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의 「가족」평설 / 홍일표
가족 조혜정
우연히 모인 돌들처럼 놓여 있었다 뼛속 바람은 본디 한 곳에서 온 것
너무 깊은 곳에 매듭이 있어서 바람은 돌들은 입을 꾹 다문 어둠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오래 저물지 않는 저녁을 본 적 없었다 누군가 발로 차 줄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쇠창살에 갇힌 채 트럭에 실려 가던 개의 눈빛처럼 빨리 잊고 싶은 것들이 모여 돌들이 되었다
인질을 사랑하는 범인처럼 어둠이 저녁의 목을 놓아주자 바람이 돌들이
어둠 속 제 뼈를 보여주었다
------------------------------------------------------------------------------------------------------------------ 뼈의 서사
조혜정 시인은 정밀한 시의 촉수를 가진 시인이다. 섬세하고 예리한 감성의 더듬이가 존재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은폐된 사물의 표정을 잡아낸다. 시의 선이 미세하여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허하게 들떠 있는 시, 착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생경한 관념의 시와는 크게 다르다. 그는 언어의 세공에 남다른 능력을 보이고 있으며 한 폭의 세밀화를 보는 듯한 시를 써온 시인이다.
「가족」은 그의 다른 시와는 달리 비교적 언어의 선이 굵은 시편에 속한다. 그만큼 시의 풍경이 명료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시어 사이의 장력이 팽팽하고 시어의 점성도 강하다. 차분하게 존재의 어두운 풍경을 펼쳐 보이는 시인의 재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시편이다.
이 작품은 시종 어둡고 무겁다. 텍스트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구체적인 생의 세목은 보이지 않지만 고야가 그린 어두운 색감의 검은 그림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목탄으로 그린 암울한 분위기의 정물화 같기도 하다. 어딘가 많이 아프고 절망스런 기운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돌처럼 굳게 입 다물고 있는 가족들은 모두 속 깊이 삶의 “매듭”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로 캄캄한 “어둠”으로 숨 쉬고 있다. 불행하고 비극적인 가족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고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화자는 말한다. “이렇게 오래 저물지 않는 저녁을 본 적 없었다”고. 현재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암담한 절망의 서사는 무엇일까.
그 내용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다. 끝을 모르는 곡절 많은 삶의 내용을 화자는 단단한 돌멩이 안에 가두어 놓는다.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지 않았지만 눈 밝은 독자들은 서사의 저편에서 이쪽의 전경과 이면을 다 헤아리게 된다. 빈틈없이 옷깃을 여민 화자는 쉽게 웃지도, 쉽게 울지도 않는다. 이미 아플 대로 다 아팠고, 울만큼 다 울어버린 시의 주체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가족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빨리 잊고 싶은 것들”이 있고, 일관된 침묵으로 “돌”은 견디고 있다. “가족”들은 울부짖고 싶고, 쏟아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지만 딱딱한 돌덩이로 인고하며 삶의 험로에 서 있다. “끝나지 않는 저녁”을 노려보며 오직 견디고 버티는 것만이 그들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랫동안 비극과 절망의 인질이 되었던 가족들은 어느 한 순간 “제 뼈”를 보여주면서 검은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 그 “뼈”는 죽음의 시간을 관통하여 생성된 것으로 온갖 불우와 맞서 싸우며 버텨온 ‘정신’이며 ‘의지’의 전화(轉化)로 시의 중심에 서 있는 골조이다. 그것은 가혹한 죽음의 시간이 파괴하지 못한 “돌”이며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존재의 형형한 불꽃이다.
———— 홍일표 /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詩로 여는 세상》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