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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Unfounded claims about the Biblical 70 years
(D) 성서의 70년 예언에 대한 근거없는 주장
As is discussed in chapter 5 of the present work, the prophet Jeremiah directly applies the 70 years to the length of Babylon’s dominion over the nations, not to the length of the desolation of Jerusalem and the Jewish exile: 이 책 5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예언자 예레미야는 70년을 예루살렘의 황폐나 유대인의 유배 기간이 아니라, 바빌론의 여러 나라에 대한 패권 기간에 직접적으로 적용한다. . . . these nations will serve the king of Babylon seventy years. (Jeremiah 25:11, NIV) When seventy years are completed for Babylon, I will come back to you and fulfill my gracious promise to bring you back to this place. (Jeremiah 29:10, NIV) . . . 이 민족들은 바빌로니아의 왕을 70년간 섬길 것이다. (예레미아 25:11, NIV) 바빌론을 위한 70년이 차게되면 다시 여러분에게로 돌아와 여러분을 이 곳으로 되돌아 오게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지키겠다. (예레미아 29:10, NIV) These texts clearly apply the 70-year period to Babylon, not to Jerusalem. Quoting the above NIV rendering of the two verses, Furuli even admits this, stating that “the text does not say explicitly that it refers to an exile for the Jewish nation. If we make a grammatical analysis in 25:11, we find that ‘these nations’ is the grammatical subject, and in 29:10, ‘Babylon’ is the patient, that is, the nation that should experience the period of 70 years.” (p. 75) 이러한 성서 본문들은 70년의 기간을 예루살렘이 아닌 바빌론에 명백히 적용하고 있다. 푸룰리는 NIV에서 위의 두 구절을 인용하면서 "성서 본문에는 70년을 유대인들의 유배에 적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예레미아 25장 11절의 문법적 분석을 해보면 '이 민족들'이 문법적으로 주체임을 알 수 있고, 29장 10절의 '바빌론'은 70년간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75면) |
(D-1) Is Furuli’s view of the 70 years really supported by Daniel and the Chronicler?
(D-1) 70년에 대한 푸룰리의 견해는 다니엘이나 역대기 필자의 지지를 받는가?
Attempting to evade this undesirable conclusion, Furuli turns to the 70-year passages at Daniel 9:2 and 2 Chronicles 36:20, 21, stating that “the writers of Daniel and 2 Chronicles understood the words of Jeremiah to imply a 70-year exile for the Jewish nation.” After quoting the NIV for these two texts, he claims: 푸룰리는 "다니엘서와 역대하의 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이 유대인의 70년 유배를 암시한다."라고 말하면서, 다니엘 9장 2절과 역대기하 36장 20절, 21절에 주의를 돌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론은 애써 회피하려 했다. 이 두 본문에 대해 NIV를 인용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s the analysis below shows, the words of Daniel and the Chronicler are unambiguous. They show definitely that Daniel and the Chronicler understood Jeremiah to prophesy about a 70-year period for the Jewish people when the land was desolate. (p. 76) 아래 분석에서 보여주듯이 다니엘서와 역대기 하의 말씀은 분명하다. 그들은 다니엘서와 역대기 하의 필자가, 예레미야는 유다 땅이 황폐되었을 때, 유대 백성들을 위해 약 70년의 기간을 예언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76면) The discussion of the two passages in chapter 5 above (pp. 215- 225) shows this claim to be groundless. Both passages may easily be harmonized with the clear statements of Jeremiah. 앞에서 살펴 본 5장 (215-225면)의 두 구절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두 구절은 예레미야의 명료한 진술과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Although Daniel links or ties the 70 years to the desolate state of Jerusalem, this does not mean that he equated the two periods. To link and to equate are two different things. This was noticed, for example, by Dr. C. F. Keil, who in his grammatical analysis of Daniel 9:2 concluded that Daniel connected and yet distinguished the two periods, just as is done in Jeremiah’s prophecy. Only after the completion of the 70 years “for Babylon,” JHWH would visit the Jewish exiles and bring them back to Jerusalem to end its period of desolation. This is what had been predicted at Jeremiah 29:10, and Daniel’s statement fully agrees with this, according to Keil. (See above, p. 219, note 31.)104 다니엘이 70년을 예루살렘의 황폐의 기간과 연결짓거나 결부시켰다고 해서 두 기간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예를 들어, C. F. 케일 박사는 다니엘 9장 2절의 문법적 분석에서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에서처럼 두 시기를 연결하면서도 구분한다고 결론 내렸다. "JHWH는 '바빌론을 위한' 70년이 끝난 뒤에야 유대인 포로들을 돌아보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왔을 때, 황폐의 기간은 끝날 수 있었다. 케일의 해석에 따르면, 예레미야 29:10에 예견된 대로 다니엘의 진술이 이와 완전히 일치한다. (앞의 219면, 각주 31 참조)104 In his discussion of 2 Chronicles 36:20, 21 Furuli ignores verse 20 and quotes only verse 21: 푸룰리는 역대하 36장 20, 21절에서 20절은 무시하고 21절만을 인용한다: to fulfill Jehovah’s words by the mouth of Jeremiah, until the land had paid off its sabbaths. All the days of lying desolate it kept sabbath, to fulfill seventy years.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땅이 안식을 다 갚게 되었다. 