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예약 상담문의 02-900-8276
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오십견, 관절염/ 만성난치질환/ 체질진료/전통 장침
스마트 한의원(4호선 쌍문역 3번)
제61강 회덕(懷德)과 회토(懷土)
1. 충청도 양반
여기는 대전 충남대학교다. 나는 천안 사람으로 천안서 태어나 천안서 자랐다. 천안 사람들은 항상 서울보다는 대전을 우러러 보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대전중이나 대전고에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천안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면 대개 충남대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대전을 잘 놀러왔는데, 대전에 오면 ‘삼탕’이라는 게 있었다. 유성에 온천탕이 있고, 한밭식당에 설렁탕이 있었다. 한밭식당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리고 대전역전 다방의 쌍화탕을 가리켜 ‘삼탕’이라고 했다.
그러니깐 삼탕을 봐도 대전이라는 곳은 별 볼일이 없었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옛날에 대전에 와서 할 수 있는 게 삼탕 밖에 없었다.
대전(大田)은 큰 밭이라는 뜻이다. 여러분은 여기를 대전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대전이라는 지명은 고지명이 아니다. 조선조 초기까지 대전이라는 지명을 알 수 있는 곳은 대전천(大田川)이라는 시내를 관통하는 큰 개울뿐이다. 성종 때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에 대전천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조선조 초기에 대전천이라는 말은 있었으나 대전이라는 도시명은 없다.
大田川, 在儒城縣東二十五里, 源出全羅道錦山郡地界, 己上三川合流, 爲懷德縣之甲川.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산천조.
그래서 아마 대전천 부근에 텅 빈 밭이 있어서 그걸 옛말로 한밭이라고 그랬던 거 같다. 한밭이라는 조그만 동네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쪽 지역을 고지명으로 말한다면 회덕(懷德)이다.
회덕(懷德郡) : 대전 지역의 고려 초기부터의 지명
- 김정호의 청구도(1834)
덕을 품는다는 뜻이다. 덕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자기 가슴속에 덕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雨述(비슬, 백제) -> 比豊(비풍, 통일신라) -> 회덕(懷德, 고려초)으로 지명이 변했다.
比豊郡, 本百濟雨述郡, 景德王改名, 今懷德郡.
- 『삼국사기』지리3
충남대 캠퍼스는 유성이다. 유성(儒城)은 선비들이 사는 동네라는 뜻이다. 선비들이 가득 사는 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여기는 유명한 양반 동네이다.
유성현(儒城顯) :
회덕에 속한 현. 백제시대에는 노사지(奴斯只)로 불리었다. 신라 경덕왕 때 유성으로 개명.
- 『삼국사기』지리3
이런 말을 하면 욕을 하겠지만, 각도(各道)를 지칭하는 말로 전라도 개땅쇠, 경상도 문둥이, 경기도 깍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충청도는 항상 양반이다.
그런데 왜 충청도 사람들을 양반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다른 도에도 양반은 많았다. 도학자로 퇴계 선생 같은 분도 있었다. 포항 같은 데 가서 진성 이씨라든가 의성 김씨를 깠다가는 뼈다귀도 못 추린다.
2. 송시열
그런데 여기 대전에서 입만 뻐끔하면 뼈다귀도 못 추리는 데가 있다. 은진 송씨들이다. 여기 와서 은진 송씨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죽는다.
은진 송씨 덕택에 충청도 양반이라는 소리가 생긴 거 같다. 은진 송씨의 영수가 누구냐? 그게 바로 송시열이다. 유명한 송시열이 바로 회덕 사람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의 영수.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율곡의 적통을 이어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기사환국때 사사됨.
송시열이 어느 대표인가? 바로 노론의 영수다. 조선조 후기는 노론이 장악했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남인들을 밀어내고 노론이 장악을 했기 때문에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거 같다.
조선조를 통해서 송시열이라는 사람처럼 현실적으로 대접을 받은 학자가 없다. 여러분들은 이퇴계가 아주 대단한 사람 같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퇴계는 조선조 유학사에서 본다면 아웃사이더로 밀려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송시열은 누구 계열이냐 하면 율곡 계열이다. 그리고 조광조 계열이다.
