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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풍악장유첩> 1788년경, 지본수묵, 33.0x 48.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163쪽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중 영통동구
직물세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취락을 이룬 것으로 추정되는 오관산 아래 영통동의 마을 초입을 그린 것이다. 평평한 지대에 자리한 영통동은 갓 쓴 선비가 말타고 가는 좁은 길 너머에 있었던 모양이다...243쪽
개경의 생활사, 한국사 연구회, 2007년, (주)휴메니스트 출판그룹
<박연폭포>
강세황이 개성일대를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에 포함되어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32쪽
<이제묘(夷齊廟)>
강세황이 그린 <영대기관첩> 이제묘
백이 숙제의 사적지는 유교 사회 속 조선 지식인들에겐 필수 답사 경로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213쪽.
조천일기, 조헌,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2014년, 서해문집
개화시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는 17세기 말기에 이르러 쇄국적 봉건사회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홍대용 등은 계급을 타파하고 만민개로를 주장하였으나, 유림의 반대로 좌절하였지만, 인권주의를 부르짖던 선단의 운동이었다.
시대적 배경으로 문화예술면에서 새로운 기풍을 일으킨 것은 강세황의 정신세계였다.
예조판서의 직위에 있으면서 문화예술의 자주성을 찾게 하였다.
화원들을 '환쟁이'라하여 천시하였으나 우대하여 주었고, 겸제 정선은 북송과 남송의 모방적인 화법을 벗어나 개성의 준법을 구사하여 우리나라의 진경산수를 그렸으며,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등은 과거의 귀족적인 화풍을 벗어나 민중의 풍속도 등에 개성있는 그림을 그렸다...329쪽
묻혀있는 우리역사, 김준기, 2007년, 도서출판 善
김홍도는 산수, 인물, 그리고 화훼, 영모등 여러 화목에 걸쳐 발군의 화기를 보여 주었던 정조 연간 최고의 화원화가이다. 문인적 소양을 갖춘 화가답게 사군자화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꼽히는 강세황에게 훈도를 받았던 사실을 상기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강세황의 이지적인 문아함보다는 심사정의 풍부한 감성과 서정성에 매료된 듯하다. <백매>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진경시대 말엽, 사군자화의 경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한명의 화가가 임희지이다.
그는 역관출신인 여항화가로 난과 대를 주로 그렸는데, '대나무는 강세황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고, 난초는 그보다 나았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난죽으로 이름을 떨쳤다. 간송미술관 소장 <풍죽>은 그 명성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중기는 사군자화는 물론, 심사정이나 강세황의 사군자와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김홍도와 임희지, 이들의 사군자화는 만개한 꽃이고, 만월이며, 아름답게 물든 노을과 같다. 그래서 화려하고 원숙하여 잔연하다....217 - 222쪽
찬란한 우리문화 진경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14년, (주)현암사
숙종 초에 태어나 영조시대에 주로 활동한 겸재 정선은 조선의 독자적인 산수화품인 진경산수화를 창시합니다.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았던 진경산수화는 사대부 화가인 강희언, 강세황을 거쳐 정조시대 김홍도의 풍속화에 이르러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525-526 쪽
한국사 천자문, 한성주, 2006년, 포럼
심사정이 진경시대 사군자화의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면, 강세황은 이론과 실제에서 진경시대 사군자화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강세황은 강렬한 문인 의식의 소유자로 일생동안 문인화풍의 진작에 힘썼다. 이런 그의 문예지향에 비추어 보면 문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군자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창작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유존작 중 사군자 계열의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량과 품격 또한 여타 화과에 비하여 뒤지지 않는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서는 묵란과 묵죽을 위시한 사군자화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그는 54세때 지은 자신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묵란과 묵죽은 맑고 굳세며 티 없었지만, 세상에 이를 깊이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잘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이것으로 흥취를 담아내고 뜻에 맞으면 될 뿐이다.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본인 스스로도 잘한다 생각지 않았다했지만, 겸손의 말뿐, 속내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판각하여 남겼을 정도로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화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묵죽을 그리는 것은 얼추 알고 있으나, 산수에 대해서는 본디 능하지 못하는 바이다. 창해옹이 내가 그린 대나무를 두렵게 여기고, 산수만 그리게 하니, 이는 수염으로 내시를 질책하는 것이리라.
