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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폭발
― 김진길, 화석지대(지혜, 2016) ― 문수영, 화음(북랜드, 2016) ― 박옥위, 낙엽 단상(목언예원, 2016) ― 윤경희, 태양의 혀(그루, 2016) ― 이종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황금알, 2016)
김남규(시조시인)
0. 이미지가 곧 리듬
시각적인 형상으로 출현하는 이미지는 기억이나 상상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시각과 유사성을 갖고 있는 청각이나 촉각 등의 모든 감각들도 이미지가 된다. 예컨대 귀에 들리는 선율은 그 즉시 사라지지만 마음속에 일종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소위 ‘심상心象’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단순히 시각적인 재현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 다른 질료가 유사성으로 묶이는 것에 관여하기도 한다. 즉, 이미지 그 자체가 시를 끌고 가는 힘(역량) 혹은 리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이미지를 감각기관(시각, 청각, 촉각 등), 질료(불, 물, 바람 등), 운동성(상승과 하강, 확산과 수렴 등)에 따라 분류하고 분석했다. 한 시인의 작품에 청각 이미지가 많다든가, 물의 이미지가 많다는 등의 분석은 이미지를 시의 의미에 종속시키거나 기교(technique) 차원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존의 ‘전통적인’ 접근법은 결국 기계적인 결과만 가져올 뿐인데, ‘이것’ 아니면 ‘그것’이라는 이분법은 시-읽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를 ‘구조’로 환원할 뿐이다. 중차대한 것은 그 이미지가 어떻게 시를 끌고 가며, 이미지에 어떤 수많은 감정들이 달라붙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에서는 ‘초라한’ 내용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포획하고 있는 폭발 직전의 강렬한 에너지가 중요한 것이므로, 이 글은 다섯 권의 시집을, 혹은 시 한 편을 끌고 가는 이미지나 장면 ‘하나’를 찾고자 한다. 그 이미지가, 곧 시인의 개성이자 시인의 리듬일 것이며, 시집 전체를 견인해 가는 힘일 것이다.
1. 입 무거운 한 사내― 김진길, 화석지대
육군 중령 김진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화석지대는 섬세한 감각과 군더더기 없는 단시조들이 눈에 밟힌다. “낭독하기 좋은 그리움의 시편”(시집 해설)이라는 박수빈의 지적처럼 몇몇 작품은 소리 내어 읽다보면 오랜 그리움이 스며들기도 하는데, 강직하고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시집 배면에 깔려 있다.
운다, 천둥 같은 소리를 감추고 첨리한 발톱으로 산등을 찍고 서서 고압을 송전하는 사내 속으로 운다
아, 멀찍이 서서 어디론가 향하는 건 한 송이 개화를 위해 극통을 건너는 것 현란한 꽃들의 도시, 외곽이 앓는다. ― 「송전탑」 전문
송전탑은 “고압을 송전하는 사내”가 되었다. 이제부터 송전탑은 사내다. “천둥 같은 소리를 감추고” “첨리한 발톱으로 산등을 찍고” 서 있다. 산등을 찍고 서 있을 만큼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속으로 운다”. 마치 이 세상의 아버지처럼, 일반적인 남자의 일생처럼 “멀찍이 서서” “어디론가 향하”는 일, 그것은 “한 송이 개화”를 위한 일이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다. ‘극통極痛’을 건너는 ‘사내’라는 이미지가 끝까지 시를 끌고 간다. 굵은 전선을 다발로 이어있는, 가끔은 축 쳐져 있는 듯한 송전탑처럼. 그러나 멀리 간다.