황폐해 있는 모든 날 동안, 땅은 안식을 누려 70년을 채웠다. It may be noted that this verse starts with a subordinate clause and, more specifically, with a purpose clause: to fulfill . . . . Furuli quotes the verse out of context. To know what event would fulfill “Jehovah’s words by the mouth of Jeremiah,”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 main or principal clause, which is found in verse 20. This verse says: 이 절은 종속절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목적 절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입으로 하신 말씀'이 어떤 사건을 성취시킬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20절에 나오는 본절 곧 주절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Furthermore, he [Nebuchadnezzar] carried off those remaining from the sword captive to Babylon, and they came to be servants to him and his sons until the royalty of Persia began to reign; 그리고 칼을 피한 자들을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페르시아 왕국이 통치를 시작할 때까지 그와 그 자손의 종이 되었다; The Chronicler states that the service to the kings of Babylon ended when “the royalty of Persia began to reign.” This event took place, he goes on to say in the next verse (21), “to fulfill Jehovah’s words by the mouth of Jeremiah, . . . to fulfill seventy years.” 역대기는 바빌론의 왕들에 대한 섬김은 "페르시아의 왕족들이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끝났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 구절(21)에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칠십년을 채우시리라"고 말한다. The obvious meaning is that the cessation of the servitude under Babylon by the Persian takeover in 539 BCE fulfilled the 70- year prophecy of Jeremiah. The Chronicler does not reinterpret Jeremiah’s statements to mean 70 years of desolation for Jerusalem, as Furuli claims. On the contrary, he sticks very closely to Jeremiah’s description of the 70 years as a period of servitude under Babylon, and he ends this period with the fall of Babylon, exactly as Jeremiah had predicted at Jeremiah 25:12 and 27:7. (See chapter 5 above, pp. 220, 221.) 그 분명한 의미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바빌로니아 패권의 종말이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역대기 필자는 푸룰리의 주장처럼 예레미야의 말이 70년 간의 예루살렘 황폐를 의미하는 것으로 재해석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예레미야가 70년을 바빌로니아 통치하에서 종노릇을 한 기간으로 묘사한 것에 매우 집중적으로 고착하여 예레미야 25장 12절과 27장 7절에서 예언한 대로 바빌로니아 멸망으로 이 기간이 마치는 것으로 기술한다(앞 5장 220, 221면 참조). |
(D-2) Jeremiah 25:9–12: 70 years of servitude — for whom?
(D-2) 예레미아 25:9–12: 노역의 70년 — 누구를 위한 것인가?
Returning to Jeremiah’s prophecy, Furuli first focuses on Jeremiah 25:11, which says: 푸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돌아가서 예레미야 25장 11절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 And all this land must become a devastated place, an object of astonishment, and these nations will serve the king of Babylon seventy years. (NIV) 이 모든 땅이 황폐한 곳이 되어, 놀람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길 것이다.(NIV) As was pointed out earlier, Furuli starts his discussion of the 70- year prophecy by admitting that Jeremiah applies the 70 years to Babylon, not to Jerusalem. Having concluded (falsely, as has been shown above and in chapter 5) that Daniel 9:2 and 2 Chronicles 36:21 unambiguously state that Judah and Jerusalem lay desolate for 70 years, Furuli realizes that the meaning of Jeremiah 25:11 has to be changed to be brought into agreement with his conclusion. The clause “these nations will serve the king of Babylon seventy years” is very clear in Hebrew: 앞서 지적했듯이, 푸룰리는 예레미야가 70년을 예루살렘이 아닌 바빌론에 적용한다고 인정함으로써 70년 예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푸룰리는 다니엘 9장 2절과 역대하 36장 21절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70년 동안 황폐한 상태로 버려져 있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고 결론지은 뒤 예레미야 25장 11절의 의미가 바뀌어져야 자신의 결론과 일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민족들은 바빌론 왕을 칠십년 동안 섬길 것이다"라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매우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weâbdû haggôyîm hâêlleh et-melech bâbel shivîm shânâh and-will-serve-they the-nations these king [of] Babel seventy year[s] 우리는 이 바빌론 왕이 칠십년 동안 섬기고자 하는 나라들을 '웹두 학고욤 하옐레 에 멜렉 바벨 쉬브엠 샤냐(weâbdû haggôyîm hâêlleh et-melech bâbel shivîm shânâh )' 라고 불렀다. As Furuli points out (p. 82), the particle et before melech bâbel (”king of Babel”) is a marker indicating that melech bâbel is the object. The word order is typical in Hebrew: verb-subject-object. There are no grammatical problems with the clause. It simply and unambiguously says that “these nations will serve the king of Babel seventy years.” Furuli, too, admits that “this is the most natural translation.” (p. 84) How, then, can Furuli force it to say something else? 푸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82면) 멜렉 바벨 ("바벨의 왕") 앞에 있는 전치사는 멜렉 바벨이 대상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단어의 순서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어순이다 : 동사 -주어 -목적어. 이 절에는 문법적인 문제가 없다. 