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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서원 龍湖書院
동의어
세덕사(世德祠), 용호서당(龍湖書堂)
소재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693,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본4길 18-27
요약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 있는 조선후기 도성유 등 3현을 제향한 서원.
1704년(숙종 30)에 세덕사(世德祠)로 건립되었다가 1707년(숙종 33)에 용호서원(龍湖書院)으로 승격되어 성주도씨 도성유(都聖兪, 1571∼1649), 도여유(都汝兪, 1574∼1640), 도신수(都愼修, 1598∼1651) 등 3현을 제향한 서원이다. 서원으로 승격되던 해에 묘우를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용호서당(龍湖書堂)으로 개칭되었다. 성주도씨 문중 서원으로 1984년에 중수한 뒤, 1988년부터 향사를 재개하여 현재 매년 4월 5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내용
도성유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養直)이다. 한강 정구(鄭逑)와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조달하였다. 저서로 『양직집(養直集)』이 있다. 도여유는 자가 해중(諧仲), 호는 서재(鋤齋)이다. 한강 정구, 서낙재(徐樂齋)의 문인이다. 이괄의 난 때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도신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이며, 도여유의 아들이다. 162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함흥판관, 울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서사원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강당인 용호서당이 경사면의 상단에 일곽을 이루고 있고, 하단에는 최근에 건축된 치경당(致敬堂)이 위치하고 있다. 용호서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실을 두어 동쪽 협실은 ‘안인재(安仁齋)’, 서쪽 협실은 ‘정의재(正義齋)’라 하였다. 경내에는 용호서원유적비가 있다.
1707년에 용호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작성한 「용호서원봉안문(龍湖書院奉安文)」과 「용호서원승호고유문(龍湖書院陞號告由文)」, 같은 해 묘우를 중수한 뒤의 「용호서원묘우상량문(龍湖書院廟宇上樑文)」과 「묘우중수환안문(廟宇重修還安文)」은 모두 유심춘(柳尋春)이 지었다. 모두 『지암집(止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강고집(江皐集)』
・ 『교남지(嶠南誌)』
・ 『서산집(西山集)』
・ 『양직집(養直集)』
・ 『지암집(止巖集)』
・ 『경북서원지』(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경상북도, 2007)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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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湖書院廟宇上樑文 養直 有弟鋤齋。有姪止巖。
