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알아 (1편)
바리
“오늘 언니 생일이니까 언니한테 뭐 시키지 마.”
엄마가 유라에게 빨래 바구니를 건넨다. 오늘은 유라의 언니인 아라의 생일이다.
잠에서 덜 깬 유라가 눅눅한 빨래가 가득 담긴 묵직한 바구니를 넘겨받고 베란다로 걸어간다. 엄마의 말을 듣고 침대에서 일어난 뽀얀 얼굴의 아라가 통통통 걸으며 유라의 옆으로 천천히 따라온다. 아라는 오랜만에 연차를 내고 늦잠을 잤다. 아라의 동그란 이마와 동그란 콧볼에 기름이 잔뜩 번들거린다. 엄마 복주가 아라의 얼굴을 보더니 똥파리도 낙상하겠다며 껄껄 웃는다. 아라는 미끌리는 이마를 손등으로 훑으며 아기같이 배시시 히히거린다. 밤새 보일러를 틀어두어 아라가 통 통 내딛는 발걸음마다 뜨뜻한 바닥이 느껴진다. 바구니를 들어 손이 없는 유라를 앞질러 가서는 베란다의 문을 열어준다. 순식간에 거실로 차디찬 겨울의 냉기가 들어온다. 창밖으론 커다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다. 빨간색 줄무늬 미키 티셔츠와 분홍색 곰돌이 수면바지를 입은 아라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한다.
“추워...”
그러고는 마른 빨래를 걷는 유라의 옆에 붙어 서서 젖은 빨래를 넌다. 아라가 습관처럼 커다란 흰 셔츠의 어깨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세게 턴다. 팡, 팡 소리가 나며 옷의 주름이 펴진다. 손이 느린 유라가 세탁망 속에서 엉킨 브래지어 끈을 하나씩 푸는 동안 아라는 금세 빨랫대 한쪽을 다 채운다. 작은 양말과 속옷은 아래쪽에, 커다란 옷은 위쪽에 차례로 너니 빨랫대가 가득 찬다. 유라가 생일인데 뭐 할거냐고 아라에게 묻자 아라는 동그란 얼굴로 가만히 고민한다. 아침에 일어난 아라는 유난히 더 하얗고 동그랗다. 유라가 아라의 매끈한 볼을 보며 귀엽다고 히히 웃는다. 유라는 6살 많은 아라가 나이들수록 더 귀여워 보인다. 유라가 빨래를 다 널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샤워기 물 트는 소리가 솨아아 나자 아라가 허둥지둥 달려와 유라에게 말한다.
“아! 내가 지금 씻으려고 했는데!”
아라는 유라가 무언가를 시작하면 덩달아 그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에 유라가 밖에 나갈 때 입으려고 미리 꺼내놓은 맨투맨을 보며 아라는 말했다. “아! 그거 내가 입으려고 했는데! 왜 너가 입냐?”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유라가 휴대폰을 충전하려 하면 아라는 호다닥 충전기를 쳐다보며 말한다. “아! 나 지금 충전해야 되는데! 그거 내 충전기야” 아라는 동생 유라와 함께일 때 유치해진다. 그리고 그 유치한 속마음을 숨기는 법이 없다. 유라와 투닥투닥 우이씨, 이씨, 말씨름을 한다. 그리고는 유라에게 치사한 언니라는 소리를 듣거나 유라에게 치사한 동생이라고 말하면서 상황이 마무리된다. 유라 앞에서 아라는 겉 껍질을 모두 벗긴 뽀얀 양파처럼 숨김없이 매운 향을 풍겨댈 수 있다. 설거지를 은근슬쩍 아라에게 떠넘기거나 밖에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침대에 누울 때면 하지 말라는 건 골라 하는 유라가 얄미운 동생이지만, 사실 아라는 유라와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 유라에게는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낼 수 있다. 싫은 소리를 백 번 해도 눈하나 꿈쩍 않는 유라가 사실은 아라의 해방구다.
아라는 회사 사람들에게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솔직한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정확히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 아라의 친구가 아라의 취향과 전혀 다른 땡땡이 무늬 니트를 선물해도 아라는 누구보다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회사에서 아라의 동료가 떠넘긴 번역 일감을 한가득 떠맡아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않고 물론 다 할 수 있죠 하며 허허 웃는다.
