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랑 박공 묘표(將仕郞朴公墓表)
密菴集 卷之十七, 밀암선생 이재李栽
공의 이름은 위(瑋)이고, 자는 중헌(仲獻)이며, 성은 박씨(朴氏)이다. 무안(務安) 사람이다. 그 계통은 신라의 시조에서 나왔다. 고려 때 국자감 전주(國子典酒)를 지낸 진승(進昇)에 이르러 비로소 족보에 이름이 나타난다. 이후 대대로 귀하게 되고 현달하여 동방의 명문가가 되었다.
명나라 성화 연간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된 지몽(之蒙)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백부인 이재(頤宰)를 따라 영덕에 살다가, 사위가 되어 영해에 정착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그 후 자손들이 마침내 영해를 본관처럼 삼아 영해 사람이 되었다.
증조부의 이름은 영기(榮基)로, 용양위 우부장(龍驤衛右部將)을 지냈으며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세렴(世廉)으로,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냈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의장(毅長)이다. 만력 임진년(1592년)에 공훈을 크게 세웠으며, 세 차례나 절도사의 직책으로 영남 동쪽 지역을 진압하고 지켰다. 세상을 떠난 뒤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 이씨(貞夫人李氏)로, 참봉 지영(之英)의 따님이며, 퇴계 문순공(退陶文純公)의 외종손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얼굴이 희고 몸집이 가늘고 여위었으며, 풍채와 자태가 유달리 빼어났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가운데 한 사람 같았다.
나의 숙조부이신 선교공(宣敎公) 시형(時亨)은 공에게 누이의 남편이 되었다. 그분 역시 옥처럼 맑은 자질과 아름다운 풍모를 지녔다. 두 사람이 마주 서면 마치 한 쌍의 옥이 서로 빛을 비추는 듯하여, 보는 사람들이 거의 가야 할 길조차 잊을 정도였다.
일찍이 두 사람이 함께 과거 시험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시험관이 한참 동안 두 사람을 눈여겨보다가 말하였다.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낳았는가?”
그리고 두 사람을 불러 만나 보고서야 같은 고을의 인척 형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험관은 감탄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한 집안에 단번에 두 명의 옥 같은 인물이 나왔구나.”
이 일은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옛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공은 외모가 이처럼 뛰어났을 뿐 아니라, 내면의 행실 또한 매우 훌륭하였다. 일찍이 영가(永嘉)의 은자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를 따라 학문을 배웠다. 문장의 뜻을 잘 이해하였고, 유생으로서 공부하는 데에도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명성과 행실을 갈고닦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함부로 높은 관직과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노성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공은 스물세 살 되던 병오년 정월 어느 날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판서공은 처음부터 공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학문을 위해 자유롭게 유학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하며 한탄하였다.
“그가 이토록 일찍 요절할 줄 알았다면, 내가 어찌 차마 그를 그렇게까지 애써 공부하게 하였겠는가?”
처음에는 공을 관아 서쪽 오현(烏峴)에 있는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뒤에 부인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공의 묘를 옮겨 관아 남쪽 우현(牛峴)에 합장하였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병인년에 지관의 말에 따라 다시 옛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한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이씨는 재령(載寧)을 본관으로 하며,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자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지내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된 운룡(雲龍)의 따님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다. 열일곱 살에 공에게 시집와 시부모를 정성껏 섬겼으며, 남편을 손님처럼 공경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부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부인은 여러 차례 기절하여 삶의 의지를 잃을 정도로 슬퍼하였다. 그러나 시부모가 살아 계셨고,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있었으므로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그 뒤 집안을 부지런하고 빈틈없이 다스렸으며, 겉치레와 사치를 숭상하지 않았다.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고 하인들을 거느리는 일에서도 모든 것을 예법과 규범에 따라 처리하였다.
외아들이 장성하자 사랑한다는 이유로 교육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을 따라 먼 곳에 가서 공부하도록 하여 학업을 이루게 하였다.
종친과 친족들은 부인을 칭송하며 말하였다.
“젊어서는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예의를 두루 갖추었고, 늙어서는 집안을 세우고 다스리는 도리를 이루었다. 여자의 몸으로 선비의 기품을 지녔구나!”