그것은 간단명료하게 "이 민족들은 70년 동안 바벨의 왕을 섬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푸룰리 역시 "이 번역이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라고 인정한다. (84면) 그런데, 어떻게 푸룰리는, 그 표현이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가? Furuli first claims that “the subject (‘these nations’) is vague and unspecified” Actually, it is not. It simply refers back to “all these nations round about” referred to in verse 9. Furuli goes on to state that the subject in the clause might not be “these nations” in verse 11 but “this land” (Judah) and “its inhabitants” in verse 9. Verse 11, therefore, really says that it is only the inhabitants of Judah, not “these nations,” that will serve the king of Babylon 70 years. How, then, is the occurrence of “these nations” in the clause to be explained? Furuli suggests that they might be part of the object, the king of Babel, who “would be a specification of” these nations. The clause could then be translated: and they will serve these nations, the king of Babel, seventy years (p. 84) Furuli also suggests that the particle et might not here be used as an object marker but as a preposition with the meaning “with.” Based on this explanation, the clause could even be translated: and they will serve these nations together with the king of Babel seventy years (p. 84) These reconstructions are not supported by any Bible translations. Not only are they far-fetched, they are refuted by the wider context. The prediction that the nations surrounding Judah would serve the king of Babylon is repeated in Jeremiah 27:7 in a way that is impossible to misunderstand: 푸룰리는 우선 "이 민족들"이라는 주체[주어]가 모호하고 불특정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9절에서 언급된 "주위의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푸룰리는 더욱이 이 절의 주체[주어]가 11절의 "이 민족들"이 아니라 9절의 "이 땅"(유다)과 "주민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11절은 바빌론 왕을 70년 동안 섬기는 것은 '이 민족들'이 아니라 유다 주민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이 민족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푸룰리는 그들이 바벨의 왕이라는 객체의 일부일 수 있으며, 바벨론 왕은 이들 민족의 "스펙"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70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길 것이다(84면) 푸룰리는 또한 여기서 불변화사 et를 객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함께(with)"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바탕으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70년 동안 바빌론 왕과 더불어 이 민족들을 섬길 것이다(84면). 이러한 재구성은 어떤 성경 번역으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그러한 표현은 억지스러울 뿐만 아니라 더 넓은 문맥에 의해 반박된다. 유다를 둘러싼 여러 민족이 바빌론 왕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예레미야 27장 7절에서 오해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반복된다: And all the nations must serve him and his son and his grandson until the time even of his own land comes. 자신의 땅에 때가 이를 때까지 많은 민족과 큰 왕들이 그를 종으로 삼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와 그의 아들과 손자를 섬길 것이다. The immediate context of the verse proves conclusively that “the nations” referred to include all the non-Jewish nations in the Near East. Furuli’s linguistic acrobatics, therefore, are unnecessary, mistaken, and a case of special pleading. 이 구절의 직접적인 문맥의 의미는 유대인이 아닌 주위의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므로 푸룰리의 언어적 곡예는 불필요하고, 실수이며, 특별히 애걸하는 사례이다. Furuli’s far-fetched and forced reconstruction of the verse seems to be an attempt to bring it in agreement with the wording of the Septuagint version (LXX), to which he then refers in support. (p. 84) Some of the problems with the LXX version of Jeremiah are discussed in chapter 5 above, ftn. 8 on pp. 195, 196. 푸룰리가 억지스럽게 이 구절을 재구성한 것은 그가 지지한다고 언급한 70인 역(LXX)의 문구와 일치 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
(D-3) Jeremiah 29:10: The meaning of the 70 years for Babylon
(D-3) 예레미아 29:10: "바빌론을 위한" 70년의 의미
Jeremiah 29:10 is discussed in chapter 5 above, pp. 209–214. The verse explicitly states that the 70 years refer to Babylon, not Jerusalem: 예레미야 29장 10절은 이 책 5장 209~214면에서 논의되었다. 이 구절은 70년이 예루살렘이 아닌 바빌론에 관련된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This is what the LORD says: ‘When seventy years are completed for Babylon [le bâbel] I will come to you and fulfill my gracious promise to bring you back to this place’ [i.e., to Jerusalem]. (NIV)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빌론[르바벨]을 위한 칠십 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에게로 가서, 너희를 이 곳(즉,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한 은혜로운 약속을 이루겠다. (NIV) Furuli notes that most Bible translations render the preposition le as “to” or “for” and that only a very few (usually older) translations render it as “at” or “in.” (Furuli, p.85) Of the latter, he mentions six: NWT, KJV , Harkavy, Spurrell, Lamsa, and the Swedish Church Bible of 1917. 