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개다리 건너 찾아 가는 | ||||||||||||
영취산 흥국사 | ||||||||||||
* 한 번 잡기만 해도 삼악도를 면한다는 문고리*
▲ 한 번 잡기만 해도 삼악도(축생·아귀·지옥)를 면한다는 대웅전 문고리
(1) 한 번 잡기만 해도 삼악도를 면한다는 문고리 | ||||||||||||
문고리 잡으러’ 그 절에 갔다. 여수 영취산 흥국사.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쏘냐 싶은 맘으로 달려갔다. 그 소박한 문고리 하나에 사람들은 더 끌렸을 터. 누구나 거창한 욕심내지 않고 이무롭게 잡아봤을 문고리다. ▲ 얼마나 많은 이들의 염원이 스며들어 이토록 반질거릴까! 대웅전 문고리는 한 번 잡기만 해도 불가에서 말하는 삼악도(축생, 아귀, 지옥)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수의 문화유산해설사 오상용씨는 "1624년 대웅전을 지을 때 편수로 참여한 마흔 한 분의 승려들이 천일기도를 하면서 누구든지 이 문고리를 잡는 중생들이 삼악도를 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원력을 세웠다 한다"고 그 영험의 유래를 설명한다
▲ 영취산 진달래와 여수산업단지 인근 여수산단의 공해 때문에 다른 나무는 제대로 생장할 수 없는 산이라 오염에 강한 진달래만 무성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산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안타깝게 다가오고 말지만 말이다.
* 반원의 아름다움 여실한 오래된 돌다리 ‘홍교’ *
▲ 흥국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무지개다리(홍교)' 현존하는 우리나라 무지개다리 중 가장 크다
(2) 반원의 아름다움 여실한 오래된 돌다리 ‘홍교’
지나온 것들을 뒤로하고 ‘건너야’ 할 다리가 절 초입에 있다. 다리는 이 곳과 저 곳의 경계이기도 했다. ‘속(俗)’과 ‘성(聖)’을 나누고 또 이어 준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홍교(虹橋·보물 제563호)다. 규모도 크고 길이도 길지만 그 무엇보다 마음을 붙드는 건 공중에 걸린 반원의 아름다움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우리네 옛적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다리다.
<모두 86괴의 장방각석들이 기하학적인 정확한 각을 이루어 스스로의 무게를 지탱하도록 구축되었다>고 표지판에 씌어 있다. 물리적 무게뿐일까. 시간의 무게까지 보태어 지탱하고 있는 돌다리다. 1639년(인조 17년) 계특대사가 놓았다고 전해진다.
근래 홍수로 인해 일부 훼손되자 다시 손보았는데 이때 자연스러운 곡선미가 많이 흐트러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예전 승려들 가운데는 다리 축조 기술자가 많았다고 한다.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홍교도 조선시대 순천 선암사 승려인 초안(楚安)과 습성(習性)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 위에서 문득 느낀다.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니 그런 말씀 드리며 나이 드신 부모님 손잡고 건너면 좋을 다리다.
▲ 홍예의 중심 머리에는 물 바라보기 좋아하는 용의 여섯 째 아들 공하가 계곡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경고는 이 다리 곳곳에 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본다. 다리 천장에 용머리가 매달려 있다.
홍예 가운데 멍엣돌(마룻돌)에도 귀면이 있다. 이들 모두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쳐 불국토를 지키는 소임을 띠고 있다. 하지만 세월에 씻긴 귀면의 얼굴은 순하고 해학적이기만 하다. 퉁방울 눈에 주먹코. 마주 보면 절로 웃음이 퍼지게 상대를 무장해제 시킨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이유일 게다.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바로 그곳을 침입하려는 잡귀나 악귀의 입장에서 봐야 하니, 과장되고 상식이 뒤바뀐 사례가 오히려 귀신에게 효과적일 것이라는 ‘역발상’이 여기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서운 얼굴보다 ‘웃는 얼굴에 항복’하게 되는 건 귀신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런지.
* 부도 12기가 조붓이 모셔져 있는 부도밭 *
▲ 부도밭에는 12기의 석종형 부도가 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다. 가운데 있는 소나무가 마치 햇빛을 막는 일산 같다
(3) 부도 12기가 조붓이 모셔져 있는 부도밭
일주문을 지나면 왼편 언덕 비탈, 잘생긴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그 곳에 부도밭이 있다. 창건주인 보조국사와 중창주인 법수스님의 부도가 이곳에 있다.
지붕돌의 귀꽃마다 각기 다른 표정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며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들을 만나는 재미도 놓칠 수 없다.
응운당應雲堂 부도의 귀면
우룡당雨龍堂 부도의 얼굴들
가만 들여다보면 이빨을 ‘히∼’ 드러내고 입이 귀에 걸쳐지게 웃는 얼굴도 있다. 그 얼굴들이 베푸는 웃음에 이쪽도 웃음으로 갚을 수밖에. 이 얼굴을 두고 “이 부도의 주인인 스님도, 이 부도를 만든 석공도 참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말을 해준 이는 강현구(광주시문화재전문위원) 선생이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더 따뜻하다.
부도에서 이런 웃음이 담긴 표정은 아주 드문 예라고 한다. 귀꽃에 무서운 얼굴이나 동물 문양이나 용두를 새길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도식성과 엄한 규율을 벗어나 이빨을 드러낸 웃음을 새긴 그 자유로운 파격과 해학, 넉넉하고 트인 마음씨가 돋보인다.