임인년 정월에 부인은 역병에 걸렸다.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음을 알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평소 마련해 두었던 상례 용품을 꺼내도록 하였다. 해마다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고 때에 맞추어 손질해 두었으므로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나머지 물품은 모두 여러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차등을 두었다.
그달 28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0세였다.
아들은 문도(文度)로,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어질고 문장에 능하였으니, 대체로 어머니의 가정교육에서 얻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문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휴(㳜), 둘째는 서(湑)이며, 두 사람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사위는 일곱 명이었다. 선비 신후석(申厚錫), 무과 출신 권중강(權仲崗), 선비 허씨(許氏), 영장 장우원(張宇遠), 선비 이중형(李重炯), 현감 손흠(孫欽), 현감 유후광(柳後光)이다.
또한 서출 아들 셋이 있었으니, 이름은 양(湸), 침(沉), 필(泌)이다.
휴에게는 아들 셋과 딸 둘이 있었다. 아들은 진상(震相), 정相(鼎相), 태상(泰相)이며, 맏딸은 유후창(柳後昌)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김여탁(金汝鐸)에게 시집갔다. 그 밖에 아들 은상(殷相)이 한 명 더 있었다.
서에게는 아들 넷과 딸 하나가 있었다. 맏아들 명상(命相)은 종부(族父)인 정랑 호(滈)의 양자가 되었다. 둘째 이 상(履相)은 국자감에 들어가 상상(上庠)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다음은 사상(師相)과 겸상(謙相)이었다. 딸은 권익(權榏)에게 시집갔다.
진상은 아들이 없어 정상의 아들 정환(廷烜)을 양자로 삼았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자, 현손 및 그 밖의 자손 남녀를 모두 합하면 거의 백여 명에 이른다.
나의 선비(先夫人)는 바로 공의 아우로서 경력(經歷)을 지낸 녹(玏)의 따님이다.
나는 태어날 때가 늦어 외조부의 형제뻘인 공과는 세대 차이가 매우 컸다. 그러나 나의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직접 보고 들은 일들을 바탕으로 공의 명성과 덕행을 늘 말씀하시며 어린 자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귀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공의 증손 정상이 대대로 집안에 일이 많아 공의 묘에 비문을 새기지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나의 선친께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선친께서는 그 사정을 가엾게 여기시고 허락하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정상 역시 불행히도 곧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이제 상상(上庠)에 오른 그 후손이 선친께 부탁하려던 일을 나 재(栽)에게 맡겼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양하였다.
“이미 끊어진 실을 어찌 다시 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성상군이 일어나 말하였다.
“증왕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백여 년이 넘었습니다. 세대가 점점 멀어져 가니 누가 그분을 알겠습니까? 다행히 집안에서 직접 듣고 배워 우리 할아버지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공뿐입니다. 게다가 공은 우리 집안의 외조상에서 나온 분이니, 오늘의 이 일에 어찌 차가운 샘물을 찾아 조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선조의 뜻을 이루고 외가의 숨은 덕행을 드러내 주십시오.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에 슬프고도 애틋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더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공의 묘 앞에 묘표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글을 맺었다.
묘표의 끝에 붙인 글
옛날 위개(衛玠), 자는 숙보(叔寶)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용모가 비범하게 아름다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구경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친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람들의 구경에 치여 죽었다’고 하였다.
지금 공 역시 사람들에게 이처럼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그 불행함이 위개와 비슷하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자질은 그토록 빼어나면서도 천명은 일찍 막혔단 말인가?
아마도 재능과 아름다움이 뛰어난 사람은 온전히 보전하기 어렵고, 그릇이 귀한 사람은 오히려 쉽게 깨지는 법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를 시대와 운명의 수로 돌려야 하겠는가?
아, 슬프도다!
지금까지 백여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 명성과 풍모를 듣고 감탄하게 하는구나.
