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여름밤
조 한금
‘밤과 꿈’, 가톨릭성가와 예술가곡으로 함께하는 ‘힐링음악회’가 자그마한 시골 성당에서 열렸다. 출입문 입구엔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어 있고, 여교우 몇이서 장수군민을 위한 고품격 음악회에 초대한다는 팸플릿을 나눠주며 젊은 수녀님과 함께 손님을 맞았다. 농촌 특성의 나름대로 성장(盛裝)을 한 신자들이 한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군민을 위한 잔치’라는 취지와는 달리 신자가 아닌 순수군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녁 8시가 되자 연미복차림의 바리톤 가수 한동훈(다미아노)선생이 예쁜 반주자와 함께 성당제대 앞 단상으로 올라와 90도로 인사한다. 반주자가 자리를 잡기 바쁘게 그는 노래를 부른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서산마루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별이고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이병기 시 이수인 곡의 ‘별’이다. 묵직한 바리톤 가수가 아주 예쁜 미성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감동이다. 얼마 전, 8살 외손녀 클레어가 제 어미한테 배웠다며 음정 박자 가사까지 정확하게 불러 나를 감탄케 했던 내 애창곡이다. 박수갈채가 좁은 성당 안을 그득 채웠고 가수와 청중은 곧바로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제야 마이크를 잡고 자기를 소개했다. 작년의 장계성당에 이어 두 번째의 장수 방문이라고. 광주가톨릭신학대학을 중퇴하고, 경희대음대성악과를 졸업한 후 독일의 바이마르 국립음대 유학을 거쳐 지금은 핀란드의 헬싱키에 정착, 60여 명의 국립오페라단원의 일원이 되었노라고 한다. 작년에는 ‘투란도트’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는 그의 말에 관객 모두는 힘찬 박수를 보냈다.
핀란드는 우리나라의 1.2배의 면적인데도 인구 5백만이 사는, 피오르드와 호수와 산이 둘러있는 숲속 나라라서 산속에 띄엄띄엄 있는 외딴 집에서 외로움과 처절하게 사투했노라고 고백한다. 밤에는 달빛과 별빛을 보며 자연과 교감하며 불렀다는 Yo(밤), Glair de lune(달빛) Nacht und Traume(밤과 꿈)을 한 곡 한 곡 부를 때 마다 가사의 시를 먼저 읊어주고 노래해, 눈을 감고 그 시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꿈속의 여름밤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어, 가톨릭 성가 59번 ‘주께선 나의 피난처’를 부를 땐 그가 사제직을 마다하고 음악을 택했으면서도 자기의 재능으로 혼신을 다해 사제직을 수행하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났다.
주께선 나의 피난처/의지할 곳 주님 뿐/풍파가 심할지라도/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새 생명 주옵시며/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성당 안이 숙연했다. 모두가 아는 성가지만 한사람도 입 뻥긋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몸으로 부르는 기도에 감히 누가 끼어들 수 있으랴. 그는 이어 박화목 시 윤용하 곡의 보리밭을 낭송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놀 진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 곡을 작년에 신청한 분 오셨나요?”
우리 부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예, 어르신!”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미성으로 아주 굵은 바리톤의 저음으로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신들린 듯 열창하는 그 노래는 가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였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려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영감도 어느새 일어서서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90도로 숙여 화답했다. 이렇게 감동스런 ‘보리밭’을 일찍이 그 누구의 노래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청중과 가수는 이미 혼연일체가 되어 뜨겁게 무르익고 있었다. 이어 가톨릭 성가 18번 ‘주님을 부르던 날’이 들뜬 장내를 조용히 갈아 앉혔다.
내 마음 다하여 기리오리다/성소 앞에 엎드려 천사 앞에서/당신께 노래하리라
후렴: 주님을 부르던 날/당신은 내게 응답 하셨나이다.
어지심과 진실하심 우러러보며/당신이름 찬양하오리니/내 영혼 힘 도와 주셨네
당신 오른손으로 구해주시고/나를 위해 시작한일 마치시리니/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간절했다. 우리 모두의 기도요 평소의 염원이지만 그는 더 특별한 호소력으로 절절하게 노래했다. 이어 김동명 시 김동진 곡 ‘내 마음’을 부르며 자기 마음도 슬쩍 노래위에 얹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숴 지리다.
그는 끝 곡으로 가톨릭 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우리 모두의 기도로 하느님께 봉헌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후렴: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주 하느님 크시도다/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크시도다 주 하느님
저 수풀 속 산길을 홀로 가며/아름다운 새소리 들을 때/산위에서 웅장한 경치 볼 때/냇가에서 미풍에 접할 때
어느 해 여름휴가 때, 미국의 캐년 세 곳과 후버댐을 남편과 함께 돌아보았다. 그랜드캐넌을 거쳐 후버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자이언캐년’에 도착했을 때, 그 풍광을 보기위해 잠시 버스에서 내렸다. 중년남성인 현지가이드가 ‘주 하느님 크시도다’ 성가를 알면 다 같이 합창하자고 했다. 나는 그 첫 소절을 함께 부르다가 대자연에 압도되어 울컥 눈물이 쏟아져 더 이상 노래를 따라 할 수 없었다. 헌걸찬 남자의 기상이 그랜드캐년이라면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브라이스캐넌은 여성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두 모습을 다 갖추고도 자기만의 위용을 지닌 웅장한 경치의 자이언캐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며 감정이 북받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성가를 부를 때 마다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 늘 새로운데 끝 곡으로 불러주니 참으로 행복해 기립박수로 답례했다. 청중은 젊은 바리톤 가수 한 동훈 선생을 앙코르로 서너 차례 무대에 더 모셨고, 여름날 연미복을 입고 한 시간이 넘도록 온몸으로 열창하느라 진땀 흘린 그를 더는 미안하고 염치없어 놔줄 수밖에 없는 ‘힐링 음악회’가 끝이 났다. 선생은 장계성당에서 참석한 교우 10여 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청했다. 남편은 미리 준비해간 음악 이야기가 잔뜩 실린 자기의 근작近作 산문집 <겨울나무가 던지는 그림자>를 싸인 해서 드렸다.
바리톤 가수가 그렇게 아름다운 미성으로 강약과 고저, 장단음을 온몸으로 열창한 가수를 내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느님이 그 귀한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그를 사제를 만들지 않고 음악가의 길을 허락한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장수성당 사제의 신학교 때 친구로서 그 귀한 여름휴가를 시골 성당으로 와 노래로 봉사하는 선생과의 귀한 인연에 감사하면서 이번엔 내가 내년 휴가 때의 신청곡으로 ‘명태’를 예약하고 돌아서며 ‘여름 밤의 행복한 꿈’속에서 깨어났다.
첫댓글 감동적인장면을 머리속에 그리며 음악회 함께했어요,감사합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웅장하면서도 감미로웠을 그 목소리 듣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울림이 있는 음악회를 금년에도 기대한답니다.
살아 치솟는 음악의 믿음을 힘차게 느꼈습니다.
무한한 은혜에 도취되었을 조한금 카타리나 님이 엄펑지게 부럽습니다.
짜릿한 전율 느끼며 걸음을 돌립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품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천상의 소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