역사를 끌고 온 등은 반쯤 헐고 굽어 있다 묵언으로 수행해온 질긴 생태의 업業 단단한 곡력曲歷이련가 낙타처럼, 소처럼
한때는 꼿꼿했던 저 굽은 아버지 등 한 생이 야위도록 누대로 부대껴온 저 산맥, 하늘 한 판을 통째로 업고 있다 ― 「능선을 읽다」 전문
시인은 산들을 따라 이어진 봉우리의 선線인 ‘능선’을 “굽은 아버지 등”으로 이미지화시키면서 능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역사를 끌고 온 등”이면서 “반쯤 헐고 굽어 있”는 아버지의 등은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산맥과 같아서 “생태의 업”을 갖고 있고 “단단한 곡력”을 유지하고 있다. 낙타처럼, 소처럼 말이다. 산맥이 하늘을 업고 있듯이, 아버지 역시 한 생을 업고 있다. 능선=아버지라는 등호가 끝까지 유지되면서 시의 긴장이 팽팽히 유지되고 있다.
눈 밝은 가등처럼 입 무거운 한 사내가 빗나간 예보 앞에 알몸으로 홀로 서서 흑암을 뚝뚝 자르는 광검光劍을 맞는다
십자가 등에 지고 대속하는 예수처럼 일가를 이룬 위엄 그 위엄으로 영접하는 꼿꼿한 함묵을 보라, 저 거룩이 찌릿하다
으아아 으아아아 감전된 속울음으로 긴 묵언 빛을 벼리다 빛이 된 사나이들 갈라진 어둠 틈새로 가솔家率의 등을 켠다. ― 「피뢰침 1」 전문
이제는 피뢰침이 ‘입 무거운 사내’가 되었다. 이제 사내의 속성이 피뢰침의 속성과 얼마나 같은지 하나씩 살펴보자. 사내는 “눈 밝은 가등”이지만, “빗나간 예보 앞에 알몸으로 홀로 서서” “광검을 맞는다”.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사내는 “십자가 등에 지고 대속하는 예수”와 같아 보이기도 해서 “꼿꼿한 함묵”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위엄威嚴을 이루고 있으며 “거룩이 짜릿하다”. 모두 사내의 일이며 피뢰침의 일이다. 마침내 “감전된 속울음”으로 “빛을 벼리다 빛이 된 사내”는 “가솔의 등”을 켜는 가장임을 밝힌다. ‘피뢰침’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시의 제목뿐이다. 마지막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시는 끝까지 가장이라는 사내의 속성을 이야기했다. 피뢰침이 아니라, 가장이라는 사내가 시를 끌고 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작품 모두 대상을 ‘사내’로 치환시켰는데, 일반적인 시집에서 보여주듯이 가족-서사는 극히 일반적인 것이면서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김진길 시집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사내’는 변검變臉처럼 여러 사물들의 얼굴을 썼다 벗었다 하며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시인이 바닥이 다 드러난 저수지 물곬에서 발견하는 자신의 근원을 ‘아버지’로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닥이 다 드러난/ 저수지를 바라본다// 창시 혹은 탯줄처럼/ 수원을 잇는 물곬// 가문 날,/ 아주 가문 날/ 나는 근원에 닿는다”(「아버지」). 사내에게 아버지는 끝내, 극복의 대상이자 경외의 대상이다. 사내는 곧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2. 소문은 넝쿨 타고― 문수영, 화음 “계절과 계절 사이, 환절기마다 몸살을 한다”(시인의 산문 「Black and White」)는 문수영 시인은 예민하다. 이번 세 번째 시집 화음은 “연두는 온 힘을 다해 들창문 두드리지만” “점점 더 무채색이 되어가는 내 방안 모서리”(「갱년기 1」―4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보송보송 싹 틔우는 바닥에 고인 밀어”를 본다. 시인은 자신과 가까운 세계에서 세계 전체로 줌 아웃(zoom out)하고 있는데, 피사체는 같다.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집안이 광활한 우주”이며 “틈새가 먼지의 집”(「먼지의 행로 2」)인 것을 안다.