도성유(都聖兪) 1571년(선조 4)~1649년(인조 27) 양직선생문집(養直先生文集)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1 8월 22일, 大丘 河濱縣 島村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37 종제 都汝兪의 차남 都慎與를 양자로 삼다.
~ ~ ~ ~ ~ ~ ~ 대구 臥龍山 아래에 精舍를 지어 ‘養直’이라 편액하고, 「性理正學」 등을 집필하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69 伊江書院을 세워 서사원을 별향하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70 世居地인 漆谷府 八莒縣에 문묘를 세우려 하자 부지를 쾌척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79 1월 30일, 臥龍精舍에서 졸하다. ○ 4월, 漆谷 枝川面 梧谷에 장사 지내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 대구에 世德祠(龍湖書院)가 건립되어 배향되다.
1708년에 서원으로 승격된 용호서원과 관련된 〈龍湖祠奉安文〉
養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龍湖祠奉安文[宋履錫]
伏以泗水之上。伊江之滣。絳帳高闢。羣賢如雲。于時我公。早歲摳衣。生有異質。長有依歸。薰陶琢磨。乃成德器。敬義坯墣。孝友根柢。禮說讐校。箴訓圖書。先師所命。字畫森如。聖賢遺言。抄錄成帙。年登大耋。不厭不息。事一誠至。功著師門。江湖占勝。永矢考槃。逍遙觴詠。沂雩在玆。富貴如雲。簞瓢如飴。學子聞風。鼓篋亹亹。行孚鄕黨。謨貽子孫。遺芬在人。百世不諼。恭惟世德。亦旣賁然。
有弟鋤齋。有姪止巖。士論齊發。祭祀宜今。爰擧俎豆。以幷以配。於乎不顯。德厚而培。襟佩駿奔。肅將苾芬。春秋敬享。永世無愆。
冶城宋履錫 南村 製
春秋常享祝文
學合義道。功著三千。師門有光。廟食無愆。玆値▣▣。涓吉▣丁。謹以牲幣。昭格明靈。以止巖都公配食尙饗。
冶城宋履錫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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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龍湖書院陞號告由文 丁亥 [柳尋春]
伏以盛代高賢。斯文令望。薰陶淬礪。泗水伊江。學問精深。行誼純篤。壎箎唱和。燕翼貽謨。一室三賢。於乎不顯。歿而可祭。于彼仁廬。尙仍祠名。久欝公議。時固有待。事懼終稽。廟宇重營。鄰牘齊發。於焉崇奉。有煌新扁。龍山嵯峨。琴水淸瀉。門墻在邇。燕申若承。日吉辰良。襟珮濟濟。佑我牖我。於千萬年。
前翊贊豊山柳尋春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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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廟宇重修還安文 丁亥 [柳尋春]
伏以百年遺廟。卽舊圖新。士殫工竭。輪焉奐焉。諏吉還奉。仰止彌勤。精靈如在。永世是安。
前翊贊豊山柳尋春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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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龍湖書院廟宇上樑文 丁亥重修時 [柳尋春]
山川儲靈淑之氣。萃一室於三賢。庠塾値文明之時。賁舊廟於新制。事若有待。地不相違。
