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탱고"
+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위치한 보카라는지저분한 항구로 몰려왔는데 주로 이탈리아 남부지방에서 이민온 저소득층 주민들이 공업지구에 접해 모여 사는 곳으로 보헤미안풍의 항만 노동자와 뱃사람들, 여인들이 삶에 지친 권태감과 고독감, 체념적인 인생관이 지배하는 배경속에서 무엇인가 강렬하게 호소해 오는 것 같은 느낌의 탱고가 태어났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 밀수꾼 등 헐벗은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춤의 기초가 된 것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춤 Candombe 였다. 역시 고향을 잃은 노예들은 자신들만이 춤추는 장소 “탐보” (혹자는 “탕고”라고 한다)'에 모여서 춤을 췄다.
원래 이 춤은 커플댄스가 아니었는데 유럽 청년들은 이 춤의 스텝을 남녀가 추는 커플댄스에 응용하였다. 거기에 평원의 남자들인 가우초들의 춤과 Milonga를 보태서 탱고라는 춤이 등장한 것이다.
(cf)가우초 : 원주민 인디오, 포르투갈의 탈영병, 도망친 노예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일종의 아르헨티나 유목민이다. 일설에 의하면 잡혀온 노예들 중 아프리카 드럼으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쇠사슬에 발이 묶여 있을 때 발을 굴러 친구들과 비밀리에 얘기를 나누던 것이 나중에 춤으로 발전해서, 이들이 가우초에 합류했을 때 Milonga라는 춤이 되었다는 것이다.
흥청거리는 칸티나스(이탈리아식 레스토랑)에 앉아서 페헤레(정어리)의 프라이를 안주로 포도주를 마시면서 반도네온의 흐느끼는 듯한 가락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평안해 보이는 이 동네의 이면에 숨어있는 멜랑코리한 울림을 알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태양이 서쪽 지평선에 사라진 후에 휴식시간이 온다. 콘훈토의 애드립이 흥에 겨워 햇빛에 그을은 투박한 손으로 늘씬한 여인들의 허리를 잡는 남자들
(cf)오르케스타 티피카 ; 탱고는 반도네온2대, 바이올린2대, 피아노1대, 베이스1대의 6명, 거기에 가수 1∼2명으로 편성된 스타일 (cf)콘훈토(Conjunto) : 소규모. 영어로는 Combo라는 뜻.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와 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했지만, 1910년경 "새벽(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피르포가 처음으로 반도네온을 등장시켰으며, 이 무렵부터 탱고가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되었다.
1952년의 LP 레코드의 발명과 59년의 스테레오의 등장은 탱고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오르케스타의 편성에 있어 비올라나 첼로도 추가되었고 이는 한층 넓이와 깊이를 더한 음으로 고전탱고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탱고는 한가닥 하소연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여인의 배신, 애인을 뺏어간 무정한 친구, 고향을 떠난 서글픔, 좌절하는 밤거리 여인의 울부짖음! 사랑을 잃은 슬픔과 그 고독을 절절이 드라마틱하게 노래하고 있고 그 본질이 가난한 민중의 마음을 대변한 것으로, 재즈에 있어서 블루스나 프랑스의 샹송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주상의 특색도 정열·낭만·비애를 테마로 한 것이 많다.
미국의 재즈처럼 근원·발생시기등이 명확치 않은 것은 탱고도 마찬가지다. 빈민사회에서 발생한 음악이기 때문에 문헌이나 자료가 거의 없는 편이며,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추측이나 역설에 의한 설명이 있을 뿐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과의 혼용의 산물이며 아르헨티나 탱고는 빈민층의 오락이었으므로 상류층의 멸시를 받았지만. 후일 유럽에서 퍼지고 파리에서 인기를 얻자, 갑자기 상류층들도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의 댄스스포츠 탱고는 유럽에서 변형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춤이 되었다.
+스페인 내지 유럽 계통의 무곡과 아프리카계 주민(니그로)의 민속음악이 혼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즉 19세기 전반에 쿠바에서 유행한 무곡으로, 2/4박자의 우아한 댄스 리듬을 갖는 Habanera가 탱고의 모체 혹은 그 원형이다.
쿠바수도 하바나의 사교계에서 유행되기 시작해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섬 전체에 유행한 이 매력적인 댄스가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출입하는 뱃사람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 오게된 것이 19세기 중엽이었다.
Habanera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술집에서는 "쿠바 무곡(Danza Cubana)"이라고도 불리워졌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지방색에 물들어 템포도 빠르고 멜로디도 아르헨티나 풍이 강한 "밀롱가(milonga)"라는 무곡으로 변해갔다. 밀롱가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무곡으로 성하게 된 것은 1860년에서 70년에 걸쳐서였다.
이와 같이 밀롱가에서 탱고가 탄생되었으나 발전의 단계에서 크게 영향을 준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Candomble의 리듬이었다.
(cf)Candomble : 흑인노예의 자손들이 멀리 정글 속의 주술적 의식을 전습한 것으로 생각되는 싱코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으로, 밀롱가가 이 칸돔블레의 영향을 받아 탱고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가 1875년경이라고 하니 탱고의 역사도 벌써 1백년이 넘는 셈이다.
또 한 가지 설은 Habanera와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즉 18세기 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거리에서 유행하던 무곡이 후일에 동남미의 Bolero와 하바네라의 영향을 받아 그 형태를 바꾸고, 다시 유럽계의 무곡인 "폴카"등의 리듬을 섞어서 탱고가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항구 도시로서, port가 변한 것이 "포르테"이며, 이 단어는 속어로 부에노스아이레스 토박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반 시민들은 포르테냐 음악으로 불린 탱고를 처음엔 음악으로서도 댄스곡으로서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세계의 구성원들이 모두 만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구역에서 금새 대중적인 춤이 되었다.
+ 다시 부활한 탱고
아르헨티나 탱고의 역사에서 60∼70년대는 "침묵의 시대"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파탄이 70년대에 들어 특히 심화되면서 악단은 우수한 연주가나 가수를 상시 고용하기가 어려워졌다.
탱고의 쇠퇴는 경제적 이유로 인한 우수 오케스트라의 해산, 분열, 여기에 대중의 음악적 기호의 변화 등으로 찾아왔다. 따라서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도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공연 등의 특별한 경우에만 연주되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결과 침체한 국내를 떠나 해외에서 연주하는 악단이 많아졌다.
한편 60∼70년대는 왕년의 거장들을 차례로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했다. 후안토·프란시스코 카나로… 그러나 탱고의 등불이 거기서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이다. 그는 탱고에 매우 독창적인 화음개념을 이끌어와 1959년에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4계"등 걸작을 만들어내면서 탱고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클래식 연주가들의 공연목록에 포함시켰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해마다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다. 이날은 명가수 카를로스가르델과 훌리오 데카로의 탄생일이다. 이 제정에는 탱고가 세계를 석권했던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과 부흥의 기대가 모아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0년에 탱고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서서히 올라 가기 시작했다. 군정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와 포틀랜드 전쟁의 후유증도 점차 사라져가고 다시 세계를 향한 진출이 시작된 것이다.
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탱고아르헨티노"의 성공적인 공연이 그 기세를 더했다. 일본에서 공연한 "탱고아르헨티노"는 유럽에서 미국·일본으로 탱고를 부활시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부두가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 탱고. 한때 보카에서조차 쇠퇴해 있었던 그 음악이 90년대 들어 영화 "여인의 향기" "트루라이즈" 를 통해 그 멋진 모습이 춤과 함께 대대적으로 부흥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