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환(姜奎煥)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ADDCD658B1697X0
자 장문(長文)
호 존재(存齋)
생년 1697(숙종 23)
졸년 1731(영조 7)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진주(晉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거주지 평택(平澤)
[관련정보]
[생원시]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2등(二等) 18위(23/100)
증광시이다. 숙종대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일과 인경왕후(仁敬王后)·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존호를 올린일, 단의왕후(端懿王后)에게 책례를 올린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고 중궁전 책례를 행한 일과 왕세제의 입학례를 행한 경사로 시행한 시험이다.
규106본과 규귀본, 국도본, 장서각본에 숙종대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일과 인경왕후(仁敬王后)·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존호를 올린일, 단의왕후(端懿王后)에게 책례를 올린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고 중궁전 책례를 행한 일과 왕세제의 입학례를 행한 경사로 시행하였다고 하면서 무과 장원을 밝혔는데, 규귀본에는 무과 장원 부사과(副司果) 이진룡(李震龍)등 136인을 취하였다고 하였고, 국도본에는 무과 장원 이진룡(李震龍)등 126인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장서각본에는 무과에서 이진룡(李震龍)등 136인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규106본과 규귀본에는 이번 회시(會試)의 합격자 최규태(崔逵泰)와 안성시(安聖時)는 전시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경종실록에 박사수(朴師洙)등 41명을 뽑았다고 나온다. 1723년 03월 04일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주천(姜柱天)
관직 : 학생(學生)
[상세내용]
강규환(姜奎煥)에 대하여
1697년(숙종 23)∼1731년(영조 7).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장문(長文), 호는 존재(存齋). 찬성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고, 부친은 강천주(姜天柱)이다.
한원진(韓元震)‧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의 종사관으로 수행, 안동에 이르러 경상도 사민(士民)을 모아 군대를 편성, 군사의 조련을 담당하였다. 한편, 관찰사 황선(黃璿)과 수시로 내왕하며 작전에 관하여도 상의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이듬해 장릉참봉(章陵參奉)이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豊墅集
[집필자]
김용조(金容祚)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계묘 숙종대왕 부태묘 증광 사마 방목(癸卯肅宗大王祔太廟增廣司馬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想白古351.306-B224s-1723])
2005-11-30 《계묘 숙종대왕 부태묘 증광 사마 방목(癸卯肅宗大王祔太廟增廣司馬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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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 4권, 3년(1723 계묘/청옹정(雍正) 1년) 3월 4일(계미) 2번째기사
증광전시를 실시하다
증광전시(增廣殿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 박사수(朴師洙)등 41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 이진룡(李震龍)등 1백 16인을 뽑았다.
○設增廣殿試, 文取朴師洙等四十一人, 武取李震龍等一百三十六人。
강응명(姜應明) 성시(聖時) 1691 ~ ? 진주(晉州) 3등(三等) 20위
강준(姜) 자장(子章) 1694 ~ ? 진주(晉州) 3등(三等) 24위
강주우(姜柱宇) 대휴(大庥) 1685 ~ ? 진주(晉州) 3등(三等) 30위
강규환(姜奎煥) 장문(長文) 1697 ~ ? 진주(晉州) 2등(二等) 18위
강응명(姜應明) 성시(聖時) 1691 ~ ? 진주(晉州) 3등(三等) 16위
경수 4권, 3년(1723 계묘/청옹정(雍正) 1년) 3월 16일(을미) 1번째기사
정시를 시행하다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서 박사유(朴師游)등 13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서 유덕징(柳德徵)등 4백78인을 뽑았다. 이 과거(科擧)가 곧 위옥(僞獄)을 경사라고 칭하면서 설행하여 사람을 뽑은 것인데, 영조조(英祖朝)에 이르러 파방(罷榜)시켰다. 그런데 그 이름을 다시 고쳐 별과(別科)라고 하였다.
○乙未/設庭試, 文取朴師游等十三人, 武取柳德徵等四百七十八人。 是科, 卽以僞獄稱慶設取者也。 至英宗朝罷, 而又復改其名曰別科。
영조 16권, 4년(1728 무신/청옹정(雍正) 6년) 3월 19일(기사) 6번째기사
영남안무사 박사수가 사폐하다
영남안무사 박사수가 사폐하니, 명하기를,
“전적(典籍) 유내(柳徠)와 사인(士人) 강규환(姜奎煥)을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대동해 가라.”하였다.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유내는 위인이 비록 불길(不吉)하나 평소 재명(才名)이 있고 영남의 일에 익숙합니다.”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된 것이다.