恭惟養直鋤齋兩先生。盛代高賢。斯文重望。竆理篤學。道合同堂。弟兄養志。純誠行著。居家日用。朝夕凾丈。澡身乎伊泗眞源。左右圖書。潛心乎閩洛至訣。公山倡義。慨勤王之伊誰。猿岑入瞻。要與子而偕適。居敬集義之目。二字元符。尊賢衛道之誠。兩䟽正論。養以直而俯仰無怍。處於野而聞達不求。仙査硏經。表一心之景慕。花田錦水。留百載之遺芬。
粤若止巖先生。榦蠱靑氊之珍。從師絳帳之秀。掌中列八卦。異哉孩提之知。壁上揭五箴。凜然臨履之意。辨姦於早。自是薰蕕分明。言志於前。宛然風詠氣像。廣川天人之對。的見大原。武城絃歌之治。恢有餘地。良田禾稼。戒勿緩於鋤功。出泥芙蓉。常自持於氷操。猗歟傳家謨訓。蔚然幷世楷模。德行文章。可見輿誦之不替。風猷才學。特爲士望之所歸。兄唱弟和而如聞塤箎。父詔子受而若承唯諾。卽其地也慕益切於羹墻。歿而祭之禮曾設於俎豆。數弓桑榟之不遠。三架廟貌之有臨。屬於祠號之已陞。厥有年久而可改。仍舊貫而營度。卜云其良。會多士而諏謀。擧無或失。上宇下棟之制克備克完。方裁圓斲之宜不侈不儉。
秩然三位之還奉。神理攸安。煥乎一方之觀瞻。人情允愜。春秋泂酌。灌薦精禋之以時。內外明宮。奔趍將事之無礙。英靈如在。想德儀於當年。禮度無愆。振儒佩於今日。再拜陳頌。六曲成章。拋樑東。泗水伊江一帶通。欲識源流所自處。篙師須費上灘功。拋樑西。碧篁巖畔鳳凰捿。何年來作虞廷瑞。戛擊聲中彩羽齊。拋樑南。綠樹靑嵐滿眼參。箇裏風光如許好。肯敎遊子謾評談。拋樑北。卧龍山下碩人軸。南陽不獨躬耕人。此地英才幾鍾毓。拋樑上。雲收碧落森星象。吾心本自淨如斯。莫使一毫私累障。拋樑下。曲曲淸江流不舍。傍有源泉盈後行。聖人豈是欺余者。伏願上樑之後。家崇禮讓。士敦風流。屋背靑山。契靜儀於胡丈。湖心素月。挹淸意於邵翁。恭惟百世苾芬。永作一鄕依仰。
前翊贊豊山柳尋春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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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家狀[都爾望]
公姓都氏諱聖兪字廷彦。自號養直子。隆慶辛未八月二十二日。生于大丘河濱縣東里第。生有異質。聦睿絶人。六七歲。能作字屬文。十歲以親命受學于松溪權應仁。不喜遊戱。潛心講讀。其於性理文字。撮要抄緊。日以耽玩。松溪贈以心經一部。曰惟子眞可以讀此書也。丙戌摳衣於樂齋徐先生思遠之門。不以擧業爲事。專意爲己。語默動止。已有成法。同門諸賢。不以年少待之。敬重如宿德焉。壬辰倭冦充斥。奉二親避亂于八公山中。聞樂齋先生與孫慕堂處訥李六休輈。倡起義旅。不勝憤奮慨慷。遂逐日來往。隨事贊畫。激起士友之奴丁。募取閭閻間斗粟。旅律將就。時値大人屬疚。未克從事。十二月六日丁憂。癸巳春。返葬于達川之丑坐原。奉母夫人轉避于義興之麟角山中。乙未返于故庄。己亥樂齋先生歸自西原。卜築書室于伊川。燹棘餘。問學之地猶得靜專。公頻頻來往。講道問學。益加密焉。辛丑夏。遭祖妣喪於京第。千里輿櫬。祔葬于虞侯公墓。癸卯秋。寒岡鄭先生謝仕還山。公陪樂齋往拜。自是深得兩先生誘掖之方。聞識日博。造詣深至。鄭先生以公才行兼備。操履堅確。奬許不已。凡禮說之有讐校。圖箴之可摹寫者。皆命公而手焉。乙巳春。鄭先生來臨。公與門儕。陪兩先生設月講于仙査書齋。摹得先聖曁濂洛諸賢眞像。粧成一簇子。以爲講會時焚香瞻拜之儀。戊申丁母夫人憂。祔于先考墳次。遂廬墓三年。哀毁踰禮。兩先生累臨廬次。慰諭勤摯。庚戌服闋。時寒岡先生爲朴而立所誣。禍將不測。公與孫慕堂諸賢。議所以辨雪。定會于商山。爲章甫叫閽之擧。使從弟汝兪陪䟽以送。辛亥有五賢從祀之命。而仁弘醜正之䟽。誣罔晦退。罔有紀極。又議辨誣。陪䟽上京。連月留待。竟得蒙允。八月從享禮成。諸先生神版。皆公手書也。壬子寒岡先生移寓蘆谷。甲寅又移泗水。杖屨漸近。講學愈便。公與同門儕友。分治齋房。一如康節入洛故事。泗水伊江。連源接淵。講學之暇。或賞蓮羅池。或觀瀾東溪。公未甞不在於杖屨之先後。道意之洽浹。氣味之薰襲如是。當日兩先生的鉢之望。亦已屬之公矣。乙卯徐先生寢疾。以公爲齋長。齋中凡節。專委於公。四月先生易簀。公不勝山樑之痛。殮殯葬祭。親自營畫。以盡事一之道。丙辰寒岡先生亦以風痺之症彌劇。公日夕診侍。及先生歿。斯文廓落。羹慕益切。於是搆精舍于卧龍山下。扁以養直。一任閒適。穩理舊業。裒集性理論說之散出於經傳及諸子百家。昉以性理大全而編類成書。名曰性理正學。標著正文附註考證。一如眞西山心經逐條折中之意。作爲一統。俾爲學者。