. 마른 고추에다 멸치젓갈과 갈치속젓, 절여놓은 새우 그리고 생강, 마늘, 식은밥 한 덩이를 넣어 방앗간에서 갈아 놓으면 만능 양념장이 되어 어떤 요리를 해도 쉽게 할 수 있다. 김치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경상도는 이곳과는 정반대다. 그냥 멸치 젓국에다 마늘, 생강, 마른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리면 끝이다. 이러니 맛깔스러운 색이 나오기 어렵다. 처음 전라도 김치를 먹었을 때는 '아, 김치만 먹고도 살것다.' 싶었다.
전라도에 와서 배운 대표적인 요리도 이 양념장을 이용하여 만든다. 무 생채, 깻잎 순, 고구마 순 김치가 그것인데 경상도와는 전혀 달랐다. 무생채만 해도 내 고향에서는 소금과 식초, 설탕으로 새콤달콤 만들어 먹는다. 고구마 순으로 김치를 담는 것도 낯설었다. 줄기 껍질을 벗겨 살짝 데친 후 역시 비법 양념을 넣어 버무려 뚝딱 만든다. 고구마 순 김치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먹는 계절 음식이지만 무 생채와 깻잎 순은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다.
솜씨 좋은 어머니 덕분에 이제는 나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늘었다. 젓장 하나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음식 스승’은 모든 집안일을 내려놓고, 뭐든지 알아서 하란다. 기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된장과 고추장 담그는 것도 야무지게 배워야겠다.
오늘도 그때 느꼈던 맛을 떠올리며, 쪽파가 없어 당근과 부추를 썰어놓고 버무렸다. 알맞게 녹은 양념이 색깔부터 윤기가 흘렀다. 햇고추를 갈아서인지 고소함까지 느껴진다. 재료가 신선하니 한층 더 맛이 좋았다. 약간 싱거운 것 같아서 참치 액젓으로 마무리했다. 열무도 양념을 듬뿍 넣고 재피 가루도 넣으니 환상적인 맛김치가 되었다. 식탁 위에 놓인 두 가지 김치를 본 식구들은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시험 준비로 바쁜 딸도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딸이 좋아하는 겉절이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이려고 새벽부터 준비한 터였다.
어머니께서 먼저 맛을 보시곤 "개미가 있다. 맛나다."며 다시 집는다. 평소에도 자주 듣던 말이지만 남편한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짭조름하니 간이 잘 맞다’는 뜻이란다. 그런데 재피가 들어간 열무김치를 먹은 남편은 "와 쌈빡하네."라며 칭찬한다. 딸하고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넌 뭐라고 할래?” 이번에는 딸에게 넌지시 물으니 "감칠맛이 납니다요."하며 너스레를 떤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 식탁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시래기국이 보글보글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모처럼 식구들이 다 모인 일요일 아침은, 잠깐의 수고로 화기애애했다. "그래, 전라도 음식은 무조건 맛있어. 나도 여기 사람이 다 된 거여." 혼자 중얼거렸다.
첫댓글 와, 맛있겠어요. '개미'가 있다는 말은 쉽게 듣기 어려운 칭찬인데요.
'개미가 있다'를 아시는군요. 칭찬이란 뜻도 이번에 알았습니다.하하
가족을 위해 쉽지 않은 수고를 하시는 선생님, 그 마음과 솜씨를 알아주고 칭찬하는 가족들, 아침 식탁이 훈훈하네요. 글도 맛있네요.
처음에는 말이 없었어요. 나이가 말을 하게 해줍니다. 부족한 글을 맛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먹고 싶어요.
가까우면 나눠 먹을텐데요. 너무 먼 선생님!
선생님 담근 김치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울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대접해 드려야겠네요.
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