내장 속까지 진동하던 장미향 사라졌다 서랍에서 오래 뒹군 볼펜 속 잉크처럼 만지면 부스러질 듯 뺨은 아직 붉은데 ― 「장미 2―갱년기 2」 전문
시인은 장미향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장 속까지 진동하던” 장미향은 이제, “서랍에서 오래 뒹군 볼펜 속 잉크”처럼 모조리 휘발되었다. 아마 장미향은 시인이 알기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서랍을 정리하다 한참이나 늦게 발견한 볼펜처럼, 장미향도 그동안 잘 몰랐지만, 그렇게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만지면 부스러질 듯” 존재 자체가 무용無用해졌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미 혹은 장미향이 아니라, ‘갱년기’다. “뺨은 아직 붉은데” 소멸을 향하는, 향이 사라진 장미와 같은 존재성에 처하게 된 ‘갱년기’. “뺨은 아직 붉은데”에서 ‘은’과 ‘데’에 눈길이 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가 눈이거나 비였으면 좋겠어 선 채로 온몸으로 받을 수 있으니까
빈 들녘 바라만 보다 우두커니 보낸 날
꽃잎은 갈기갈기 하늘 향해 솟구치고 만개한 꽃 속에 벌이 푹 빠져있듯
열기는 유효기간 없이 하루하루 자란다 ― 「꽃무릇」 전문
시인은 “선 채로 온몸으로 받을 수 있”는 ‘꽃무릇’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네가 눈이거나/ 비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물론 “빈 들녘 바라만 보다 우두커니 보낸 날”이 많았을 것이다. 네가 없는 빈 들녘을 지키는 꽃무릇.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잎은 갈기갈기/ 하늘 향해 솟구”쳐 있다.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만개한 꽃 속에 벌이 푹 빠져있듯”, ‘열기’는 “유효기간 없이 하루하루 자란다”. 여기서 말하는 열기는 너를 향한 욕망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너의 부재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이 바로 그렇다. 시인은 지금 유효기간 없이 하루하루 자라는 열기 속에 또는 열기로 있다. 꽃무릇이라는 이미지가 시인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다.
너에 대해 모르지만, 가슴에 안기는 거야 꽃이 상하지만 너를 감싸고 싶어
쉽게 저물지 못하는 여름밤, 소문은 넝쿨 타고 하얗게 담을 넘는다 돌담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지나친 시간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얇은 잎사귀의 소문들 벌처럼 붕붕거리며 날아다닌다 누가 언제부터 이곳에 돌담을 쌓아 먹은 귀 열어 다시 바람소리 들리게 하는지… 키 작은 꽃들이 뙤약볕 아래 발돋움해서 살갗을 태울 때 담장을 타고 스르륵 넘는다 꽃봉오리 맺을 땐 꼿꼿할 자신 있었다 자라나면서 자꾸만 기댈 곳을 찾는다 담쟁이도 이끼도 자라나 그늘로 치부를 감출 때 담장에 기대어 속삭인다
담 위에 손때 자욱도 금간 곳도 덮었다 ― 「넝쿨장미」 전문
너를 잘 모르지만 네 가슴에 안긴다. 너는 꽃인데, 나는 너를 안고 싶다. 그리고 그 소문은 “넝쿨 타고 하얗게 담을 넘는다”. 돌담을 따라가며 “무심코 지나친 시간의 무늬”를 보고, “벌처럼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얇은 잎사귀의 소문들”을 듣는다. 너를 안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담장을 타고 스스륵 넘는다”. 꽃봉오리일 때는 “꼿꼿할 자신 있었”지만 이제는 “자꾸만 기댈 곳”을 찾게 된다. 내가 기댄다는 것도 소문이다. “그늘로 치부를 감출 때” 담장에 기대어 속삭이는 것은 장미인가, 소문인가, 나인가. 나와 장미와 소문이 뒤엉키며 담장을 넘는다. 그렇게 넝쿨장미가 돌담 따라 뻗어가듯 소문이, 시 한 편이 뻗어간다. “손때 자욱도 금간 곳도” 덮어가며 시 한 편이 뻗어간다. 이 시에서 독자가 읽어야 할 것은, 내용이 아니라 리듬이다. 넝쿨장미가 리듬이 되었다.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식물성은 지금 시인의 (마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식물은 쉽게 꺾일 수 있지만, 끈질긴 생명력은 꺾이지 않는다. 시인도, 시도 그렇다.