○嶺南安撫使朴師洙陛辭, 命以典籍柳徠、士人姜奎煥, 差從事官帶去。 趙文命、宋寅明言: “徠爲人雖不吉, 素有才名, 習嶺南事。” 故有是命。
영조 16권, 4년(1728 무신/청옹정(雍正) 6년) 3월 27일(정축) 7번째기사
박사수가 권구를 붙잡아 서울로 보내다
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안동(安東)에 이르니, 영남에서는 청주의 변란이 있으면서부터 인심이 환산(渙散)되어 수습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 박사수가 재를 넘어오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조정이 있는 줄을 알게 되어 백성들의 의지가 이에 힘입어 점차 진정되었다. 박사수가 이미 이르러 청주의 적이 비록 패했으나 정희량(鄭希亮)과 이웅보(李熊輔)가 또 안음(安陰)에서 일어남을 듣고 즉시 글을 지어 역시 역순(逆順)의 구분을 진술해서 도내에 효유(曉諭)하고, 문경(聞慶)사람 전찰방(察訪) 신필정(申弼貞)과 상주(尙州)사람 전(前)부솔(副率) 성이홍(成爾鴻), 영천(永川)사람 전참봉(參奉) 정규양(鄭葵陽)에게 치서(馳書)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사민(士民)을 인도해 거느리고 의기를 분발해 적을 토벌하게 하고, 안동(安東)의 사민(士民)으로 명망(名望)이 있는 자 이재(李栽)등 수십명을 다 불러 성안에 거처하게 하였다. 본부(本府) 협현(峽縣)에 별포수(別砲手) 5백명이 있는데, 평소 포를 잘 쏘아 정졸(精卒)이라고 일컬어 왔다. 그래서 박사수가 친신(親信)하는 장교에서 위임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진을 쳐서 자위(自衛)하여 뜻밖의 변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때 종사관(從事官) 강규환(姜奎煥)으로 하여금 성밖에서 조련(操鍊)하게 하고 감사 황선(黃璿)과 왕복해 상의하고는 먼저 영장 김정상(金鼎相)을 보내어 속읍(屬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해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처음에 박사수가 사민을 불러 모으는데 권구(權榘)가 유독 늦게 이르렀다. 마침 의금부도사(義禁莩事)가 와서 권구를 붙잡았는데, 국청(鞫廳)의 문서에는 권후(權煦)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박사수가 말하기를,
“안동에는 단지 권구 한 사람만이 명망이 가장 중하니, 만약 역모에 가담했다면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하여,
드디어 권구를 붙잡아 도사에게 붙여 서울로 보냈다. 예천(醴泉)의 술사(術士) 이윤행(李允幸)이 일찍이 적과 서로 왕래해 통하면서 길흉(吉凶)을 점쳐 주었는데, 박사수가 정탐해서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嶺南安撫使朴師洙, 至安東, 自淸州有變, 嶺南人心渙散, 莫可收拾, 不意見師洙踰嶺, 始知有朝廷, 民志賴以稍定。 師洙旣至, 聞淸州賊雖敗, 希亮、熊輔, 又起安陰, 卽作書陳逆順之辨, 曉諭於道內, 馳書於聞慶人前察訪申弼貞、尙州人前副率成爾鴻、永川人前參奉鄭葵陽, 使皆倡率士民, 奮義討賊, 悉招安東士民有名望者李栽等數十人, 處於城內。 本府有峽縣別砲手五百名, 素善放砲, 稱精卒。 師洙委親信將校, 領之陣而自衛, 以防不虞。 時, 使從事姜奎煥, 操鍊於城外, 與監司黃璿, 往復相議, 先遣營將金鼎相, 領屬邑兵, 前進討賊。 初, 師洙招集士民, 權榘獨後至。 會, 義禁莩事來拿榘, 鞫廳文書, 以照書名。 師洙謂: “安東只一權榘, 聲望最重, 若預逆謀, 必是此人。” 遂執榘, 付都事送京。 醴川術士李允幸嘗與賊交通, 爲卜吉凶, 師洙亦詗察, 執送于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