一見而無疑貳。又抄退溪先生喪禮問答。寒岡先生五禮論說。許多條節。合成篇帙。以爲後學便覽之資。此與趙公振所集大同小異。盖趙公取喪祭兩禮。公幷取四禮儀也。邑有畵巖書院。乃鄕先輩肄業之所。而曾於祭丑。奉安退溪李先生。壬戌公與同志。議定配享鄭先生。而旣享之後。院中䂓模。無不躬自創備。至若中朝及我東諸賢建置書院。右文興化崇賢養士之䂓及詩文記述有可觀者。編成院誌。兼修定院錄。略倣呂氏鄕約之條。以爲勸進德業。敦尙風敎之地。與一道章甫。䟽請院額。其衛道興學。一遵朱夫子白鹿洞遺䂓也。又將以徐樂齋別享墻外祠。而全溪東位次之論起則事體有未安者。公以爲仙査書齋。乃先生平日講道之所。仍舊腏享亦甚便當。遂立廟妥靈。伊江書院是也。及丙子之亂。京師陷沒。至有城下之盟。聞鄭桐溪蘊抗節斤和。冐刃求死。憤然長歎曰數百年父母國恤小之恩。掃地盡矣。而惟扶綱秉義。不爲左袵者。惟鄭蘊一人。則我安適歸。其惟金猿之一片乎。自是以後。無意世事。杜門隱居。雖平日情好之人。罕與相接。有時乎悲憤抗慨之意。發於吟咏之間也。庚辰新設㓒谷府。將建文廟於八莒縣。其基地卽公之世傳舊址也。主事者請買之。公曰文廟之建。乃斯文莫重之擧。何以價爲。遂許之。年及大耋。而好學不倦。勸課彌篤。至於硏經伊江講學期會之事。則不以老耄而廢之也。甞參伊院享禮。坐翫樂堂中。謂諸生曰摳衣丈席。宛如昨日。而已成陳迹。獨餘衰癃此堂。今日豈無感昔之懷耶。惟願諸君無敢怠忽。永圖依歸。不負先師之本意也。常聚一鄕志學之士。講讀不輟。諄諄勉進。無異於先生在世時也。己丑正月三十日。考終于精舍。享年七十九。以四月二十日。祔葬于㓒谷梧谷虞侯公兆下夫人墓乾坐原。公禀質精純剛毅。神氣淸爽。性度簡易。篤志力行。不求名聲。而聞道旣早。行誼夙著。入而爲父兄之所倚仗。出而爲師友之所推重。一時碩士名公。莫不禮遇而致敬。其事親也則方劇亂奔竄之中。先公遘疾危篤。粥飮藥餌。未甞乏絶。左右奉持。一適親意。及遭罔極之痛。雖干戈搶攘。道塗艱險。而親自扶櫬。返故山安窀。送終節禮。亦得無憾。倘非誠孝之感得天助。至於斯耶。其奉慈氏及王母夫人。一心盡誠。常得其歡意。定省之節。不以疾病而或惰。㵦滫之奉。不以艱匱而或闕。以至居憂哭踊之節。祭奠之禮。考之先王之制。一遵而無愧矣。其奉先也則晨必冠櫛。展拜家廟。出入必謁。有事必告。尤謹於祭祀之禮。致其如在之誠。而沐浴更衣。不茹葷不飮酒。一有不誠。則終日怵惕。不安于心。時當節日。則雖旁親無后。必以紙牓班附。並祭如儀。每於己之生日。則必具酒饌如朔望儀。以寓悲感之懷。子弟或欲致客設酌。則止之曰是日亡親劬勞之日也。人子哀慕之不堪。何忍宴樂爲哉。其尊師也則生而盡事一之誠。歿而切羹墻之慕。松溪歿而無嗣續。其所著詩文遺藁。手自編緝。使其文章行蹟。不泯於後。至於兩先生則陳䟽雪誣。配廟設院。遺集裒而不使散逸。禮書校而得全篇帙。俾師道明於世。而後學知所考業。其理家也則處夫婦。惟和惟順而必以敬。敎子弟必以義方而無或怠慢。御婢僕必以恩信而無不曲當其情。處親族也則公無兄弟。與從弟鋤齋公汝兪。接屋而居。湛樂如同氣。道契如朋友。起居出入。未甞須臾離。其餘遠近諸族。咸致敦睦。若其鄕黨交友之間。則先以敬信爲度。疾病患難。其爲扶護之道。靡不用極力也。其好學也則必以心經近思錄。爲修己之先務。而上溯鄒魯。下及關閩。謨言至訓。精思而力踐。常曰學者立心。當以孔孟爲期。欲學孔孟。必先以程朱爲準。又曰而道不在高遠。在於卑近。其至與不至。顧吾力行何如耳。端坐整衿。對越方冊。竆探蘊奧。極究歸趣。間以我東先賢性理論辨。疑釋義分。反復尋繹。參以己意。以驗自得之如何。手額敬義二字。揭諸座右。俾作常目之資。尤喜退溪遺集。甞曰退溪先生吾東方夫子也。自恨生晩雖末及執箒于門。而今讀其書誦其詩。想得當日氣像。若奉侍周旋於天淵之間。其心悅而誠服也如此。則非眞有所得而然耶。至於啓蒙象數之學。天文地理之訣。無不周覽。先輩之撰述編書未及就榟者。亦皆繕寫成帙。圖書滿壁。經籍盈架。優游涵泳。浩養其中。日用應接之間。見人有過則諄諄誨諭。使之自改。見人有善則稱賞不已。若己有之。律己以嚴。容衆以寬。坦夷簡易。無不周徧。非有大好惡之事。喜怒不形。故雖家人父子。未甞見其疾言遽色也。其好善之心。尙賢之誠。志道之堅。自行之卓。皆自學問中做出。而亦可見資禀之粹美矣。且其所居。間於伊泗河南。水號里稱。偶同於先聖賢相傳之淵源。尤有所興慕者。而時於琴湖春水。龍山秋月。山巾野服。輕舟短棹。上下溯洄。依然若聽點瑟於當時。間六七而詠歸。其閒養自得之趣。有如是哉。晩年絶閒出入。雖同門諸老。罕與相接。沙月堂柳公時藩書以贈之曰吾兄養眞林泉。