푸룰리(Furuli)는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에서 전치사 le를 "to" 또는 "for"로 표기하고 있으며, 매우 적은 수의 (보통 오래된) 번역본만이 그것을 "at" 또는 "in"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Alexander Harkavy’s edition from 1939 contains the Hebrew text together with an English translation. Furuli does not seem to have noticed that Harkavy states in the preface that the English text is that of the Authorized Version, that is, the KJV. George Lamsa’s translation has been strongly criticized because of its heavy dependence on the KJV. Also in Jeremiah, chapter 29, he almost slavishly follows KJV. His “at Babylon,” therefore, means nothing. I have not been able to check Helen Spurrell’s translation. It was published in London in 1885, not 1985, as Furuli’s Bibliography erroneously shows, so it is not a modem translation. 1939년 알렉산더 하르카비의 판본에는 영어 번역본과 히브리어 본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푸룰리는 하르카비가 서문에서 영어 본문이 공인 역, 즉 KJV의 것이라고 기술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지 람사의 번역본은 KJ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예레미야 29장에서도 그는 거의 노예 근성으로 KJV를 따른다. 그러므로 그의 "바빌론에서"라는 번역은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헬렌 스퍼렐의 번역본을 확인할 수 없었다. 푸룰리의 서지목록은 1985년이 아닌 1885년 런던에서 출간된 것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그것은 현대 번역본이 아니다. The Swedish Church Bible of 1917 has recently been “replaced” by two new translations, Bibel-2000 and Folkbibeln (1998). Both have “for Babylon” at Jeremiah 29:10. In answer to my questions, the translators of both translations emphasized that l e bâbel at Jeremiah 29:10 means “for Babylon” not “at” or “in” Babylon. Remarkably, even the new revised Swedish edition of the NWT has changed the earlier “in Babylon” (Swedish “i Babylon”) in the 1992 edition to “for Babylon” (Swedish: “för Babylon”) in the 2003 edition. (See above, p. 211, ftn. 26) 1917년의 스웨덴 교회 성경은 최근에 성서-2000과 민속 성서(1998)라는 두 개의 새로운 번역본으로 대체되었다. 두 번역 모두 예레미야 29장 10절에서 "바빌론을 위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두 번역서의 번역가들은 예레미야 29:10의 le bábel이 바빌론에서(at)나 바빌론 안에서(in)가 아니라 "바빌론을 위한(for)"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스웨덴판 NWT 개정판에서도 1992년판 '바빌론에서'(in Babilon)을 2003년판 '바빌론을 위해'(För Babilon)로 바꿨다는 점이다. (211면의 각주 26 참조) Because the rendering “for Babylon” contradicts the theory that the 70 years refer to the period of Jerusalem’s desolation, Furuli needs to defend the notably infrequent rendering “at” or “in” Babylon. He even claims that the preposition “for” gives the 70 years “a fuzzy meaning:” "바빌론을 위한"이라는 표현은 70년이 예루살렘의 황폐기간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모순되기 때문에, 푸룰리는 "at" 또는 "in"으로 번역한 소수 역본으로 바빌론에서라는 번역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심지어 전치사 for가 70년이라는 기간이 "모호한 의미"를 가진다고 이렇게 주장한다: If “for” is chosen, the result is fuzziness, because the number 70 then loses all specific meaning. There is no particular event marking their beginning nor their end, and the focus is wrong as well, because it is on Babylon rather than on the Jews. (p. 86) 만약 "for"를 선택한다면, 그 결과는 의미가 모호하게 된다. 왜냐하면 숫자 70이 구체적인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알리는 특별한 사건이 없으며, 유대인이 아닌 바빌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초점이 또한 잘못되었다(86면). This is an incredible statement and another example of Furuli’s special pleading. It is difficult to believe that Furuli is totally ignorant of the fact that both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Babylon’s supremacy in the Near East were marked by revolutionary events — the beginning by the final crushing of the Assyrian empire and the end by the fall of Babylon itself in 539 BCE. Surely he must know that, according to secular chronology, exactly 70 years passed between these two events. Modern authorities on the history of this period agree that the definite end of Assyria occurred in 610/609 BCE. In the box on page 234 of chapter 5 above, for example, four leading scholars are quoted to this effect: viz. Professor John Bright and three leading Assyriologists, Donald J. Wiseman, M. A. Dandamaev, and Stefan Zawadski. It would be easy to multiply the number. Another example is Professor Klas R.Veenhof. He describes how the last king of Assyria, Assuruballit II,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capital Nineveh in 612 BCE, retreated to the provincia1 capital Harran, the last Assyrian stronghold, where he succeeded in holding out for another three years, supported by Egypt. Veenhof writes: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황당한 진술이며 푸룰리의 특별한 애원의 또 다른 하나의 예이다. 푸룰리가 바빌론의 근동에서 패권의 시작과 끝이 아시리아 제국의 최종적인 붕괴와 기원전 539년 바빌론의 멸망 등 혁명적인 사건들로 특징지어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기조차 어렵다. 세속적 연대기에 따르면, 이 두 사건 사이에 정확히 70년이 흘렀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한 현대의 권위자들은 아시리아의 종말이 기원전 610/609년에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위의 5장 234면의 박스에는 4명의 주요 학자들이 인용되어 있다: 즉, 존 브라이트 교수와 3명의 저명한 아시리아학자 도널드 J. 