* 극락정토로 가는 ‘반야용선’ 상징 대웅전 곳곳에 *
(4) 극락정토로 가는 ‘반야용선’ 상징 대웅전 곳곳에
이곳 대웅전(보물 제396호)은 해남 미황사 대웅전처럼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
법당 앞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용두를 비롯 대웅전 안팎은 그 반야용선의 의미를 담은 무수한 상징들의 집합체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 상징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 대웅전 중앙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용龍
대웅전 계단 소맷돌에 용두가 있다. 머리를 곧추세우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모습은 반야용선의 뱃머리를 상징한단다.
대웅전 앞쪽 축대의 양 모서리에도 돌로 새긴 자라와 토끼, 게 등이 있다. 불전 주변의 공간이 바닷속 불국정토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 대웅전을 받치는 축대 여기저기에 거북, 게, 용들을 새겨 대웅전을 반야용선에 비유하고 있다
▲ 석등을 지고 입을 벌려 웃고 있는 거북의 표정이 천진스럽다
생색 낼 생각도 엄살부릴 생각도 전혀 없는 듯한 어수룩한 그 얼굴이 정답다. 등이 조그맣고 동그래서 더 마음에 앵기는 거북이다.
▲ 대웅전 중앙불단의 뒷벽 수월백의관음 빛바랜 단청이 더 애잔하고 고운 대웅전 안에 들면 아름답기로 이름난 후불탱화(보물 제578호)와 수월관음도,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닫집 등이 또 기다리고 있다. 꽃이 사방으로 뻗은 천장도 아름답다. 불심 없는 마음에도 환희심이 일어날 만 하다.
새로 매단 연등들이 그 천장의 아름다움을 대부분 가리고 있어 아쉬움이 크긴 하다.
*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는 원통전 *
(5)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는 원통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은 건축형태의 독특함으로 눈길을 모은다. 건물이 T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돌출된 지붕아래 기둥이 도열해 있다.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圓通’이란 말이 아름답다.
원통전은 중심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왼쪽 편에 있다. <여수여천향토지>에 의하면 "원통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흥국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지리산에 살던 한 이름난 목수가 흥국사를 찾아와보니 이미 다른 곳에서 목수가 와서 일을 맡아버렸으므로 하도 원통해서 원통전을 지어 그 솜씨를 자랑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 원통전의 관세음보살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을 모신 것은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란 설도 있다.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자고 하는 것이 보살, 특히 관음보살의 원력이므로 왜란 등 전쟁의 와중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의 실천으로서 이곳 의승수군(義僧水軍)들의 호국신앙으로 적절하였을 것이란 풀이다.
柱礎圖 : 기둥은 우주 8개, 평주 22개, 내부고주 2개
원통전은 사방이 회랑식의 퇴칸으로 이루어져, 중앙법당을 마치 탑돌이 하듯 돌면서 기도 하도록 배려되었는데, 이와 같은 건축양식은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구조이다. 건물의 연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으나 1700년대 초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안 관음탱화는, 대나무가 자라는 따뜻한 바닷가 바위에 매우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내부가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 옷의 곡선은 고려불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임진왜란땐 ‘의승수군(義僧水軍)’ 중심지 '의승수군(義僧水軍)'들의 유물전시관도 절 안에 있다. 흥국사는 그 이름처럼 나라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관련 깊은 절이다. 사적기에 적힌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택지를 택해서 가람을 창설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이 흥할 것이다" 등의 글은 절과 나라가 공동체로 여긴 흥국사의 창건 배경을 명확히 드러냈다.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하고 나라가 망하면 절도 망한다는 뜻을 담은 ‘興國’이란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 흥국사는 호국사찰. 고려시대인 1195년(명종 25년)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뜻을 담아 세웠다. 무신정권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사회기강과 그러한 세속의 흐름에 바른 길을 제시 못하는 불교계에 대한 반성을 담은 수행실천운동인 정혜결사를 떠올려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흥국사의 탄생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 유물전시관에 있는 의승군 활약도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흥국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승군은 수군, 곧 해군이었다는 점이다. 영취산 너머 여수에 있던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전라좌수영이 호남 수군의 본령 역할을 했으므로, 흥국사의 의승수군의 전력이 어떠했을지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흥국사의 의승수군 활동은 절에서 발견되는 각종 상량문과 비문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흥국사에서 가보지 않으면 서운할 곳이 바로 해우소다. ‘남’ ‘여’라고 투박하게 씌인 나무문이 단촐하게 매달린 해우소다. 그 안에 쪼그려 앉으면 성근 창문살 사이로 바람 드나들고 나뭇잎 다 떨군 나무들 내다뵌다.
▲ 흥국사 감로수 보호각
▲ 감로수 보호각의 기둥을 보자 문득 개심사 범종루가 떠올랐다. 굽은 멋을 굴미(屈美)라 표현한다던가!
범종각(梵鐘閣)
▲ 법고를 떠받치고 있는 동물이 사자라고?
숨겨진 보물찾기 하듯 볼 것 많은 절이지만 새로 짓거나 새로 앉힌 것들이 옛것과 자연스레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 버성기는 구석도 눈에 띄는,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절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이 이룬 것과 오늘 우리들이 이뤄 가는 것들 사이의 단절 혹은 거리, 절 앞의 무지개다리 는 그 ‘이음’을 고민하라는 듯 하다.
|
▲ 2010년 가을 날의 흥국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