11대 조비 숙부인 무안박씨의 조부 묘표, 密菴集 이재李栽 卷之十七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창기 배상
將仕郞朴公墓表
公諱瑋字仲獻。姓朴氏。務安人也。系出新羅始祖。至高麗國子典酒諱進昇。始見譜牒。連世貴顯。爲東方望族。明成化中。有副司直 贈司僕寺正諱之蒙。從伯父頤宰盈德。因贅于寧而家焉。是爲公高祖。子孫遂爲寧海人。曾祖諱榮基。龍驤衛右部將 贈工曹參議。祖諱世廉。延日縣監 贈兵曹判書。考諱毅長。萬曆壬辰。懋著勳庸。三以節鎭嶺南東道。卒 贈戶曹判書。妣貞夫人李氏。參奉之英之女。退陶文純公外從孫女也。公幼白晳疎瘦。風姿特秀。望之如神仙中人。我叔祖宣敎公諱時亨。於公爲姊婿。亦玉質韶擧。每與公相對。雙璧交映。觀者殆忘其所趨。嘗同入試塲。考官屬目久之曰。誰生如馨兒。召見問。知爲同郡姻兄弟。歎曰異哉。一家頓有兩玉人。至今鄕里傳以爲故事。公旣外有異姿。內行又甚修。嘗從永嘉隱者惟一齋金公彦璣學。善曉解文義。治弟子業有聲。顧砥名行是急。不苟爲拾靑紫計。弱冠已有老成名。年二十三以丙午正月某日。發疾卒。判書公始奇公。縱使遊學。至是大慟恨曰。早知其夭閼如此。吾豈忍使重勞其生。始葬公府西烏峴先壟之側。及孺人沒。遷公墓合窆于府南牛峴。後二十五年丙寅。用卜人言又遷于舊墓北五里許面坎之原。孺人李氏籍載寧。效忠仗義宣武功臣,三道統制使,息城君 贈兵曹判書諱雲龍之女也。幼嚴正有法度。年十七歸于公。事舅姑謹。奉君子如賓。及公沒。孺人才二十四。屢絶無生意。爲公姑在堂。有一男甫三歲。乃强食息。而治家勤密。不尙浮靡。修烝嘗御僕隷。靡不從儀法。及其孤且長。則不以愛弛敎。俾從師遠遊。以成其業。宗黨稱之曰少而爲婦之禮備。老而立家之道成。其女也而士乎。壬寅正月。遘癘。自知不起。命侍者發平日所治喪具。歲制時修。無一不備。餘悉分與諸孫。貴賤各有差。以是月二十八日卒。享年八十。男曰文度。宣敎郞。賢而有文。蓋資孺人內敎爲多云。有二男。長㳜季湑。皆武科。七女婿。士人申厚錫,武科權仲崗,士人許,營將張宇遠,士人李重炯,縣監孫欽,縣監柳後光。又有庶出男三人湸,沉,泌也。㳜有三男二女。男震相,鼎相,泰相。女長適柳後昌。季適金汝鐸。餘男一人曰殷相。湑有四男一女。男長命相。出爲族父正郞滈後。次履相國子上庠。次師相,謙相。女適權榏。震相無子。以鼎相之子廷烜爲後。內外孫曾玄男女幾百餘。維我先夫人。卽公弟經歷諱玏之女也。栽之生也後。其距諸外翁甚遠。然我先人在所見聞之世。每述公風聲。以詔藐諸孤。栽固耳剽之稔矣。公之曾孫鼎相。以連世多故。未及銘公墓。嘗泣請我先人。先人意哀而許之。尋無祿卽世。鼎相又不幸旋卒。此事遂中已。迺今上庠君移所以屬先人者命不佞栽。栽泣且辭曰。奈析線何。上庠君作而曰。曾王父沒。今百有餘年。世彌遠。誰知者。其幸得之家庭而能言吾祖事者。惟公在耳。且公我之自出。其於今日事。亦豈無寒泉之思。成先志闡外幽。其毋庸辭。栽於是戚戚不忍復辭。遂表於其隧而爲之系曰。
古有衛玠叔寶者有異姿。所至人爭覩之。俄不任㞃而病死。時人謂之看殺。今公之見賞於人如此而卒早夭。其亦不幸而近之矣。不然何其質之秀而命之閼耶。抑才美者難全。器貴者易缺。其將歸之時與數耶。吁嗟乎。至今百有餘年。猶使人聞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