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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이사야 26:16-19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력의 첫 주간인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마음을 다해 화답합니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계22:20) 대림절은 이처럼 옛 세계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그 단어는 ‘오심,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큰 힘을 가진 이의 도착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가 오면 불의한 것을 바로잡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지는 분을 기다리는 것은 대개 세상에서 짓밟힌 이들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겪으면서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 혹한의 땅에 사는 사람들, 척박한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지만, 여전히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 이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장엄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징표로 우뚝 서 있습니다.
시절이 어렵기에 우리는 더욱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렁에 빠져드는 자를 건져 반석 위에 세우시는 하나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시102:7)와 같은 처지에 빠진 이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릴 때(시82:5) 굳건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다가도, 외세의 침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짓눌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를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문들을 열어라.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여라.“(사26:1-2)
여기에 보면, ‘들어오게 하여라’라는 명령어도 있지만,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하는 완료 형태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는 미래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지하여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깊이 궁구한 히브리의 지혜자들의 고백은 한결같습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내 앞에서 걸으신다 해도 알 수 없다.“(욥9:10-11)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시77:19)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손이 많으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방법이 많으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역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교만한 자들이 사는 견고한 성을 허무시는 하나님, 그런가 하면,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사26:5, 7).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가능성을 신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일찍이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내면에 모신 이들이 얼마나 당당하게 사는지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가장 어두웠던 그 시간에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하는 것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히11:1)이라고 가르칩니다. 종말론적 미래를 내다보며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절망의 시간, 오늘은 눈물의 시간이라 해도 절망을 넘어서는 희망이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고 말했습니다. 당면한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다 보면 전망을 잃게 되고, 결국은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늘로부터 오는 빛 혹은 가능성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어둠이 지극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평화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현실은 힘 있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다스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힘 있는 자들이 기억조차 되지 않도록 만드실 것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런 확신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련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무겁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찾아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바꿀 것을 요구할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립니다. 시련과 고통은 우리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라는 요구일 때가 많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 전달되는 삶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한 탓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대국의 침입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 앞에 놓였건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간 죄, 자기 욕망을 다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의 몫까지 독차지한 죄,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한 죄, 정의와 공의를 내팽개친 죄에서 돌이킬 줄 몰랐던 것입니다. 시련은 그들을 부르짖게 했지만, 그들을 창조적인 삶으로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이 대목입니다.
“마치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서,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이, 주님,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렇게 괴로워하였습니다. 우리가 임신하여 산고를 치렀어도, 아무것도 낳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이 땅에서 살 주민을 낳지도 못하였습니다.“(사26:17-18)
얼마나 절절한 고백입니까? 산고를 치르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은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우리도 그런 건 아닌지요?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하고도 정치인들은 여전히 정쟁에만 몰두하고, 언론은 그러한 갈등을 증폭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종교인들은 냉소와 비아냥과 혐오 발언을 쏟아내므로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취약계층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 현실이 산고를 겪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무능력 아닙니까? 이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참담할 뿐입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경제 대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일은 얼마나 낯 간지러운 일인지요. 우리나라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극심한 혼란이 새로운 사회를 낳기 위한 산고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사람을 대포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때가 되면 폭발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폭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아를 넘어서서 누군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일으켜 줄 마음이 일지 않고, 불의한 일을 보아도 못 본 척 외면해버리는 사람들, 그들은 불발탄이 된 사람입니다. 왜 인간이 불발탄이 되어 살아갈까요? 화약이 없거나, 뇌관이 고장 났기 때문입니다.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요? 죄 혹은 욕망의 습기가 화약을 적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지다 보니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산고를 겪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 불발탄이 되어버린 사람보다 더 딱한 사람이 있을까요? 불발탄이 되어버린 사람을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고, 이웃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그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발탄이 되었고, 산고를 겪으면서도 아이를 낳을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백성 가운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고,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갈 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 사람이 됩니다. 무기력했던 사람은 활기를 띠게 됩니다. 불발탄이었던 사람은 크게 폭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고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말을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입니다.
생기(生氣)는 ‘날 생’에 ‘기운 기’ 자가 합쳐진 말입니다. 생기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꿈틀거림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 속에 들어가자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애굽을 떠났습니다. 에스겔이 생기를 향해 대언하자 해골들이 맞춰져 하늘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막1:17) 하시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기가 그들을 일어선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기란 ‘날 생’에 ‘일어날 기’가 합쳐진 말(生起)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입니다. 생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오라’(owrah)는 ‘허브(herb)‘를 뜻하기도 하지만 주로 ‘빛’ 혹은 ‘기쁨과 행복의 빛’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어둠 속에 유폐된 사람들 속에 기쁨의 빛을 불어 넣으시어 일어서게 하십니다.