주자(朱子) -> 조광조(趙光祖) -> 이율곡(李栗谷) -> 김장생(金長生) ->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송시열의 선생이 누구냐 하면 유명한 사계 김장생이다. 바로 광산 김씨 우리 집안의 선조다. 그러니깐 여기 은진 송씨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우리 집안의 제자들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 ~ 1631) : 조선조의 추앙받는 대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예(禮)를 깊게 연구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세를 형성하였다. 송시열은 연산에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 직접 배웠다.
하여튼 은진 송씨들은 대단했다. 이퇴계 선생을 이자(李子)라고 할 수 있나? 자(子)는 공자급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송자대전(宋子大典)이라고 해서 송시열 선생의 문집을 정조때 썼다. 이건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주자와 더불어 유일하게 자(子)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 송시열 선생이다. 그리고 송자는 공자와 더불어 성균관 문묘에 배향이 되었다.
송시열은 갑술환국 때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판정되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70여 개의 서원에서 제향되었다. 그리고 영조 20년(1744)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러니깐 충청도 양반이라는 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충청도가 별 볼일 없는 거 같지만 이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황현이라는 사람이 조선조 말기에 매천야록이라는 것을 썼다. 매천야록은 아주 유명한 야사이다.
황현(黃玹, 1855 ~ 1910) :
조선말의 우국지사. 구한말의 역사 『매천야록』을 지음. 한일합방시 음독자결.
거기에서 대원군은 조선을 망하게 하는 3대 폐해가 있다고 했다. 제1이 평안도 기생, 제2가 전라도 아전이다. 전라도가 옛날에 부패가 심했다. 아전들의 부패가 심해서 양반들 볼기를 때릴 정도였다. 그렇게 아전들이 세었다. 그 다음에 제3으로 충청도 양반이 들어간다. 그러니깐 양반이라고 해서 좋을 게 없다. 그 만큼 이곳은 좋고, 나쁜 게 얽혀있다.
雲峴嘗稱朝鮮有三大弊 : 湖西之士夫也, 關西之妓也, 全州之吏也.
-황현, 매천야록(梅天野錄)
경상도 문둥이는 경상 지역에서 하도 글을 많이 읽기 때문에 문동(文童) 즉 글을 많이 읽는 학동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 전화된 거라는 학설도 있다.
3. 왜 충청도 양반?
그런데 아무튼 왜 충청도를 양반이라고 그랬을까? 사실 양반이라고 하면 경기 양반이다. 경기의 경(京)이라는 것은 서울이다. 지금은 경기도라고 하면 서울이 빠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서울 근처를 근기(近畿)라고 해서, 서울과 서울 근처 지방을 경기(京畿)라고 부른다.
경기(京畿) : 서울(京)과 서울부근(畿).
경기가 원래 진짜 양반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왜 충청도 양반이 유명한가? 생각해보면 아마 충청도 양반들은 서울에 가까우면서, 서울에서 좀 쳐져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B급 양반들이 좀 악랄하게 행세를 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유명한 거 같다.
4. 식장산 고사
그리고 충청도 양반의 성격을 아주 잘 말해주는 고사(故事)가 하나 있다.
대전광역시랑 옥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식장산이라는 산이 있다. 대전 사람은 모두 식장산을 알 거다.
식장산(食藏山) : 대전 광역시와 옥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 해발 598m. 일명 식기산(食器山).
이게 식장산은 식기산이라고도 한다. 식장산을 왜 식장산이라고 할까? 여기에 재미난 고사가 있다. 식장산의 유래에 관한 고사가 있다. 이 고사를 보면 충청도 양반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옛날에 아주 행복한 부부가 식장산 밑에서 살았다고 한다. 거기서 아들을 하나 데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 늙은 노모를 공양하고 살았는데, 이 부부의 효심이 아주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님이 잘 잡수시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알고 살았던 효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네 식구가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고민이 생겼다. 어머니한테 음식을 정성스럽게 해서 올리면, 손자 놈이 낼름낼름 다 먹었다. 어머니한테 정성껏 공양을 하려고 하는데, 손자가 다 먹어서 고민이 생겼다.