와이즈먼, M. A. 단다메프 스테판 자와드스키이다. 그 외에도 다수가 있다. 또 다른 예는 Klas R 교수이다. 빈호프는 기원전 612년 수도 느네웨가 파괴된 후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수루발리트 2세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마지막 아시리아의 요새인 그 지역의 수도인 하란으로 후퇴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빈호프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It was to no advantage that Egypt supported Assyria; the Babylonian and Median armies took the city in 610 B.C., and in the following year [609] they warded off their last defensive attempt. Therewith a great empire was dissolved.105 이집트가 아시리아를 지원한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와 메데의 군대는 기원전 610년에 그 도시를 점령했고, 다음 해에 그들은 아시리아의 마지막 방어 시도를 물리쳤다. 그렇게 대제국은 해체되었다.105 The same historical information is given by Professor Jack Finegan on page 252 (§430) in the new revised edition of his wellknow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Quoting Jeremiah 29:10 he concludes: 잭 파이넌 교수는, 그의 잘 알려진 성경 연대기 편람의 새로운 개정판 252면 ( page430쪽)에서, 같은 맥락의 역사적 정보를 제시하였다. 예레미야 29장 10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The “seventy years . . . for Babylon,” of which Jeremiah speaks are therefore the seventy years of Babylonian rule, and the return of Judah from exile is contingent upon the end of that period. Since the final fall of the Assyrian empire was in 609 B.C. (§430), and the New Babylonian empire endured from then until Cyrus the Persian took Babylon in 539, the period of Babylonian domination was in fact seventy years (609 — 539 = 70).106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바빌로니아를 위한 70년"이란 바빌로니아 통치의 70년이며, 유대인 포로들의 귀환은 그 기간이 끝나야 가능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몰락이 기원전 609년(§430)이었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그때부터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빌론을 점령할 때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바빌론의 패권기는 사실상 70년(609년 – 539년 = 70년)이었다.106 Certainly, no one acquainted with Neo-Babylonian history can honestly claim that the 70 years “for Babylon” have a “fuzzy meaning” because no particular events mark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period. 확실히, 신바빌로니아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70년이 그 기간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특별한 사건이 없기 때문에 "바빌로니아를 위한"이란 표현이 "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D-4) Jeremiah 29:10: The Septuagint and Vulgate versions
(D-4) 예레미아 29:10: 70인역과 벌게이트역
Furuli next points out that “the Septuagint has the dative form babylôni” but with “the most natural meaning being ‘at Babylon’.” The statement reveals a surprising ignorance of ancient Greek. As every Greek scholar will point out, the natural meaning of the dative form babylôni is “for Babylon.” It is an exact, literal translation of the original Hebrew le bâbel, which definitely means “for Babel” in this text, as discussed on pp. 213, 214 above. True, at Jeremiah 29:22 (LXX 36:22) the dative form babylôni is used in the local sense, “in Babel,” but it gets this sense only because of the preceding Greek preposition en, “in”: 그 다음으로 푸룰리는 "70인역에서는 '바빌론에서'라는 표현이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그 진술은 고대 그리스어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무지를 드러낸다. 모든 그리스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바빌론(Babylon)의 여격의 형태인 바빌로니(babylôni)의 자연스러운 의미는 "바빌론을 위한(for Babylon)"이다. 그것은 213, 214면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이 본문에서 분명히 "바빌을 위하여"를 의미하는 원래의 히브리어 르 바벨( le bâbel)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예레미야 29:22 (LXX 36:22)에 여격의 바빌로니가 장소의 의미인 "바빌론에서"로 사용되지만, 앞의 그리스어 전치사 en(영어의 in에 해당)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다. And from them a malediction will certainly be taken on the part of the entire body of exiles of Judah that is in Babylon (en babylôni) 그들로부터 틀림없이 바빌로니아에 있는(en babylôni) 유대인 포로들 모두에 대한 악성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Furuli further refers to the rendering of the Latin Vulgate, in Babylon, which means, as he correctly explains, “in Babylon.” This translation most probably influenced the KJV of 1611, which in turn has influenced several other earlier translations. The point is that all translations derived from or influenced by the Vulgate, such as the KJV, are not independent sources. 푸룰리는 또한 라틴어 벌게이트역을 참고하여 "바빌론에서"라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설명했듯이 바빌론에서라는 뜻이 정확한 것은 사실이다. 이 번역은 아마도 1611년의 KJV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이는 다시 몇몇 다른 초기 번역본에 영향을 미쳤다. 요점은 KJV와 같이 벌게이트역에서 파생되거나 벌게이트역에 의해 영향을 받은 모든 번역의 출처는 독립된 번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
(D-5) Jeremiah 29:10: The Hebrew preposition le (lamed)
(D-5) 예레미아 29:10: 히브리어 전치사 le (lamed)