그런 아라도 친구와 크게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다. 아라의 친구 찡찡이는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아라에게 매일이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필라테스 학원에서 일어나는 회원들 간의 기싸움에 대해, 찡찡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세 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그럼 아라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못하고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있다. 마치 아라에게 일어나는 일인 양 함께 인상을 쓰고 덩달아 속상함을 느꼈다. 이야기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찡찡아, 그만 두고 학원을 옮겨! 아니 아라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진짜 짜증나 죽겠어!
찡찡이는 찡얼거리는 말투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매일 3시간씩, 무려 한 달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라에게 매번 필라테스 학원에서의 새로운 일화를 전했지만 아라가 듣기엔 모두 비슷한 이야기였다. 찡찡이는 전화를 끊을 때면 항상 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야~! 내 얘기 들어줘서 너무 너무 고마워! 너 덕분에 그래도 좀 풀린 것 같아~”
밝고 개운한 찡찡이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찡찡이가 칭얼거림을 멈추면 아라는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해방감을 느끼기도 잠시, 곧 괴로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찡찡이에게는 네가 개운하다니 잘됐다는 말이 나왔다. 아라는 찡찡이와의 전화가 끝나면 깊은 한숨을 내쉬곤 그제야 화장을 지우고 저녁밥을 챙겨 먹었다. 간장 계란밥을 슥슥 비벼 먹으며 아라는 유라에게 찡찡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라의 옆에서 도돌이표같은 전화통화를 자주 엿들어온 유라가 말했다.
“오늘도 그 찡찡이야? 에라이~”
유라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점프한다. 아라가 배실배실 웃는다. 유라의 장난스러운 행동 하나면 금방 모든 일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아라는 찡찡이에게 세 시간동안 칭얼대는 전화를 받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말하기로 다짐하지만, 매번 기쁘게 전화를 끊는 찡찡이에게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가 택한 방법은 도망치기다. 한 달이 넘는 시점부터 찡찡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찡찡이는 전화를 받지 않는 아라에게 필라테스 학원에서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다며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아라는 그때부터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남겨졌다. 아라는 찡찡이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불편했다. 하지만 찡찡이에게 그만 좀 찡찡대라는 아라의 진심을 곧이곧대로 전했다간 찡찡이가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찡찡이와의 싸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 찡찡이에게 못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찡찡이는 곧 연락을 받지 않는 아라의 마음을 추측하고 연락을 멈췄다.
뽀연 김을 내며 샤워를 하고 나온 유라가 떡진 머리의 아라와 함께 식탁에 앉아 딸기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퍼먹는다. 둘은 요즘 트위터에서 따뜻한 뮤지컬 영화라고 소문이 난 “피노키오”를 함께 보기로 한다. 아라가 커다란 화면의 휴대폰에 영화를 튼다. 뚝딱거리는 할아버지와 나무 인형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영화를 흘긋 보면서 아라와 유라는 온통 아이스크림에 집중해있다. 아라가 아이스크림에 딸기와 초코칩을 얹어 한 입 가득 입에 넣는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초코칩이 오독오독 씹힌다. 아라는 뽀얗게 기름진 미간을 찌뿌리며 너무 맛있다, 하나 더 시킬 걸 하고 말한다. 아라와 유라는 통에 한가득 담겨있던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바닥까지 긁어먹는다. 어느새 할아버지가 새로 만든 피노키오에 생명이 생겨 피노키오가 팔다리를 툭닥거리며 걷고 말한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아라는 유라에게 말한다.
“졸려... 영화 그만 보자”
그리고는 휴대폰을 홀랑 가져가서 침대로 가 눕는다. 그리고는 유튜브를 켠다. 아라는 요즘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이 어렵다. 느린 전개가 지루하고 답답해서다. 이불 속에 폭 들어가 유튜브를 틀면 왠지 위안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누구도 아라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느낌이다. 아라는 유튜브를 볼 때 어떤 영상을 볼지만 선택하면 된다. 아무 선택도 하고 싶지 않을 땐 무작위로 흘러 나오는 짧은 영상을 슉슉 넘기면 된다. 그 방식이 아라를 편안하게 한다. 유라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멈추는 것이 싫지만 아라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으면 영화를 멈출 줄 알고 있었다. 유라는 아라의 행동 백 개 중 구십 개는 예상할 수 있다. 아라는 집에서 유라와 함께 있을 때는 누구보다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유라는 식탁 위에 남아있는 아이스크림 통과 스푼을 대충 싱크대에 던지고 아라의 옆으로 가 눕는다. 누워있는 아라를 뒤에서 이불 채로 껴안는다. 이불에 둘둘 말린 아라는 더 커다랗고 푹신하다. 침대 옆 창밖으로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