‘우리 어머니를 잘 봉양해야 하는데, 이놈이 커갈수록 우리 어머니 음식도 못 드리게 다 집어먹고 그러니 할 수 없다.’ 옛날에 집은 가난해서 굶게 생겼는데 식구는 많은 집이 많았다. 그래 가지고 생각을 한 게 뒷산에다가 어린애를 가져다가 묻는 것이었다. 옛날엔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린애를 파묻으려 아이를 업고 산으로 갔다. 부인은 봉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쓰린 가슴으로 산으로 갔다. 그리고 어린애를 옆에 앉혀놓고 땅을 팠다.
그런데 괭이가 들어가다가 쨍그랭 하고 뭔가에 닿았다. 그래서 보았더니 거기에서 신묘한 그릇이 하나 나왔다. 식기가 나왔다.
남편이 이상한 그릇이 있다고 하니, 그때 정신을 차린 엄마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머니가 식사하실 동안 내가 아들을 데리고 잠깐 나갔다 오면 될 거 아니겠어요? 어린애를 파묻어서 죽일 필요까지 있겠어요?’ 그러니깐 남편이 마음이 약해져서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서 그 신묘한 그릇과 어린애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그 귀한 그릇에다가 귀한 곡식을 한 종지 담아놓았다. 그런데 우연히 들여다보았더니 그릇에 곡식이 가득차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거기다 엽전을 하나 놓아두었더니, 며칠 후에 보았더니 엽전이 그릇 가득 꽉 찼다. 그래서 돈이 막 생겼다.
그런데 이게 흥부놀부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점잖은 이야기냐 하면, 이 사람들은 욕심을 안내었다. 그저 자기 아이를 안 죽이고, 자기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다는 것만 감사하게 생각했다. 욕심을 안 부리고 그 그릇을 썼다고 한다. 그것만으로 행복하게 살면서 부모님을 끝까지 잘 봉양하였다. 이 사람들은 욕심을 안내고 일을 열심히 했다. 겉으로 사람들이 식기의 존재를 모르게, 부지런히 일해서 나중에 넉넉하게 살림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 식기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화(禍)가 될 거 같으니, 식기를 도로 가져다가 묻읍시다.’라고 했다. 그리고 식장산에 가져다가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식기가 감추어져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식장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동구 삼성동 이철재가 제공, 이재순 채집.
- 『대전시사』3권, 681쪽.
어느 나라 어느 동네 설화를 봐도 이렇게 양반스러운 설화가 없다.
어른 공양 잘하고, 자식 잘 돌보고, 그러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설화다. 마음이 여리고 그러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고 돈이 쏟아지는데도 그걸 쓰지 않고 정직하게 벌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충청도 양반의 본질이다.
5. 君子懷德, 小人懷土
이런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없이 이야기가 많은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면 이 강의는 ‘전설따라 삼천리’가 될 테니깐,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
여기를 대덕단지라고 하는데, 대덕이 큰 덕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곳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대덕은 대전을 시(市)로 승격하면서, 대전의 대(大) 자하고, 회덕의 덕(德) 자를 합쳐서 대덕(大德)으로 한 것이다.
1948년 대전부가 대전시로 승격되면서 대전군의 일부와 회덕군을 병합하여 대덕군으로 명명함.
대덕(大德) = 대전(大田) + 회덕(懷德)
대덕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없었다. 그건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의 지방지를 쓴 사람도 회덕이 논어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몰랐다. 회덕은 논어 이인편 11장에 나오고 있다.
이걸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면서, 충청도 양반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겠다.
子曰 :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도올논어3 52쪽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다. 여기에 군자는 회덕하고 소인은 회토한다고 했다.
회덕이란 우리가 큰 덕을 어떻게 기르고,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도덕성을 함양하며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하는 게 군자라는 말이다.