노년에 후배 문인인 창해 정란(1725 - 1791)의 부탁으로 그림을 그려준 후, 남긴 글이다.
이렇듯 강세황은 산수보다 오히려 묵죽과 같은 사군자에 강한 자부와 깊은 애정이 있었다.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78세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난죽서도>는 강세황 사군자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로로 펼쳐진 두루마기 화면의 좌우를 바위로 막아 널찍한 공간을 마련했다. 여기에 몇 그루의 대나무와 난이 좌우로 호응하고 있다. 이처럼 횡권 형태의 화면은 난이나 바위를 그리기가 무난하지만, 수직으로 자라는 대나무를 그리기가 부적합하다. 그래서 이런 화반에 난죽을 그린 중국 작품의 경우, 바위나 난처럼 지면에 붙여 댓잎 몇 무더기를 펼쳐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장한 느낌은 들지만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세황은 독특한 시각법을 사용하여, 유장하면서도 변화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 냈다. 바위와 난은 지면에 붙여 그리고, 대나무는 지면보다 훨씬 시각을 올려 대나무의 상단부만을 그려냈다. 그래서 마치 대숲 속 정자에 앉아 한포기 난을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유롭고 상쾌하다. 이것이 강세황이 추구하던 공령쇄락의 경지이다.
난의 묘사에서도 그만의 개성과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농담, 건습을 적절히 혼용하여 유연한 필치로 쳐나간 난엽과 정감한 난꽃이 묘사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품격이 느껴진다. 원대 난죽화풍을 기반으로 강경한 필치로 힘찬 기세를 강조했던 조선중기의 묵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향이다.
그래서 강세황은 '우리나라에는 본시 난이 없다'라고 하며 자신의 묵란에 자부심을 피려하기도 했다.
다소 과한 자긍심에서 나온 주장이지만, 그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진경시대 대수장가 중 한명이었던 석농 김광국도 강세황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잎이 긴 난은 우리 땅에는 없으니, 간혹 그리려는 자가 있어도 부들처럼되거나 건초의 하나가 될 뿐이다. 강표암 세황씨가 나오고부터 우리 땅에 비로소 난이 있게 되었다. 세상에 난을 보려는 자는 먼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강세황이면 될 것이다.
강세황의 사군자화는 정약용처럼 사실성을 중시하는 문인들에게는 다소의 비판을 받기로 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르켰고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공감과 상찬은 그의 사회적 위상과 상호 상승 작용을 일르키며 더욱 고조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사로 지내던 생애 전반부의 사군자화가 자오가 여기의 성격이 짙었다면 노년기의 사군자화는 정조연간 문예계를 주도했던 명망이 반영된 자긍과 자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기 사군자화를 이야기할 때, 심사정과 강세황 이외에도 또 한 명의 잊을 수 없는 문인이 있다.
능호관 이인상이다. 그 역시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남종문인화가로 심사정, 강세황과는 또 다른 독특한 심미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212 - 215쪽
찬란한 우리문화 진경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14년, (주)현암사
진경(眞景)이라는 말은 단순히 '진경산수화'의 약칭을 넘어 '실제풍경'이나 '현실풍경', '참된풍경' 같은 많은 해석학적 의미가 담겨있어 이 시대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며 당대적인 경향을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물론 초상화와 화조와 같은 다양한 그림까지 모두 포괄할 수있는 장점이 많기때문에 더욱 뜻 깊고 효과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세기 대표적 이론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은 겸재 정선의 그림을 평해 '우리나라 진경을 가장 잘 그렸다' 고 했을 뿐만 아니라,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의 풍속화를 평하면서도 '우리나라 진경이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함으로써, 18세기에 이미 '진경'이라는 말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로 대표되는 조선적 풍격의 사실주의 회화를 일컫는 말로 사용해 이 시대를 진경시대로 부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강세황은 도산서원일대를 그린 자신의 <도산도>발문에서 이르기를, '그림은 진경을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그것이 닮기 어렵기 때문이요, 우리나라 진경을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그것이 실제와 다른 것을 숨기기 어렵기 때문이며,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경치를 그리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그것이 억측으로 닮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적 사실성'을 핵으로 하는 진경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정립했다.