The preposition l e is the most common preposition in the Hebrew Old Testament. According to a recent count, it occurs 20,725 times, 1352 of which are found in the book of Jeremiah.107 What does it mean at Jeremiah 29:10? Since the first edition of the present work was published in 1983, this question has been asked of dozens of qualified Hebraists around the world. I contacted some and so did some of my correspondents. Although some of the Hebraists explained that l e in a few expressions has a local sense (“in, at”), in most cases it does not, and they unanimously reject this meaning at Jeremiah 29:10. Some of them are quoted in chapter 5 above, pp. 213, 214. 전치사 le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전치사이다. 최근 집계에 따르면, 그것은 20,725번 발생하는데, 그중 1,352번은 예레미야서에 나온다.107 이 책의 초판이 1983년 출간된 이후 전 세계 수십 명의 자격을 갖춘 히브리어 학자들이 "예레미아 29:10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나의 서신 교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연락을 하였다. 히브리어 학자들 중 일부는 몇몇 표현에서 le가 장소의 의미("in, at")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으며, 그들은 예레미야 29장 10절에서 장소로서의 의미를 만장일치로 거부하였다. 그들 중 일부 학자가 앞의 5장 213, 214면에 인용되어 있다. Furuli disagrees with their view. He believes that because l e is used in a local sense in some expressions at a few places it is likely used in this sense also in Jeremiah 29:10. He argues: 물론 푸룰리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le"가 몇몇 군데에서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레미야 29장 10절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Can it really be used in the local sense “at”? It certainly can, and The Dictionary of Classical Hebrew lists about 30 examples of this meaning, one of which is Numbers 11:10, “each man at (le) the entrance of his tent”. So, in each case when le is used, it is the context that must decide its meaning. For example, in Jeremiah 51:2 the phrase lebâbel means “to Babylon”, because the preceding verb is “to send”. But lirûshâlâm [the letters li at the beginning of the word is a contraction of le+yod] in Jeremiah 3:17 in the clause, “all the nations will gather in Jerusalem” has the local meaning “in Jerusalem”, and the same is true with the phrase lîhûdâ in Jeremiah 40:11 in the clause, “the king of Babylon had left a remnant in Judah”. (p. 86) "at"라는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사용될 수 있는가? 고전 히브리어 사전에는 이 의미에 대한 30여 개의 예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각각 자신의 문 입구에 있는 사람"이라는 민수기 11:10이다. 그러므로, le이 사용되는 각각의 경우,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하는 것은 문맥이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51장 2절에서 레바벨은 "바빌론으로"를 의미하는데, 이는 앞의 동사가 "보내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3장 17절의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라는 의미는 "예루살렘 안에 모일 것"이라는 장소의 의미이며, 예레미야 40장 11절의 "유다에( lîhûdâ)"도 마찬가지로 장소를 나타낸다. Well and good, but do these examples allow l e bâbel at Jeremiah 29:10 to be translated “in” or “at Babylon”? Is this really a likely translation? Is it even a possible one? This question was sent to Professor Ernst Jenni in Basel, Switzerland, who is undoubtedly the leading authority today on Hebrew prepositions. So far, he has written three volumes on three of the most common Hebrew prepositions, be (beth), ke (kaph), and le (lamed). In the volume on le (lamed) he devotes 350 pages to the examination of this preposition.108 His answer of October 1, 2003, quoted on page 214 above, is worth repeating here: 그렇다면 이 예들이 예레미야 29장 10절의 레바벨을 "바빌론에서" 로 번역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이게 정말 그럴듯한 번역인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 질문은 히브리어 전치사에 대한 주도적인 권위자인 스위스 바젤의 에른스트 제니 교수에게 보내졌다. 오늘날까지 그는 가장 많이 쓰이는 히브리어 전치사 베스, 케, 레에 대해 세 권의 책을 각각 썼다. <le (lamed)>에 관한 책에서 그는 이 전치사를 검토하는 데에 350면을 할애했다.108 위 214면에 인용된 2003년 10월 1일의 그의 답변은 여기서 반복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My treatment of this passage is found in the Lamed-book p. 109 (heading 4363). The rendering in all modem commentaries and translations is “for Babel” (Babel as world power, not city or land); this is clear from the language as well as also from the context. 이 구절에 대한 나의 연구는 <라메드> 109(표제 4363)면에 나와 있다. 모든 현대 주석가의 해설과 번역은 "바벨을 위해"(도시나 작은 국가가 아닌 세계 강국)으로서의 바벨)이며, 이는 언어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맥적으로도 명확하다. By the “local meaning” a distinction is to be made between where? (“in, at”) and where to? (local directional “to, towards”). The basic meaning of l is “with reference to”, and with a following local specification it can be understood as local or local-directional only in certain adverbial expressions (e.g., Num. 11,10 [Clines DCH IV, 481b] “at the entrance”, cf. Lamed pp. 256, 260, heading 8151). At Jer. 51,2 l is a personal dative (”and send to Babel [as personified world power] winnowers, who will winnow it and empty its land” (Lamed pp. 84f., 94)). On Jer. 3,17 “to Jerusalem” (local terminative), everything necessary is in Lamed pp. 256, 270 and ZAH 1, 1988, 107–111. "장소의 의미"로는, 어디에? (in, at)와 어디로? (장소의 방향)로 구분된다. 