懷德, 謂存其固有之善.
회덕(懷德)이란 나에게 본래 있는 선함을 기른다는 뜻이다.
- 주자집주
소인은 회토한다고 했다. 토(土)라는 게 땅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영역에서 주인이 될 생각만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원리를 가슴에 품어야 군자다. 자기가 살고 있는 조그만 땅을 품으면 그건 깡패다. 깡패라는 게 항상 자기 터를 잡고 사는 놈들이다. 그게 ‘소인회토’라는 말이다.
懷土, 謂溺其所處之安.
회토(懷土)란 자기가 사는 좁은 영역의 편안함에 탐닉하는 것이다. - 주자집주
그렇게 군자와 소인을 구분해서, 공자께서 군자를 회덕이요, 소인은 회토라고 했다.
6. 君子懷刑, 小人懷惠
그 다음에 군자는 회형하고, 소인은 회혜라고 한다.
君子懷刑, 小人懷惠.
이게 무슨 말이냐? 군자는 보편적인 덕성을 함양하고 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회가 규정한 보편적인 법칙, 도덕적인 법, 법률적인 법에 의해서 정정당당하게 형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인은 그 법망을 빠져나가 어떻게 혜택을 받을지 생각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이게 요새말로 하면 ‘루프홀’이라고 한다. 법망의 구멍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혜(惠)라는 덧은 소위 빽줄을 쓰고 연줄로 어떻게 혜택을 받고 살지 생각하는 놈이다. 이런 것만 생각하면 소인이 되는 것이다.
회형(懷刑) 즉 정정당당하게 벌을 받을 게 있으면 받고, 보편적인 원리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 군자다.
루프홀(loophole) : 법망의 약점을 이용하여 빠져나가는 구멍
그러기 때문에 충청도 사람들은 항상 회덕하고, 회형하는 사람이다.
7. 소라이의 해석
일본의 ‘소라이’라는 학자는 이 문장을 아주 재미있게 해석한다. 군자와 소인의 관계를 군자는 치자(治者)고, 소인은 일반 백성이라고 본다. 군자와 소인을 동등한 자리에 놓지 않고, 서로 위(位)가 다르다는 정치학적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군자회덕이라는 것은 덕치를 말하는 것이고, 군자회형이라는 것은 법치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군자 즉 다스리는 자가 덕만을 생각하면, 소인들 즉 국민들이 자기 땅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이 ‘국민들을 어떻게 벌을 줄까? 어떻게 형을 줄까?’하고 법치주의만 생각하면, 소인들은 어떻게 그걸 빠져나갈까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조건절 주절
德治 좋은 정치 君子懷德, 小人懷土
法治 나쁜 정치 君子懷刑, 小人懷惠
그래서 이것은 군주와 백성 사이의 조건 계약 관계다. 즉 군주가 회덕의 정치를 하면 백성들이 회토하여 자기 땅에서 편안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군주가 벌 줄 것만 생각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빠져나갈까만 생각하게 되므로, 그 사회는 몹시 불신사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라이는 이런 기발한 해석을 내렸다. IF THEN 문장이 되는 것이다. 조건절과 주절로 이루어진 문장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기발한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자사상에 있어서 군자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은 일관되게, 그렇게 계급적 격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군자와 소인을 동일한 인간으로 보고, 덕이 있는 자와 덕이 없는 자로 놓고 말씀을 해야만 공자 사상의 보편성이 더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후자의 해석보다 전자의 해석을 취한다.
공자 사상에 있어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은 단순히 계급적 차별이나 위(位)의 유무로 해석될 수 없다.
8. 이인(里仁)편 2장
한 번 읽어보겠다.
子曰 :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 도올논어 3권 21쪽
논어는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이인편은 4번째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이인편은 앞의 세 편보다도 훨씬 더 오리지널한 공자의 이야기를 담은 파편으로 간주된다. 4번째에 오는 장이지만 앞의 학이편, 위정편, 팔일편보다 더 연대가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인(里仁) : 『논어』의 제4편. 『논어』는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학이」「위정」「팔일」세 편보다 이 「이인」편이 더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의 모음집이다.