뿐만 아니라, 강희언의 <인왕산도>를 평해,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매번 지도와 비슷하게 되는 것을 근심하는데, 이 그림은 거의 실제와 똑같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여러 가지 법식도 잃지않았다'고 함으로써, 진경의 핵심이 단순한 현실적 사실성을 넘어 '예술적형상화'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강세황은 조선적 풍격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로 대표되는 18세기 회화적 성과의 본질을 '진경'이라는 상징적 개념으로 포괄하고, '현실적 사실성과 예술적 형상성'을 핵으로 삼는 진경의 창작 이념과 비평 이념까지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정립했다.
이러한 의식은 비록 '진경'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18세기의 비평가들이 하나의 시대 의식으로 광범위하게 공유한 측면이 많았다...
18세기에 강세황을 비롯한 비평가들은 이미 자기 시대를 진경시대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경'의 핵심적인 개념과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진경'시대라는 명칭은 동 시기 유럽의 '바로크'시대나 '로코코'시대라는 명칭과 일견 유사한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비해 자기 시대의 본질적 의미를 더욱 긍정적이고 함축적이며 심도있는 상징어로 개념화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명칭임을 알 수 있다...146 - 150쪽
서양화가 더욱 수용되며 투시법과 명암법을 통해 객관적 진실성을 보다 중시하는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등의 서경적이고 사형적인 진경산수화로 분화되며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진경시대 회화사의 큰 맥락에서 보면, 자아와 세계의 진실성에 대한 성찰과 그 형상화가 국제적 지평으로 확대된 보다 넗은 시각에서 다양하고 다채롭게 전개되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71 - 172쪽
찬란한 우리문화 진경문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14년, (주)현암사
김양기와 단원풍속도
소년은 호시절의 아비보다 매화 한 분을 위해 이천냥을 던진 아비가 더 좋았다. 그 행위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터였다.
정조임금의 총애를 받던 아비가 일개 화원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불운한 시절에 대한 울분, 그러나 개의치않는다는 기개, 현실을 수용하기보다는 외면하려는 심약한 태도 등은 그저 그 많은 의미들 중 극히 일부일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아비가 보인 그 모습은 아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이 평한 것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김홍도는 어릴 때부터 내집에 드나들었는데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익힌 음식을 먹는 세속사람같지 않고 신선같은 기운이 있었다'.
소년의 눈물이 웃음으로 변하자 아비는 오래된 화첩을 하나 꺼내보였다. 아비가 신선이자 화선이던 시절의 화첩이었다...203쪽
소년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를 말한다.
책, 조선사람의 내면을 읽다, 설흔, 2016년, (주)위즈덤하우스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못그리는 게 없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인물, 산수, 신선,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 등 동물은 물론 심지어 불화에 이르기까지 전무후무한 기량을 뽑냈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그의 그림은 모두 묘품에 해당되어 옛 사람과 비교할 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극찬했다...319쪽
초상화에 감춰진 옛이야기,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배한철, 2016년, 생각정거장
정조의 꿈 : 부용정과 주합루
규장각에는 부설기관으로 서향각, 열고관, 개유와, 서고, 봉모당을 두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규장각과 함께 세워졌다. 서향각은 주합루 바로 서쪽에 있는데, 어진, 어제, 어필이 습기가 차 곰팡이가 슬지않도록 옮겨와서 햇볕에 쪼이고 바람을 쏘이던 곳으로, 이안각이라고도했다.
서향각은 책의 향기가 풍기는 집이란 뜻으로, 이곳이 책을 말리고 손질하는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다.
순조의 어진도 이곳에 모셨다. 현판은 당시 글씨 잘쓰기로 이름난 조윤형이 썼고, 남쪽 누대에는 '향명루(嚮明樓)'라는 현판을 달았는데, 표암 강세황의 글씨였다.
궁궐 건물에 현판을 달아 이름을 표시할 때는 임금이 직접 쓰기도 하고, 글씨 잘쓰는 신하를 선발하여 쓰게 하기도 했다.
임금이 직접 쓴 현판은 어필, 세자가 쓴 경우는 예필이란 표시를 반드시 했다.
