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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치 않는 기도자
2011년 12월 18일 / 대예배 / 눅 18:1-8
■ 존 맥스웰(John C. Maxwell) 은 그의 책 「생각의 법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믿음이 달라진다. 믿음이 달라지면 기대가 달라진다. 기대가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진다. 태도가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기 전에 먼저 마음부터 바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했으나 응답이 더딜 때, 더 기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런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생활에 이런 낙심을 반드시 이겨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낙심만하면 기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 키에르 케고르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에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요, 바로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낙심하고 절망하도록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줍니다. 일제 강점기에 포로 2만 명을 잡아다가 4-5년 동안 수용소에서 고문도 하고 일도 시켰는데, 그 수용소에서 8천 명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때 죽은 연합군의 시체를 연구해 보니까 고문이나 영양실조로 죽은 숫자는 별로 안 되고 대다수가 절망해서 죽은 경우였다고 합니다. 낙심하면 영적으로 죽고, 마음도 죽고, 육체도 죽고, 생활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돼요. 정신적으로 절망하고 낙심하여 삶의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그만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모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낙심은 사람의 모든 기력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립니다. 이것은 기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때로 힘들고 낙심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때에는 “정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 더 기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고 회의주의가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야 됩니다.
1. 밤낮 부르짖는 기도자 - 열심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예외가 아니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여 만사가 형통하기만 하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어 손해를 입고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딤후 3:12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럴 때 택함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지만 원통함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때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연약함을 아시고 원통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지를 본문을 통해 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눅 18:1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
여기서 ‘낙망 (ejkkakei'n)’이라는 말은 어떤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응답이 안 되거나 더디다고 생각될 때 지레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것으로, 원어의 의미는 ‘녹초가 되다, 활기를 잃다, 피곤하다, 실망시키다’라는 뜻처럼 영적인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상태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와 같은 좌절이나 실망에 빠져 헤맬 때가 있었습니다.
눅 18:3 / 그런데 그 도시에 사는 한 과부가 늘 그를 찾아가서 자기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려 달라고 탄원하였다.
과부는 그 억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관에게 가지고 가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였으나,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었기에 과부의 억울함은 쉽게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관이 질릴 정도로 자주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줄 것을 탄원하였습니다.
눅 18:5 /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번거롭게’라는 말은 상처와 고통을 제공하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 과부의 끈질긴 탄원에 불의한 재판관도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시한 채 그냥 내버려두게 되면 결국 자기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말은 권투선수가 여러 번 잽을 날려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눈가가 찢어져서 피를 흘리게 되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을 자주 찾아가서 자신의 원통함을 공정하게 판결해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자 결국 항복을 하고 그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재판관은 과부의 원통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부를 무시한 채 원한을 풀어주지 않다가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번거롭게 함으로 결국 자기가 괴로워서 들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왜 기도하다가 중단하고 낙심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과부의 강청에 못 이겨 결국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끈질긴 기도에 응답을 하시지 않겠느냐는 기도 응답의 역설적인 재확인입니다.
눅 18:7 /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간구하는 그의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해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난관에 봉착하든지 과부처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낙망치 않는 기도자가 되십시다.
■ 히 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살고 뒤로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태평양을 횡단하던 배가 파선되어 20일 이상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리건 베이커(R. Barker)라는 선장과 젊은 두 선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뗏목을 타고 20일 동안 바다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온몸이 타들어갔고, 밤에는 얼어 죽을 듯한 데다가 상어의 공격까지 받았습니다. 무시무시한 절대 절망의 상황 - 바다 한 가운데 23일을 표류했으니 얼마나 엄청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선장은 늘 성경 두 구절을 외우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과 마태복음 6장 31~34절을 암송했습니다. 성경 두 구절을 암송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23일 만에 구조 되었을 때, 신문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23일 동안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선장은 말하기를 “나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하루하루 이겨나갈 수 있었고 결국에는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2.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기도자 - 겸손
시 91:15 /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에서 ‘간구하리니’, ‘응답하리라’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기도가 계속되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록 오늘 당한 환난을 통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그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그로 인해 오히려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부요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무엇보다 열심이 우선이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기도를 열심히 해도 묵묵부답일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설령 열심히 기도할지라도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기도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성품과 인격의 소유자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약 4:2-3 / … 여러분이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열심도 중요하지만 내면적인 인격이 뒷받침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로 나름대로 율법을 거룩하게 지키기를 힘썼으며,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마 23:23).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비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칭찬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5:20 /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회당과 큰 거리에서 손을 들고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할 정도로 외식하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기도에 열심이었습니다(마 6:5).