그래서 이인편의 특징은 전부 자왈(子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한다. 다른 편에서는 공자가 누구하고 이야기를 했다던가 하는 고사가 들어가 있거나 상황설명이 있다. 그런데 이 편은 상황설명이 전혀 없고, 누구에 대한 평도 없고,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짤막한 말들로만 되어 있다.
공자가 돌아가시고 자공은 초막을 짓고 6년 상을 지냈는데, 그때 공자님의 짤막짤막했던 말들을 기억해서 써놓을 것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공자 사상의 오리지널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된다.
성서에 복음서가 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는 쉽게 말해서 예수라는 사람의 전기다. 예수의 전기문학이다. 지금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문학적으로 보면 전기문학이다.
『신약성서』의 4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다른 4종의 전기문학(biographic literature)이다.
그런데 최근에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서양에서 최근 20세기에 들어와서 어마어마한 성서시대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 2세기에 있었던 지금의 성경과 비슷한 당대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 : 20세기에 발견된 제5복음서. 나하그 함마하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중에 그 전문이 완정하게 콥틱어로 보존되어 있다.
그런 것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 도마복음서라는 게 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4복음서 외에 도마복음서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재미있게도 예수님의 어떤 드라마가 없고, 114개의 예수님의 말씀들을 짤막짤막하게 나열하고 있다. ‘Jesus said’,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하고, 말씀만 114개 나열해 놓은 형태로 되어 있다.
『도마복음서』는 AD 50 ~ AD 100년경 사이에 성립한 것인데 114개 항목의 짤막한 예수 말씀의 모음집이다. 모두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로 시작된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도마복음서와 같은 성격에 해당되는 것이 이인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도마복음서 양식 : Jesus said
이이편 양식 : 子曰
그런데 여기에 보면 공자님 말씀이 뭐라고 했냐 하면, 인(仁)하지 못한 사람들을 불인자(不仁者)라고 했다. 양반들의 특징은 인(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불인자, 인(仁)하지 못하여, 마음이 어질지 못하고, 감수성이 발달되지 않고, 상황적 변통이 없고,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不可以久處約이라고 했다.
不仁者 不可以久處約
불인한 사람들은 곤궁하고, 괴롭고, 모든 것이 충족하지도 않고, 모든 게 절약되고, 행운도 절약되고, 모든 게 재수 없고, 모든 게 어려운 상황에서 오래 살 수가 없다.
약(約) : 절약의 의미지만, 여기서는 인생의 곤궁한 상황을 말함.
또한 행복하고 즐거운 상황에서 오래 처(處)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낙(樂) : 인생의 즐겁고 행복한 상황.
아주 곤궁한 상황에서 오래 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즐겁고 행복한 상황에 오래 처하는 게 어려운 일이다.
不可以長處樂.
아까 식장산의 전설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식기를 얻은 것은 즐거운 상황이다. 돈이 마구 생겼다. 그렇지만 그런 즐거운 상황에서 그 돈을 마구 썼다면 그 사람들은 완전히 불행과 파탄으로 갔을 것이다.
그 식기를 다시 묻은 것은 위대한 것이다. 즐거움에 오래 처(處)하려면, 인간에게 도덕적 가치가 끊임없이 창출되어야 한다. 그래야 즐거움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즐겁다고 해서, 모든 게 행운이라고 해서 이것을 엔조이하고, 쾌락주의에 빠지고 도덕적 파멸이 오게 되면, 모든 게 다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불인한 사람들이다.
인간이 즐거움에 오래 처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 즐거움이 도덕적 가치를 계속 창출하지 않으면 곧 타락하고 불행해진다.
그래서 仁者安仁, 인(仁)한 사람들은 항상 인(仁)한 곳에서 편안함을 얻고, 知者利仁, 지자(知者)는 인(仁)한 곳에서 이익을 취한다고 했다.