글씨를 쓰기 위해 뽑힌 사람을 서사관이라 했다...164 - 165쪽
조선의 참궁궐 창덕궁, 최종덕, 2006년, (주)눌와
홍대용이 언급한 조선의 수정안경은 민기가 처음 손에 넣은 수정안경처럼 수정이 산출되는 경주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은 <안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안경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며, 안경알이 단단한 것도 있고 무른 것도 있다. 일본에서도 안경이 생산되는데, 품질이 극히 좋은 것이 있다. 다만 일본의 안경은 수정으로 만든 것은 아주 드물고, 유리로 만든 것이 많다.
우리나라 경주에 또한 수정이 나는데, 경주 사람들이 '본떠서' 연마해 안경을 만든다. 하지만 제조하는 기술이 정밀하지 않고 수정에도 흠이 많아, 끝내 중국이나 일본 것만 못하다.
위의 인용 중 '본떠서'의 원문은 의양(衣樣)인데, 중국의 안경(혹은 일본의 안경)을 본떠서 만든다는 뜻으로 보인다. 서유구 역시 경주의 수정안경은 렌즈를 갈고 꾸며서 만드는 법이 일본에서 만드는 것만 못하다고 지적하였으니, 그 품질이 아주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수정으로 만든 안경은 수정의 빛깔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지녔다. 강세황은 <안경>에서 안경은 유리 혹은 수정으로 만드는데, 흰색, 검은색, 푸른색, 보라색이 있고, 크고 작은 것이 있어 같지가 않다고 한뒤, 수정으로 만든 안경은 투명하여 흠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 성질이 단단해 깨질 염려가 없고, 바탕이 맑아서 어둡고 흐릿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검은 수정이나 보라색 유리로 만든 안경은 투명하기는 하지만 색이 어두워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편하지만, 투명하게 보이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수정과 유리를 합쳐서 들고 있지만, 수정의 색깔과 투명도에 따라 다양한 렌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2 - 34쪽
19세기 초에는 하층민까지 사용할 정도로 안경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확산의 조짐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보이고 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강세황의 <안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래에 안경은 책을 보는 사람들에게만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느질하는 부녀자, 정밀한 작업을 해야하는 공장(工匠)으로서 나이가 채 쉰이 되지않은 사람도 모두 안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품질이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좋은 품질의 안경은 값이 싸지않고 구하기도 쉽지않다.
바느질하는 부녀자들이야말고 눈이 보배다. 눈이 나쁘면 안경이 필요하다. 여성용 안경은 '샐쭉안경'이라고 하는 바, 렌즈가 타원형이다. 샐쭉은 샐쭉하다에서 온말이고, 말의 뜻은 감정을 나타내면서 입이나 눈이 한쪽으로 약간 샐그러지게 움직이는 것이라 한다. 샐그러짐은 한쪽으로 삐뚤어지거나 기울어지는 것, 결국 타원형이란 말이다.
여성용이라서 모양을 예쁘게 하느라 타원형으로 하지않았나 싶다...49 - 50쪽
18세기 후반에 오면 근시경과 원시경의 렌즈를 확실히 구분하게 된다. 강세황은 <안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안경을 연마하는 법은 주변을 얇게, 가운데를 볼록하게 깎아, 눈에서 떼어놓고 사물을 보면 배나 분명하고 크게 보인다. 그러나 너무 볼록하면 가까이 있는 것은 볼 수 있지만, 조금만 멀어져도 흐릿해진다. 너무 볼록하지 않으면 멀리 있는 것은 볼 수 있지만, 그리 분명하고 크게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두껍고 가운데를 오목하게 깎으면 보이는 것이 아주 작다. 가까운 것이 아주 작아지고 게다가 흐릿해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먼 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편리하다.