自守不出。盖歎公踐履之篤鞱晦之貞也。默軒羅公應淑贈詩曰弟兄相對明牎下。論道治心得味優。藤庵裴公尙龍挽公詩曰鐵畫知心正。氷操見性眞。五拙孫公湍甞曰公體小端重而容貌灑落。辭氣嚴正。眞近世儒宗也。及修地誌。載公於德行篇。投巖蔡公夢硯撰樂齋行狀。歷擧諸賢。以著達城一統淵源。而乃以公係之者。盖有以矣。樂齋甞以易學一書贈公者。亦豈非傳心之意耶。公配廣州李氏。遁村集五世孫心海女。淑愼宜家。壼儀著聞。先於公二年丁亥卒。無子。以從弟汝兪第二子愼與爲嗣。癸酉進士。辛卯文科。官成均舘司藝。生二子。長爾益。次爾望中司馬。其餘孫曾十數人。而煩不盡記。嗚呼。公之所著禮書及詩文。不爲不多。而屢經回祿。蕩失無餘。祗有略干詩篇。傳授吟五經圖無極吟誡子詩等篇而已。雖欲闡揚潛德。發輝幽光。其𠅩從而徵之。竊恐世代浸遠。湮沒而無傳。則不肖等亦何敢辭其責耶。謹以年譜遺事及寒樂兩先生文集。其他諸賢遺集之散出者。參互考證。錄其梗槩。以冀當世秉筆君子之有所考據焉。
不肖孫爾望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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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일(李玄逸) 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都愼與 1605 1675 星州 明叔 撝軒
2002년에는 星州都氏門中에서 都聖兪, 都愼與, 都爾望 등 3代 6인의 문집을 영인한 「龍湖世典」을 간행하였다.
葛庵先生文集別集卷之五 / 墓碣銘 / 通訓大夫成均館司藝都公墓碣銘
公諱愼與。字明叔。星州八莒人。其上祖彌。顯百濟世。事載三綱行實。高麗時。有曰陳,曰恒。皆至大官。曾祖諱欽祖。慶尙左道兵虞候。祖諱元結。贈嘉善大夫漢城府右尹。父諱汝兪。務功郞。母安人李氏。判書繼孫之孫。贈判決事友謙之女。公幼端愨詳謹。取與不苟。旣成童。遊學寒岡鄭先生及樂齋徐先生之門。博通經史。崇禎癸酉。補上舍生。丙子變後。有不樂于心。杜門屛跡。以訓誨子弟爲業。有時徜徉畎畝間。悠然有自得之趣。年幾五十。以太碩入命。赴明經試。辛卯秋。始脫褐衣。壬辰。除昌樂察訪。乙未。由成均典籍。遷禮曹佐郞。丙申。出宰龍潭縣。約己裕民。民有來暮之謠。己亥。陞禮曹正郞。忤權貴人。棄官還鄕。庚子。除金堤郡守。以親老辭不赴。尋拜成均直講。屬時論大變。投紱而歸。有終老江湖之志。乙卯更化。以司藝徵。十二月十八日。疾終于旅邸。享年七十一。其卒也。領相許公,判書吳公往哭焉。比小斂大斂。皆親執焉。至他京中士友。亦多匍匐賻襚。事用無闕。明年正月。以其喪歸。九月某日。葬于新寧縣華山卯向之原。夫人白氏。判書堅之後。贈參議元澄之女。有子男二人女四人。男長爾益。次爾望進士。女皆嫁爲士人妻。嚴允耇,鄭煕棱,申晉錫,鄭泰世其壻也。爾益有五男。曰萬始,萬福,萬綱,萬葉,萬區。爾望有三男二女。男長萬甲。次萬祉。季幼。女長適士人申德泳。季在室。公兄弟四人。愼修,愼行,愼徵。公於倫次爲第二。愼修登文科。歷典大郡。愼徵以上疏論典禮殽訛。被顯擢。官至正郞。公出爲從祖父後。生養致其孝。沒祭盡其誠。鄕邦稱之。玄逸未及識公。而與公之第二子上舍君遊。上舍君請余表其墓。遂據家牒最其蹟而系之以銘。銘曰。
世競以趨紛戚促。公退而愉安淡泊。遭世休明不家食。稀年考終遒福祿。我銘其墓於千劫。
도신징(都愼徵) 1611년(광해군 3)~1678년(숙종 4) 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
都汝兪 鋤齋. 1子 都愼修 縣監, 止巖. 2子 都愼與 出. 3子 都愼行 出. 4子 都愼徵. 5子 都愼福.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1 9월 5일, 河濱縣 島村里에서 태어나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30 부친상을 당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40 伯兄 都愼修가 寧海 임소에서 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