9. 지자(知者)와 인자(仁者)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을 아는가? 그게 원래 지자(知者)는 요수(樂水)하고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논어는 지자(知者)와 인자(仁者)를 나누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내가 보기에 상당히 어렵다. 왜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고 그랬는지 해석하기 어렵다.
또 지자(知者)는 동(動)하고, 인자(仁者)는 정(靜)하다고 했다.
知者動, 仁者靜.
-옹야 21
이런 말을 보면 아마도 이렇게 볼 수 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다이내믹하다. 스쿠버다이빙을 한다든지 서핑을 한다든지 다이내믹하다. 지(知)라고 하는 것은 다이내믹스, 아주 동(動)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거 같다.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고요하고 뭔가 음미하는 것이다. 인(仁)한 사람들은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마 충청도 사람들은 물보다는 산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仁者安仁 : 순수한 무전제의 도덕의식
知者利仁 : 이익을 전제로 한 도덕의식
이 근처에 금강이 있지만, 충청도는 물이 귀하다. 산수가 수려하지도 않다.
산수가 수려해야 인물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자란 천안에 가면 개울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천안 삼거리도 가보면 아주 초라한 곳이다.
그런데 풍수지리를 제대로 보는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풍수지리는 역수가 중요하다. 고산(高山)으로 이루어진 곳의 높은 곳에는 명당이 없다. 가장 나지막한 곳에 명당이 숨어있다. 명당은 역수(逆數)로 잡아야 한다. 산들이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에서 명당을 찾아야 한다.
강줄기와 함께 산줄기가 흐르면 그런 곳에선 명당이 나오지 않는다. 산줄기가 역으로 들어오는 산세에서 명당이 있다.
역수(逆數) : 일반 법칙에 거슬리는 이치
이런 것은 여러분들은 잘 모른다. 나처럼 다녀봐야 감(感)이 온다.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인물이 날 거 같지만, 거꾸로 산수에 치여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고로 충청도의 산수는 볼 게 없지만 인물이 잘 난다.
많은 사람들이 충청도라고 하면 느리고 순하게 본다. 그래서 ‘비행기 저기 가유.’라고 해서 쳐다보면 비행기가 지나가고 없다는 말이 있다. 충청도 사람은 순하고 욕심도 안 부리는 거 같지만, 무서운 사람들은 전부 충청도 사람들이다.
우리 동네도 보면 유관순 누나부터 철기 장군 이범석, 가장 무서운 공산당 박헌영, 추사 김정희 등 무섭기가 이를 데 없는 추상같은 인물들이 모두 이 밋밋한 산세에서 나왔다.
10. 송시열
이곳의 송시열은 그야말로 노론의 영수였다. 나는 사실 사상사적으로 송시열을 존경하지 않는다. 너무 세속화된 측면이 많다. 그러나 위대한 학자임에는 틀림없다. 송시열 선생은 대 문장가였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이야기를 하다가도 ‘주자’라고 하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야말로 주자학은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대학 때 노자도덕경을 구해서 처음 봤을 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게 그 당시에는 이단서였다. 우리나라의 주자학 토양에서 노자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부를 했다. 노장사상이라는 것은 그 당시 이단이었다. 7,80년대 막스의 자본론을 보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주자학의 토양이 강한 동네이다.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이 주자학을 신봉하게 된 연유가 송시열한테 있다. 송시열은 주자 선생의 일언일구라도 변경을 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 아주 주자 정통주의를 고집하는 분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송시열 문하에서 주자어류라든가 주자대전에 대한 연구가 아주 치열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준 피해도 많다.
송시열은 철저한 주자신봉주의자였다. 주자의 일언일구도 다르게 해석되면 모두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주자학을 깊게 연구하여 『朱子大全箚疑』『朱子語類小分』을 썼고, 그가 착수한 『朱書同異考』는 제자 한원진이 완성했다.
기해예송이라는 게 있다. 국사시간 시험에 나와서 봤을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현제자가 아버지한테 벼루로 얻어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었다.