이사야는 생기라는 말과 ‘이슬’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슬은 보통 덧없음을 나타낼 때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입니다. 햇살이 비치면 스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배경으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슬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습니다. 욥은 자기 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와 같고, 이슬을 머금은 나무와 같다”(욥29:19).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붙들고 있을 때의 삶을 ‘이슬을 머금은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또한 자기가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 그 말이 “그들 위에 이슬처럼 젖어 들었다”(욥29:22)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시편 시인은 화목한 가정의 아름다움을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 위에 내림과 같구나”(시133:3)라고 노래했습니다. 척박한 땅에 살아본 이들은 압니다. 이슬조차 은혜라는 사실 말입니다. 바로 이 이슬이 생기입니다. 대박을 바라는 이들의 마음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소박하지만 끈질기게 그리고 아름답게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희망입니다.
‘생기를 주는 이슬‘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한 말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느라 목이 바짝바짝 말라버린 이들에게 이슬처럼 다가가야 합니다. 자기를 긍정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고, 그들을 넘어진 자리에서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은 특정한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큰일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시작하십시오. 학철부어(涸轍鮒魚)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수레바퀴 자국으로 움푹 패인 곳에 붕어 한 마리가 있는 격이라는 말입니다. 몹시 급박한 상황입니다. 그 붕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황하의 넘실거리는 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부어주는 한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일단 생명은 유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 학철부어(涸轍鮒魚) 신세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들의 삶을 책임지진 못한다 해도 그에게 잠시라도 생기를 불어넣는다면 그는 다시 일어나 자기의 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생기를 주는 이슬’로 오셨습니다. 학철부어 신세인 사람들에게 다가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주셨고, 설 땅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 삶의 무게에 짓눌렸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기로 인해 그들이 꿈틀거리자 폭력을 기반으로 하던 로마 제국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통해 세상을 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주셨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사람들 속에 심어주셨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내게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나의 존재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셨고 또 지금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손과 발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의 꿈이 이 땅에서 싹틀 것입니다. 그리고 산고를 겪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 불모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라는 찬양을 부르는 동안 가사가 크게 와닿았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마음에 선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까닭은 사랑으로 안으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꿈틀거리는 사람, 생기 충만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산고를 치르고도 아무것도 낳지 못한 어리석은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꿈인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의 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꿈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지극한 이때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셔서 우리도 어두운 세상에 한 점 불빛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나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신뢰와 애정'이 있다면..
올해 처음 1학년 담임을 맡으셨어요. 스스로 자신할 수 없어..그 동안 기피했던 학년인데..두 분 선생님 중 한 분이 양보해야 되는 상황이라..그 예쁜 권사님이 1학년 담임을 맡겠다고 했대요
서로의 양보를 기다리는..그 상황이 더 불편했대요
하나,
놀라운 건..선생님들 간에..교수법의 노하우를 시원스레 서로 공유하지 않는다네요
우린 함께 고민했어요..그도 그럴 것이..시골이라 그런가?..아이 하나 하나가 가정 환경도, 발육 상태도 모두가 특별했어요
그게 또,
한글을 떼고 2학년으로 올려줘야 다른 선생님에 대한 예의라는 불문율이 있대요..
권사님이 점점 초췌해져 가요
''권사님! 우리 언니가 손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걸 봤어요..우리 책 사러 서점 가요''
~~~
지난 주에 권사님이 그래요
''집사님! 고마워요..아이들이 한글을 쓰고 읽고 하고 있어요...''
''권사님! 아니에요..제가 뭐라고..제 말을 경청하고 행한 건..권사님이 저에게 갖고 있는 '신뢰와 애정'이 크다는 거지요...''
***사람 간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이든..'신뢰와 애정'만 있다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집사님! 나보고 엄마래요..어쩜 좋아요..근데 너무 귀여워요...''
권사님이 두렵다는 말도 해요
1학년 아이에게는 선생님의 말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더래요
*그냥..권사님이 맺은 열매 소식을..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주님의 빛난 이슬이 제게 들어와 생기가 넘치는, 일어선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학철부어 신세인 주변 사람들은 버려두고
소위 말하는 큰 일, 생색나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버리고
작은 나눔, 한 점 불빛을 꿈꾸겠습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제게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갰습니다.
저의 존재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주님의 생기를, 희망을, 사랑을 전하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아멘.
한 줌 햇살에 스러지는 이슬이 아닌
주님의 생기를 머금은 이슬로서의 삶을 꿈꿉니다.
넘어진 사람, 자기를 긍정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님의 심장으로 다가가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꿈에 내 꿈을 포개길 원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주심을 간구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