3. 선홍의 고백― 박옥위, 낙엽 단상
3수 이상의 연시조가 상당수 수록된 이번 시집 낙엽 단상은 여전히 할 말 혹은 해야할 말이 많은 시인의 부지런함이 엿보인다. 시력 35여 년이 넘고, 10권의 시집을 상재하였지만, 여전히 써야할 것이 많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고통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고통은 신비화된 창작의 고통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살아내야할 삶이 녹녹치 않다는 뜻이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요에 강이 실려 흰 돛배 한 척 뜬다 흐름을 타고 앉아 비문 읊는 저 강물 가슴이 다 저리도록 보름달이 기운다
새하얀 돛배에 앉아 삿대를 쥐는 여인 웃을 듯 손 흔들 듯 맨발로 가는 사람 적막에 빈틈이 있어 하늘은 푸르구나
사유의 실 머리는 무아無我처럼 가벼운가 고요바다 한가운데 서먹서먹 일엽편주 투명한 실루엣으로도 돌아보지 못한다 ― 「편주片舟 ―언니 가시는 날」 전문
‘편주片舟’를 타고 떠나는 ‘언니’가 시의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흰 돛배 한 척”은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보지 못”할 때까지 강물을 타고 간다. 이 강은 그리스로마신화의 스틱스 강 혹은 레테 강일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망자는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깨끗이 지우면서 저승으로 간다. “비문 읊는 저 강물” 그리고 “가슴이 다 저리도록” 보름달이 기우는 강을 건너는 “삿대를 쥐는 여인”은 “맨발로 가는 사람”이다. 더 이상 땅에 발을 디딜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시 한 편은 강물 흐르듯, “고요바다 한가운데 서먹서먹 일엽편주”로 떠 있다. 창세기를 읊어가는 우포늪의 새벽 비는 풀잎 끝 실잠자리 점 같은 귀도 열어 들릴 듯 아니 들릴 듯 창세기를 들려준다
구겨진 메시지를 소살소살 펼치다가 소나긴 저녁 하늘에 무지개를 걸쳐둔 채 솟아난 뭉게구름타고 산을 넘어가는데
성성한 가시연꽃이 시린 가슴을 열었다 저 진보라 가슴은 누가 쓴 메시진가 아파라 못내 아파라 다 읽을 수 없구나
온몸이 가시, 가시투성이인 삶의 이력 너는 네 고통을 선홍이라 고백하지만 선홍의 고백이 있어 숲은 선한 눈을 뜬다 ― 「가시연꽃」 전문
시인은 우포늪의 새벽 비 내리는 소리를 ‘창세기’ 읊는 것으로 들었다. “풀잎 끝 실잠자리 점 같은 귀도 열”만큼 가늘지만, 시인은 듣고 있다. 시인은 지금, 실잠자리로 새벽 비 내리는 우포늪 풀잎 끝에 앉아 있다. 시인은 “구겨진 메시지” “소살소살 펼치”는 소나기가 “뭉게구름타고” 산을 넘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성성한 가시연꽃이 시린 가슴”을 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다 읽지 못한다. 아프기 때문이다. “가시투성이인 삶의 이력”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홍의 고백”이 있어 우포늪은, 숲은 선한 눈을 뜰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빗소리는 우포늪 전체에 내리는 소리는 잦아들고, 가시투성이 가시연꽃에 내리는 소리만 또렷이 들린다. 창세기처럼. 창세기를 읊어가는 우포늪의 새벽비는 마침내 가시연꽃의 ‘선홍의 고백’에 가 닿는다. 평생 밥 먹고 살았다고 아버지봉분
