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춘천 교구청
춘천교구의 간추린 역사
1) 복음의 전래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에 의하면 최양업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인 최한기(崔漢驥)가 서울에서 살다가 신해박해를 피해 가솔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왔다고 한다. 이것이 강원도에 복음이 전래된 시초가 될 것이다. 이들은 홍천의 학익동(鶴翼洞)이나 횡성의 풍수원(豊水院)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황심(黃沁, 토마스)은 강원도 춘천 북산(北山)으로 피난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의하면 그의 일가가 춘천의 관청에 붙잡혔음을 밝히고 있다. 사료에 보이는 춘천의 북산은 수로(水路)로는 북한강의 중상류에 있으며, 육로로 접근하기에는 매우 험한 곳이어서 초기 신자들이 모여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또 이곳은 188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까지 여러 개의 공소가 있었다.
신유박해로 체포되었다가 강원도로 유배를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檢, 아오스딩)과 관계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강릉, 양양, 이천(伊川),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되었다.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를 도와 전국적으로 전교를 하였던 김기호(金起浩, 요한/춘천교구 제7대 교구장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는 그의 자전적인 글 『봉교자술(奉敎自述』에서 1876년 10월부터 다음해 2월 초까지 블랑 신부를 모시고, 강원도의 이천, 평강(平康), 춘천, 낭천(狼川-지금의 화천), 철원(鐵原)의 공소를 방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용인에 살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신유박해 직후에 순교자 유족 40여명을 이끌고 강원도로 왔다고 한다. 그 곳이 정확하게 강원도의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으나, 신태보가 순교자 유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와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들은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안전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이 사실은 교우촌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1815년 4월에는 김강이(金綱伊, 시몬)가 강원도 울진에서 잡혀 원주 감영(監營)에 갇혔다가 그해 11월 옥사한 이후, 1839년에는 강원도 회양(淮壤) 출신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서울에서 스스로 관아에 출두하여 문초를 받다가 순교하였다. 1840년에도 춘천에서 신자 9명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박 베드로, 심 스테파노, 박 발바라, 김 막달레나 등의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2) 본당의 설립과 확대
1884년에 작성된 파리외방전교회의 보고서는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강원도를 맡고 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드게트 신부는 이천을 중심으로 하여, 원산과 낭천 등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김기호(춘천교구 제7대 교구장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의 『봉교자술』에도 1876년경에 이천이 전교의 중요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8년경에는 ‘조선에 온지 얼마 안 되는 로베르(Robert, 金保錄)신부를 이천 교우들이 블랑신부에게 청하여 모셔갔다'고 서술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 신자가 많았으며, 또한 열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천은 행정구역은 강원도에 속하였지만 황해도와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며, 강원도 내륙으로는 영서지역인 낭천까지 아울렀다. 이천 본당은 1884년 4월경 섭골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신부는 드게트 신부였다. 이로써 이천 본당은 강원도 동북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이천 본당은 1887년 원산(元山) 본당을 분가하였으며, 1896년에 포내(浦內) 본당을 분가시켰다.
본격적으로 강원도 여러 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며, 1920년 9월 춘천(春川) 곰실에 ‘춘천 본당'이 설립된다. 춘천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부터 북산면(北山面)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흔적이 있다. 춘천의 또 다른 지역인 동내면(東內面)의 곰실에서는 엄주언(嚴周彦, 말딩)이 새롭게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후 열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공소 강당을 마련한 후, 풍수원의 정규하 신부와 서울 명동의 뮈텔 주교를 찾아가 사제 모시기를 간청하였다. 마침내 1920년 9월에 곰실 공소에 김유룡(金裕龍, 필립보)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풍수원 본당에서 분가하였다. 그러나 곰실이 시내에서 거리가 멀어 본당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을 비롯한 신자들은 어렵사리 마련한 기금으로 약사리(藥師里)에 땅을 사들여, 1928년에 성당을 옮겼다. 이 성당이 현재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기틀이 되었다.
1920년 경성대목구는 함경도의 일부지역을 분리하고 당초 서울에 진출하였던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여, 이에 덕원면속구(德原免屬區)가 설립되었다. 영동지역을 관할하던 안변 본당이 덕원면속구에 속하자, 경성대목구에서는 1921년 양양(襄陽) 도문(道文)의 싸리재 공소에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베드로)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최 신부는 양양으로 부임한 이후 싸리재가 협소하다고 생각하여, 현재 양양 본당이 자리하고 있는 양양 읍내의 서문리(西門里)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양양 본당은 영동 지역 교회의 모본당(母本堂)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최문식 신부가 부임한 직후 그 해 1921년 6월에 서품을 받은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신부가 보좌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뮈텔문서'에 의하면 이철연 신부는 그해 12월과 1922년 1월 사이에 강릉(江陵)의 금광리(金光里)공소로 옮겨 그곳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이철연 신부는 장래를 생각하여 주문진에 터를 마련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1923년 11월에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3년 5월 홍천 화촌면(花村面)의 송정(松亭)공소가 풍수원에서 본당으로 분가·설립되었으나 송정 역시 홍천 읍내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읍내로의 이전을 계획하였고, 13년 후인 1936년 3대 심재덕(沈載德, 마르코)신부 때 홍천 읍내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이처럼 강원도에는 1880년대에 이천 본당과 풍수원 본당이 설립된 이후 1920년대 초에 본당이 여럿 설립되면서 신앙생활이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본당설립기의 사제와 평신도들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전교한 덕분이었다.
[춘천교구 홈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