레(le)의 기본 의미는 "~~과 관련하여"이며, 다음과 같이 장소를 명시하는 특정 부사 표현에서만 장소 또는 장소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예: 민수기 11:10 [Clines DCH IV, 481b] "입구쪽", cf). 256, 260면, 표제 8151) 예레미아 51:2에서는 개별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바벨 [세계 강국으로서의 의인화]의 키질하는 자들에게 보내서, 그 땅을 비울 것이다.) (<라메드> 84f., 94면) 예레미아 3:17에서는 "필요한 모든 것은 "예루살렘으로"(종착지를 나타내는 방향) <라메드> 256, 270면 및 ZAH 1, 1988년, 107–111면. On the translations: LXX has with babylôni unambiguously a dative (”for Babylon”). Only Vulgata has, to be sure, in Babylon, “in Babylon”, thus King James Version “at Babylon”, and so probably also the New World Translation. 번역에 대하여: LXX(70인역)는 babylorni로 표현함으로써 분명히("바빌론을 위한")이라는 여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직 벌게이트 역만이 "바빌론에서"로 번역하였고, 따라서 제임스 왕역도 "바빌론에서"로 번역하고 있으며, 아마 신세계 역도 그래서 그렇게 번역하였을 것이다. I hope to have served you with these informations and remain with kind regards, E. Jenni. [Translated from the German. Emphasis added.] 계속 안부 전해드리며 이런 정보가 전달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 제니. [독일어에서 번역됨. 강조 표현은 추가된 것임.] In view of this specific and authoritative information, Furuli’s arguments for a local meaning of l e at Jeremiah 29:10 can be safely dismissed. 이 구체적이면서도 권위있는 정보에 비추어 볼 때, 예레미야 29장 10절에서 '레'가 장소를 나타낸다는 푸룰리의 주장은 여지없이 묵살될 수 있다. |
(D-6) What about the 70 years at Zechariah 1:12 and 7:5?
(D-6) 스가랴 1:12과 7:5의 70년은 어떠한가?
That the 70-year texts at Zechariah 1:12 and 7:5 refer to a period different from the one in Jeremiah, Daniel, and 2 Chronicles is demonstrated in detail in chapter 5 above, pp. 225–229. There is no need to repeat the argumentation here. Furuli’s attempt to equate the 70 years in Zechariah with the 70 years of Jeremiah, Daniel, and the Chronicler evades the real problem. 스가랴 1장 12절과 7장 5절에 언급된 70년은 예레미야, 다니엘, 그리고 역대하와는 다른 기간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앞의 5장 225~229면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그 주장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푸룰리가, 스가랴서에 언급된 70년을 예레미야, 다니엘, 역대기에 기록된 70년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실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짓이다. According to Zechariah 1:12, Jerusalem and the cities of Judah had been denounced for “these seventy years.” If this denunciation ended when the Jews returned from the exile after the fall of Babylon, as Furuli holds, why does our text show that the cities still were being denounced in the second year of Darius, 520/519 BCE? Furuli has no explanation for this, and he prefers not to comment on the problem. 스가랴 1장 12절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은 "이 70년 동안" 하나님의 분노를 받았다. 푸룰리의 주장처럼 유대인들이 바빌론 함락 후 유배지에서 돌아왔을 때 이 분노가 끝났다면, 왜 성서 본문은 다리우스 2년(기원전 520/519년)에도 그 성읍들이 여전히 분노를 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푸룰리는 이에 대해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The same holds true of Zechariah 7:4,5. How can the 70 years of fasting have ended in 537 BCE, as Furuli claims, when our text clearly shows that these fasts were still being held in the fourth year of Darius, 518/517 BCE? Furuli again ignores the problem. He just refers to the fact that the Hebrew verbs for “denounce,” “fast,” and “mourn” are all in the Hebrew perfect, stating that, “There is nothing in the verbs themselves which demands that the 70 years were still continuing at speech time.” (p. 88) True, but they do not demand the opposite, either. The verb forms in the passage prove nothing. 스가랴 7장 4,5절도 이와 같다. 푸룰리의 주장처럼, 이러한 금식이 다리우스 4년(기원전 518/517년)에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성서 본문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기원전 537년에 70년의 금식이 끝났을 수 있었겠는가? 푸룰리는 그 문제 역시 무시해 버렸다. 그는 "동사들 자체에는 70년이 말씀의 때(speech time)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없다."고 진술하면서, 단지 "비난하다" "금식하다" "슬퍼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들이 모두 히브리어 완전체라는 사실만을 언급하였다. (88면)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그 반대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 구절의 동사의 형태 자체가 무엇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But the context does. It clearly shows that the cities were still being denounced “at speech time,” in 519 BCE, and that the fasts were still being held “at speech time,” in 517 BCE, about 70 years after 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in 589–587 BCE. That is why this question was raised in 519 BCE: Why is Jehovah still angry at Jerusalem and the cities? (Zechariah 1:7–12) And that is also why this question was raised in 517 BCE: Shall we continue to hold these fasts? (Zechariah 7:1–12) Furuli’s interpretation (which echoes the Watchtower Society’s) implies that the denunciation of the cities and the keeping of the fasts had been going on for about 90 — not 70 — years, directly contradicting the statements in the book of Zechariah. 