그 옆에 밥그릇 오늘 새로 엎어놨다
비로소 젖가슴 한 쌍, 성형이 완성되다
티 없이 한 생 잘 살았다고 그 밥그릇
땅은 곧 선반이라고 또는 시렁이라고
고봉밥 뚜껑을 덮고 아랫목에 묻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도
밥 먹고 살기란 그리 쉽지 않았지만
때 되면 밥그릇에 밥 푼다 고봉밥 두 그릇 ― 「밥그릇」 전문
‘밥그릇’이라는 이미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분에 대한 시를 끌고 간다. “밥그릇 오늘 새로 엎어놨다”는 진술은 아버지 곁에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고봉밥 뚜껑을 덮고 아랫목에 묻었”으니 그것은 마치 “젖가슴 한 쌍”과 같지만, “밥 먹고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죽어서야 “때 되면 밥그릇에 밥 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전에 ‘고봉밥’ 한 번 먹기 쉽지 않았으나, “티 없이 한 생 잘 살았”으니 이제 영원히 “고봉밥 두 그릇”이 되었다. 밥(삶)과 고봉(죽음)이 팽팽하게, ‘젖가슴 한 쌍’처럼 나란하다. 이승과 저승, 가시투성이인 삶의 이력, 삶과 죽음은 우리 곁에 있지만, 끝내 죽음은 경험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순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은 이 세상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사는 것은 축복이면서 고통이다. 죽음 앞에 선 존재이면서, 필멸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쓰기는 늘 고통스럽다. 시와 언어의 극한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극한의 다른 쪽, 창세기에서 시작하였으니, 써야할 삶이 많을 것이다.
4. 어쩌다 우릴 버린 냉정한 하느님― 윤경희, 태양의 혀
이번 윤경희 시인의 단시조집 태양의 혀는 이미지가 가득하다. 짧은 단시조 안에서 직관과 통찰로 승부를 보려는 의도로 읽힌다. 시제목이 시 외부를 지시하면서 시는 바깥으로, 시 제목으로 향한다. 바깥을 향하는 힘, 그것을 시의 역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이미지다.
늦가을, 마른 숲들이 일제히 쿨럭인다
황홀히 바스러지는 저 환한 폐부 한쪽
여태껏 보지 못했던 실핏줄들이 불끈하다 ― 「입동」 전문
쿨럭이면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실핏줄들이 불끈”하는 늦가을이다. 감기 혹은 폐렴 증상의 이미지는 ‘마른 숲들’을 일제히 쿨럭이게 했다. 일제히 숲이 흔들리는 광경, “황홀히 바스러”진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아마, 숲의 ‘실핏줄’은 잎들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를 형상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입동’이 온다. 그러니까, 찬 공기에 숨조차 투명해질 때 혹은 ‘입김’이 보일 때, 그때 사람도 숲도 기침을 하게 된다. ‘입동’이라는 추상명사를 ‘장면’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다.