눅 18장에서 예수님이 비유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기도하였는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동일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다면 그 결과는 동일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시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지라도 기도자의 내면의 인격과 그 삶의 차이에 따라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❶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도 자기 자신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세리는 정반대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설령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남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눅 18:9 /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자신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니 자기만 의롭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의로우실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일컬어 주셔야 합니다.
❷ 바리새인은 세리와 구별되게 따로 서서 하나님께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으나 세리는 하나님께 자신이 죄인을 고백하는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눅 18:11-12 /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의롭게 사는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마치 내가 잘나서 의롭게 사는 줄 안다면 그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❸ 바리새인은 회개의 기도가 없이 자기의 의를 하나님께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지만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겸손히 기도드렸습니다.
눅 18:13 /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려고 힘쓰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자신이 남보다 의롭기 때문이라고 자만한다면 결국 외식이라는 부패를 생산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시지 않으며 그러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가증하기 때문입니다.
잠 28:9 / 사람이 가르침을 싫어하여 귀를 막아 버리면 하나님도 역겨워하시어 제아무리 빌고 빌어도 귀를 막아버리신다.
3. 장애물을 간절함으로 극복하여 응답받자
오늘의 현실은 육체가 건강한 청년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 당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자가 무슨 일자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당국자들은 복지차원에서 그러한 장애자들에게 출입이 빈번한 성전이나 성문 앞에서 구걸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눅 18:35-36 /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맹인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36) 군중이 몰려가느라 소란해지자 그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는 바디매오의 성격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 말씀으로, 여기서 구걸하다(prosaitevw)라는 동사는 거절한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줄 때까지 반복해서 끈질기게 간청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와 같은 성격이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포기할 사람이 아닙니다.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 앞을 지나가시자 체면불구하고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리쳐 불렀습니다.
눅 18:37-38 /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알려 주자 38)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디매오가 외쳤다는 말은 예수님을 부르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분명히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것은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거나, 간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담은 간절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 과연 누가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부분 바디매오와 같은 처지가 되면 “그래 나는 더 이상 안 된다. 누구도 나를 보게 할 수 없어. 나는 평생 남의 도움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 팔자다.” 하는 식으로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 그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 나를 고쳐주시기 위해 이 성에 찾아오셨다. 내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절호의 기회다.”라고 믿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경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을 무참히 막고 짓밟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눅 18:39 /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나무랐으나 그는 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꾸짖는다’라는 말은 엄하게 책망하며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계속 억압을 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 질러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바디매오의 소원대로 보게 하여 주시되 그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의 결과임을 선포하여 주셨습니다.
눅 18:42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눈을 뜨고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바디매오는 소경으로 예수님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을 가졌으나 낙망하지 않고 믿음과 열심으로 주께 구하였을 때 눈을 뜨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육체적인 눈을 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을 뜨고 난 다음 바디매오의 영적인 변화를 더 주목해야 합니다. 눈이 떠졌다고 먼저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을 좇지 않고 먼저 예수님을 좇는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원한이 있을 때 낙담하지 말고 과부와 세리처럼 무엇보다 열심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무조건 환난을 벗어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과부처럼 원통한 일을 겪을 때에 낙심치 않고 기도하게 하려는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❶ 그로 인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환난으로 인하여 더 가까워지고, 기도를 게을리 했던 사람이 더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하시려고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❷ 그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였을 것이지만 낙망하지 않는 기도자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함으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❸ 하나님은 게으른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심있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사용했습니다. 60년 동안 새벽 네 시에 일어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천 편이 넘는 설교를 하면서 90세까지 살았던 존 웨슬레(John Wesley)를 사용하셨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한 후에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곤 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와 같이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19세에 예일 대학의 교수가 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같은 천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와 같이 무학자를 들어 위대한 복음 사역의 꽃을 피우게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아주 신령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천재와 같은 사람, 무식한 사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을 사용했지만 한 가지는 꼭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며 바쁠 때는 더 많이 기도한다는 마틴 루터를 쓰셔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깨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은 불교에 잠들어 있던 절망이 땅인 버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물결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낙심치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감사할 때, 응답과 함께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실 것입니다.
▶ 왕상 18:42-45 / … 엘리야는 거의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묻고 43) 시종에게 일렀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바다 끝을 보아라!” 시종이 올라갔다가 내려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영의 눈으로 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계속 시종을 올려 보냈다. 44) 시종이 7번째 다녀와서 아뢰었다. “바다 끝에서 손바닥 만한 구름 한 조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이렇게 시켰다. “너는 아합왕에게 가서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기 전에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가시라고 일러라.” 45) 그러나 이미 폭풍이 일고 온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세찬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
이 말씀은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 5:17-18 /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18) 다시 비가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서 초목이 다시 푸르게 되고 들의 곡식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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