하지만 문맥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원전 519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파괴된 지 약 70년이 지난, 기원전 517년에도 유다 성읍들이 여전히 "말씀의 때"에 분노를 사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519년에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 이유이다: 왜 여호와께서 여전히 예루살렘과 그 성읍들에 분노하고 있는가? (스가랴 1:7–12) 그리고 이것이 기원전 517년에 이러한 질문이 제기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금식을 계속해야 합니까? (스가랴 7:1–12) 푸룰리의 해석은 (워치타워 협회의 해석을 반영한다) 성읍들에 대한 분노가 70년이 아니라 약 9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스가랴서의 진술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
Summary
요약
In this review of Furuli’s book, we have seen a number of insurmountable difficulties that his Oslo Chronology creates not only with respect to the extra-Biblical historical sources but also with the Bible itself. 푸룰리의 저서에 대한 이번 검토에서 우리는 그의 <오슬로 연대기>가 성경 외적인 사료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와 관련하여 야기시키는 극복 불가능한 많은 난제를 살펴보았다. The amount of evidence against Furuli’s revised chronology provided by the cuneiform documents — in particular the astronomical tablets — is enormous. Furuli’s attempts to explain away this evidence are of no avail. His idea that most, if not all, of the astronomical data recorded on the tablets might have been retrocalculated in a later period is demonstrably false. Furuli’s final, desperate theory that the Seleucid astronomers — and there were many — systematically redated almost the whole astronomical archive inherited from earlier generations of scholars is divorced from reality. 설형문자로 씌여진 문서, 특히 천문일지 점토판이 제공하는 푸룰리의 개정 연대기에 대한 증거의 양은 엄청나다. 푸룰리는 이 증거를 무시하려고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토판에 기록된 천문학적 자료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후기 시대에 역산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명백히 틀린 것이다. 셀레우코스 천문학자들과 많은 천문학자들이 이전 세대의 학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거의 모든 천문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다시 만들었다는 푸룰리의 마지막 절박한 이론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With respect to the Biblical passages on the 70 years, we have seen to what extremes Furuli has been forced to go in his attempts to bring them in agreement with his theory. He has been unable to prove his repeated claim that the 70-year passages in Daniel and 2 Chronicles unambiguously state that Jerusalem was desolate for 70 years. His linguistic interpretation of 2 Chronicles 36:21 is misconstrued because he ignores the main clause in verse 20, which plainly makes the servitude end at the Persian conquest of Babylon in 539 BCE. Furuli’s linguistic rerenderings of the passages in Jeremiah are no better. To reconcile Jeremiah 25:11 with his theory, he admits that he must discard “the most natural translation” of the verse. And to bring Jeremiah 29:10 into agreement with his theory, he must reject the near-universal rendering “for Babylon” in favor of the unsupportable “in Babylon” or “at Babylon” — translations rejected by all competent modern Hebraists. 70년에 대한 성경 구절과 관련해 푸룰리가 자신의 이론에 부합하는 구절들을 끌어내려는 시도에서,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켜봤다. 그는 다니엘과 역대하에 언급된 70년이 예루살렘이 70년 동안 황폐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그의 거듭된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었다. 역대하 36:21에 대한 그의 언어적 해석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에서 명백히 종지부를 찍게 하는 20절의 주요 내용을 무시하기 때문에 잘못 해석되었다. 푸룰리가 예레미야의 구절을 언어적으로 바꾼 것도 더 나을 것이 없다. 예레미야 25장 11절과 그의 이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그는 이 구절의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을 버려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예레미야 29장 10절의 그의 이론에 동의하기 위해서, 그는 "바빌론을 위한"이라는 거의 보편적인 번역을 거부해야만 한다. Furuli’s approach, then, is not Biblical as he claims, but sectarian. As a conservative Jehovah’s Witness scholar, he is prepared to go to any length to force the Biblical passages and the historical sources into agreement with the Watchtower Society’s Gentile times chronology — a chronology that is the foundation cornerstone of the movement’s claim to God-given authority. As I have amply documented in this review, this sectarian agenda forces Furuli to fabulate more wildly than Sheherazade; the legendary Persian queen and storyteller of One Thousand and One Nights. 그러므로 푸룰리의 접근법은 그의 주장처럼 성경이 아니라 종파적 해석인 것이다. 보수적인 여호와의 증인 학자로서, 그는 성경 구절과 역사적 자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에 대한 운동의 주장의 기초가 되는 연대기인 워치타워 협회의 '이방인의 때'에 관한 연대기와 일치하도록 짜맞추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이 검토에서 충분히 문서화했듯이, 이 종파적 의제는 푸룰리가 전설적인 페르시아의 여왕이자 1박1일의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데보다도 더 겉잡을 수 없이 꾸며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