마침내 저 붉은 외침 이파리들의 반란
삽시간 번져 오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
머리채 붙잡힌 산자락
물속에 감금당하고, ― 「홍류동 계곡」 전문
‘반란’과 ‘혁명’이 시작되었다. 진압세력에게는 ‘반란’이지만, 주체세력에게는 ‘혁명’이다. 그것도 ‘마침내’다. 폭발직전까지 인내하고 견디다가, 마침내 “저 붉은 외침”으로 “이파리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가을 단풍이 계곡으로 투신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계곡이 붉어지고 있다. 그것은 혁명에 가까워서 “머리채 붙잡힌 산자락”이 “물속에 감금”당하는 것과 같다. 산자락의 머리채가 이파리 낱낱이니, 물속에 감금당하는 것이 맞다. 말 그대로 ‘홍류紅流’, 핏빛, 붉은 빛.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처럼 붉은 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그시 눈 감고 외발로 우뚝 선 너는 어쩌다 우릴 버린 냉정한 하느님처럼
떠날 듯 침묵의 언어만 물살 위에 부려 놓네 ― 「신천 왜가리」 전문
그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왜가리’를 노래한 것을 보았지만, 윤경희 시인의 왜가리보다 탁월한 묘사를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우릴 버린 냉정한 하느님처럼”이라는 진술이 시 전체를, 시집 전체를 끌고 간다. 그렇다. 우리는 신 앞에 선 단독자다.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거나,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 가능성과 현실성을 모르거나 외면하는 가운데 우리는 철저하게 고독을 누릴 수 있다. 그곳에서 시는 촉발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살 위에 부려 놓”은 “침묵의 언어”를 해석해야 한다. 물론, 침묵의 언어를 거부해도 된다.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다. 왜가리가 그렇듯, 우리 역시 “지그시 눈 감고 외발로” 이 땅을 버티고 서있다.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두려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자유롭다. 절망에 지배당하는 실존. 그것을 노래하고 재현하는 것이 시라고 한다면, “때론, 독기 품은 숨겨 둔 칼날”이었다가 “물렁뼈 붉게 자라는, 더 붉게 말이 자라는”(「태양의 혀」) 일이야말로 시 자체가 아닐까. 누구보다 자유롭고 누구보다 두려움에 덜덜 떠는 그래서 그 떨림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입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5. 눈이라도 감고 죽게― 이종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
‘언제나’ 걸출한 입담과 해학이 가득한 이종문 시인의 이번 시집 아버지가 서 계시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각 시마다 ‘이야기’가 가득하다. 시집 한 권이 소설집 한 권보다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시인이 부러 지어낸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이 ‘작정’하고 시적인 소재를 찾아나선 게 아니라, 시적인 상황이 시인에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그것도 시인의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봄날이다 문진표 들고 건강검진 가는 봄날 미친 벚꽃들이 팝콘을 터뜨려서 아침을 쫄쫄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봄날!
명품 핸드백에 채변통을 담고 오는 백목련 여 교수를 병원 어귀에서 만나 슬며시 미소 지으며 눈인사만 하는 봄날!
봄날이다 백목련이 꽃잎을 터뜨려도 대장 내시경을 일단 한번 하고 나면 구겨서 내동댕이친 휴지 쪽이 되는 봄날! ― 「봄날」 전문
‘봄날’과 ‘건강검진’. 시인이 봄날에 건겅검진을 받으러 갔기 때문에 서로 연관시킬 수 있었겠지만, 사실, 이 소재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 그러나 끝까지 ‘건강검진’이라는 이미지를 끌고 가면서 “아침을 쫄쫄 굶어도” “벚꽃들이 팝콘을 터뜨려서” “배고프지/ 않은/ 봄날”이 되었고, “명품/ 핸드백에/ 채변통을 담고 오는” “백목련 여 교수를 병원 어귀에서” 만나기도 하며, “대장 내시경을 일단 한번 하고 나면. 구겨져 내동댕이친/ 휴지 쪽이/ 되는 봄날”이 되었다. 벚꽃=팝콘, 채변통 여교수=눈인사, 백목련=휴지 쪽 등이 ‘건강검진’이라는 소재로 ‘봄날’과 묶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봄날의 전경을 봄날이 아닌 상황에서 본 것이다. 백목련이 꽃잎을 터뜨리는 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작은 멸치, 너는 참 잘난 사람 너여! 나의 몸을 낱낱이 다 해체하라 머리를 똑 떼어내고 배를 갈라 똥을 빼고
된장국 화탕지옥에 내 기꺼이 뛰어들어 너의 입에 들어가서 피와 살이 되어주마 그 대신 잘난 사람아 부탁 하나 들어다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내 머리를 제발 대가리라 부르지는 말아주고 뜰에다 좀 묻어다오, 눈이라도 감고 죽게 ― 「눈이라도 감고 죽게」 전문