기해예송(己亥禮訟) :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인조의 계비)가 차자인 효종을 위하여 3년 복상을 하느냐 1년 복상을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남인과 서인이 싸운 정치논쟁.
그런데 효종은 중국에 잡혀갔었기 때문에 한이 맺혀 돌아왔다. 게다가 무인기질이 있기 때문에 북벌을 주장한다. 우리가 청나라 오랑캐를 쳐부수고, 명나라로 회복시켜서 우리나라의 체면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북벌론을 추진한다. 그때 북벌론을 담당해줄 유림의 영수로서 송시열을 떠받든 것이다.
그렇게 효종을 백그라운드로 해서 송시열의 위세가 등등했던 것이다. 송시열은 당시에 무서웠다. 그리고 송시열이라는 사람은 문장을 잘 썼다. 송자대전을 보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의 문장이라는 것은 대단한 이론서를 별로 없고, 남의 행장이나 비문 같은 것을 무지하게 써주었다. 그 당시 송시열의 글을 받으면, 받은 집안은 대단하게 인정을 받았다. 그럴 정도로 송시열이라는 분은 대단한 분이다.
그러다가 효종이 죽는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효종이 죽고나서 3년상을 해야 되느냐? 기년제로 1년제만 하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 싸웠다.
그런데 3년상을 주장한 게 허목, 윤선도와 같은 남인 계열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을 1년이면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효종은 장자(長子)가 아니니깐 모친이 아들을 위해서 3년상을 지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3년상과 1년상을 놓고 싸운 게 기해예송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알면 잘 모르는 것이고, 송시열이라는 사람은 사림의 보편적인 질서에 의해서 나라가 다스려져야 하기 때문에 왕도 일반 사대부 가문에 준하는 예법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1년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송시열, 즉 서인(노론)의 입장은 왕가의 예를 일반 사대부가의 예와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대부의 보편적 이념에 의하여 국가가 통치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남인들이 보기에 1년상은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그래서 차자(次子)라고 할지라도 왕이기 때문에 왕으로 대접을 하려면 3년상을 제대로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왕권의 강화를 의미했던 거 같다.
그러니깐 어떤 의미에서 왕권을 중심으로 해서 파들이 나누어진 것이다.
남인은 왕가의 예가 사대부가의 예와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강력한 왕권중심의 통치이념과 상통한다.
나중에 노론이 되는 서인들은 사림의 보편적인 질서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옳다고 보았다. 주자학 정통주의에 의한 유림들의 보편 질서를 이야기했던 거 같다.
역사는 항상 그냥 그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왜 3년과 1년이었는지 내면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이건 내가 역사를 보는 하나의 각도다.
그러나 송시열을 나중에 장희빈 아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다가, 장희빈한테 미움을 받아서 결국 사약 받고 죽는다. 거대한 노론의 영수였던 이 사람이 제주도에 귀향 갔다 오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런데 송시열 선생이 사약을 마시고 바로 죽지를 않았다. 아주 괴롭기만 하고 죽지를 않았다. 옛날에 사약을 꿀꺽 마시면 죽을 거 같지만 안 죽을 수도 있었다.
일화들이 많은데, 송시열 선생이 아플 적에 약방문을 남인의 영수인 허목한테 부탁한다. 내 병을 고칠 사람은 허목밖에 없다고 하면서 정적(政敵)한테 방을 부탁한다.
허목(許穆, 1595 ~ 1682) : 호는 미수(眉叟). 본관 양천(陽川). 예송문제로 송시열과 대립한 남인의 영수. 전서(篆書)에 뛰어나 서예의 동방 제1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래서 허목에게서 방이 와서 펴보니 부자(附子)가 다섯 돈이나 들어있었다. 부자는 치명적인 살인약이다. 무지하게 더운 약이다. 허목은 송시열의 체질을 잘 알았던 것이다.
부자(附子, radix aconiti)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 바꽃의 괴근에 附生하는 子根. 온열약류로 맹독성이 있다.