강세황은 렌즈의 중심부가 오목한가 볼록한가에 띠라 상(像)이 커지고 작아진다고 말한다.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58 - 59쪽
렌즈는 무엇을 사용했을까? 강세황은 자신의 시대까지는 조선에서 유리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유리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 중국인 역시 유리 만드는 법을 서양인에게 배웠고, 지금은 유리값이 매우 싸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아직도 그 제조법을 모른다. 약물로 녹여서 만드는 것인데, 아직 배울 수가 없다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강세황은 1785년(정조9) 건륭제의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조선 사신단의 부사로서 북경에 갔다. 중국의 유리제조 운운은 그때의 경험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강세황의 발언을 근거로 조선이 1785년까지 유리의 화학적 구성물과 그 제조법을 전혀 알지못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규경이 <애체변증설>에서 조선은 유리로 만든 안경이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73쪽
망원경을 직접 사용한 사례도 두루 발견된다. 강세황은 망원경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경통의 양쪽에 장착한 구조라는 것, 경통의 길이를 조절하여 물체를 보는 조작 방법, 수십리 밖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성능을 지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망원경으로 천상을 보면 일월성신의 형태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고, 오성의 모습 역시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강세황은 망원경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는 1785년 건륭제의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사신단의 부사로 북경에 갔는데, 그 때 망원경을 구입한 것이 아닐까?...125쪽
윤두서의 자화상 외에 현재 남아있는 자화상은 이광좌의 자화상 한점과 강세황의 자화상 세점이다.
강세황의 자화상은 세점 모두 현대의 정교한 스케치에 가까울 정도로 주름과 음영이 정확하다.
특히 그림26의 눈가의 검은 부분과 잔주름 등을 보라.
이정도의 묘사는 유리 거울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강세황은 안경과 유리에 대한 기록을 남길 정도였으니, 그가 유리 거울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다...165 - 166쪽
유리제품이 다양하게 수입되자 지식인들 중에는 유리 제조법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나타났다.
강세황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리를 만드는 법을 모른다. 중국사람은 서양인에게 배워서 지금은 매우 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그 제조법을 배운 사람이 없다. 대개 약물을 녹여 만드니, 그리 어렵지않은 것 같은데, 배울 수 없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강세황은 1785년에 사신단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위의 말은 북경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북경에 다녀온 사람에게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조선은 유리를 만들지 못한다고 말한 강세황은 1791년에 사망했으니, 대체로 그의 말은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70 - 171쪽
추재 조수삼이 강세황에게서 들은 말을 옮기고 있다.
'중국의 유리는 사석을 녹여 만든 것인데, 우리나라 서울의 남산에는 사석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그 내용인데, 이규경은 여기에 나오는 사석이 어떤 사석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는 계곡의 물가에 반짝이는 각이 있는 모래로 추정하지만 중국과 일본의 유리 제조법은 백석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강세황의 '사석을 쓴다'는 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186쪽
이규경은 <자명종변증설>에서 근세의 최천악이 자명종을 잘 만들었고, 그를 이어 강신(姜信)과 그의 아들 강이중(姜彛中), 강이오(姜彛五) 및 흥덕현감 김명혁이 제작에 가장 정통했다고 한다.
최천악은 아마도 최천약일 터이다. 또 한 사람 김명혁에 대한 정보는 더 찾을 수 없지만, 강신, 강이중, 강이오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가 더 있다. 다시 이규경에 의하면, 익종(순회세자)은 잠저 때 강이중, 이오 두사람에게 위에는 선기옥형을, 아래에는 자명종을 설치하여 이륜으로 돌리는 기계를 만들게 했는데, 시각이 어긋나지 않아 그 기교가 서양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 두사람이 자명종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익종은 순조의 아들로서 그가 대리청정을 한것은 1827 - 1830년이다. 따라서 잠저 때라면 1827년 이전이니, 대체로 19세기 초다.
강신은 강세황의 서자고, 강이중, 이오는 서손이다....256 - 257쪽
이규경은 자명종변증설에서 최천악, 강신, 강이중, 강이오, 김명혁 등 자명종 제작자의 이름을 나열하여 기록한 뒤, '그러나 제작하는 법을 적은 책이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강세황은 <서양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끔 사오기는 하지만 그 연주법과 조율법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홍대용은 박지원과 함께 양금을 조선의 음악에 맞추어 조율하는데 성공했으니 강세황의 글은 그 이전에 쓰인 것일 터이다...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천(姜彛天 1768 - 1801)은 서울의 풍속을 읊은 <한경사> 106수를 썼는데, 그 중 한 편에서 양금을 조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한다고 썼다.
강이천(姜彛天)은 1801년에 사망했으니, 이 시를 통해서 18세기 말경 양금이 급속하게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83 - 284쪽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강영관, 2015년,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