시인 자신을 ‘멸치’로 보고, 서사가 이어진다. “참 잘난 사람” 너는 “나의 몸을 낱낱이 해체”하고, 너의 “된장국 화탕지옥에 내 기꺼이 뛰어들어” “입에 들어가서 피와 살이” 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내 머리를/ 제발 대가리라 부르지는 말아주고” 뜰에 묻어달라고 한다. “눈이라도 감고 죽게” 해달라는 말이다. 시인은 ‘참 잘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하찮은 멸치라는 존재를 빗대어 비록 해체되고 먹거리로 전락하지만 눈이라도 감고 죽을 수 있는 마지막 자존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멸치라는 이미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를 이어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부」에서도 ‘자석’과 ‘못’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핑퐁게임’을 이어간다. “그대는 거대한 자석 나는 작은 못이다가/ 나는 거대한 자석 그댄 작은 못이다가/ 결국은 그대는 자석 나는 작은 못대가리” 자석과 작은 못이라는 유비를 통해 자신과 아내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에 따라 부부라는 관계의 문제는 해석을 통해 시 바깥으로 외연을 확장하게 된다.
풀잎 끝// 이슬 하나// 투욱,// 떨어진다.// 들판에// 쿵―하고// 천둥이 내려앉아// 지축이// 요동치다가// 이윽고// 고요하다. ― 「하관下棺」 전문
‘하관’을 ‘이슬’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이슬이 들판에 “쿵-하고” “천둥이 내려앉아” “지축이// 요동치다가” 고요해질 때까지를 그려냈다. 하관의 이미지를 이슬로 보고 쓴 것인지,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하관으로 비유한 것인지 선후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이슬이라는 이미지가 시 전체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하관이라는 죽음의 이미지까지 말이다. 하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언술은 없지만, 충분히 이슬을 통해 하관의 상황, 느낌,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욱 더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그 사실이 지시하는 세계와의 거리가 멀수록 시는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지시체와 지시세계와의 거리, 그 거리의 간격에 따라 리듬이 발생한다. 이번 이종문 시인의 시집에서 우리는 유머 가득한 일상을 엿볼 수 있지만, 시인은 그 일상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만, 그 윗단계 혹은 아랫단계의 층위는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시는 시로 말하게 하는 것. 이야기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시인의 믿음을 우리 역시 믿는다.
6.
이미지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인다. 아마도 시인은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 하나하나까지 간섭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시의 결말은 시인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뱀이 종잡을 수 없이 휘어가듯, 이미지는 자유롭게 저 멀리 이동할 뿐이다. 그 흔적을 적는 것, 이미지가 지나간 자리를 추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자 권리일 것이다. 이미지를 통해 시인이라는 주체와 객체, 시인과 대상이 관계하는 방식이 그려지는 것인데, 그것 역시 그 영향 관계가 팽팽하게 주고받으며 특정한 곳으로 뻗어나가겠지만,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대상과의 팽팽한 긴장감이 시의 리듬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리듬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공백과 그 연결에서 박자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경사가 급한 곳과 완만한 곳에서, 강한 곳과 약한 곳에서 이미지는 출몰했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폭발한다. 폭발 직전의 강한 그 힘, 그것을 리듬이라고 할 때, 이미지는 마치 안전핀 뽑힌 수류탄과 같아서 손을 조금만 놓아도 폭발한다. 김진길 시인의 ‘사내’, 문수영 시인의 ‘넝쿨장미’, 박옥위 시인의 ‘창세기’, 윤경희 시인의 ‘왜가리’, 이종문 시인의 ‘멸치’ 이미지 등은 시인의 시 한 편을, 시집 한 권을, 시세계 전체를 끌고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미지는 리듬이다.
김남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조집 일요일은 일주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