송시열 선생이 평소에 동변(童便)을 마셨다고 한다. 어린이의 오줌을 받아서 마셨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뭔가 부작용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런 이유로 그렇게 부자(附子)를 써도 해(害)가 없었던 거 같다.
동변(童便) : 약으로 쓰는 어린이의 오줌. 通氣 등 여러 작용이 있다.
하지만 그런 약방문을 받으니깐, 송시열 제자들이 ‘허목이 우리 선생을 죽이려고 이렇게 흉악한 방을 보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건 안 됩니다.’라고 했지만, 송시열은 ‘이 방을 그대로 써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약을 먹고 병이 낫다고 한다. 정적들 간에도 이런 페어플레이가 있었다. 멋있다.
그래서 이 양반이 나중에 돌아가실 때, 왜 그렇게 고생을 했냐 하면 부자빨이 안 먹혔던 것이다. 그 사약이 무서운 부자인데, 이 양반은 동변을 마셨기 때문에 장이 코팅된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사약을 내려서 안 죽으면 살려주는 게 법이었지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송시열 선생이 편하게 권력만 누리다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11. 이인편 3장
子曰: “惟仁者能好人, 能惡人.”
-도올논어 3, 25쪽
이것도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이인편은 계속 인(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충청도 양반의 속성인 인(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인한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또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인한 사람이 아니면 사람을 미워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미워할 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한 마디를 좋아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디를 가나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한다. 경상도에 가면, 경상도에 좋은 말을 해주었다.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에 좋은 말을 한다.
딴 동네에 가서 다 아부를 했으니깐, 내가 내 고향에 와서 아부를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칭찬해주고, 좋게 말해주고, 장점을 들어내 주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우리 사회를 소통시키려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나를 미워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者)라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인편의 이 구절을 평생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천안은 그냥 밋밋한 동네이다. 천안이라는 곳은 사람들이 오고가기만 하지, 거기에 붙어사는 붙박이도 없다. 천안에는 양반도 없다. 거기는 그냥 뜨내기들만 있는 곳이다.
천안 삼거리라는 곳은 전라도 권에서 오는 사람, 경상도 권에서 오는 사람들이 다 만나서 서울로 가는 곳이다. 그래서 삼거리다. 천안 삼거리는 사람들이 그냥 왔다가 빠지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거기는 그야말로 밋밋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충청도 양반이니깐 모든 사람하고 좋게좋게 지내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충청도 양반은 정말 지독하게 미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충청도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것을 그저 ‘좋게좋게 지냅시다’라고 하면, 이게 유교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을 잊지 말기 바란다.
惟仁者能好人, 能惡人
인(仁)한 자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이런 공자의 말씀을 아주 깊게 사랑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공자의 오리지널한 파편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일생을 통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나? 궁핍한 일을 당했을 때 인(仁)한 마음을 가지고 견디었다. 또 얼마나 공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겠나? 그때 자기도 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워하는 게, 자신이 바로 인(仁)하다는 증거 아니냐고 한다. 이게 공자의 실존적 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이인편을 좋아한다. 오리지널한 공자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12. 팔일편 18장
子曰 :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팔일 18, 도올논어 2, 317쪽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임금 섬기는 예를 극진히 하는데 사람들이 아첨한다고 하는구나.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군(君)을 섬기는 데 있어서 예(禮)를 다한다. 공자에게 있어서 예(禮)라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삶의 질서다.
예(禮) : 아름다운 삶의 질서
인간이 사는 데 예가 있어야 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절을 할 때 여러분들이 같이 절을 해주고, 여러분들이 내 강의를 듣는데도 예를 가지고 내 강의를 듣고 있다.
‘나는 윗사람을 섬기는데 있어서 예를 다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아첨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공자도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비방과 온갖 험담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임금을 섬기는데 있어서 예를 다하는데, 남들이 내가 아첨한다고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人)이라는 것이 여기서는 타인(他人)을 말한다. 이위(以爲)는 ‘~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자가 뭐라고 했냐 하면, ‘예를 다하는 것과 아첨하는 것을 구분 못하는 이 바보 놈들아!’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