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10:9-10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 즉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순서에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신경이란, ‘굳게 믿고 지키려는 생각 혹은 신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신앙의 고백이지만, 동시에 전교회가 역사적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그중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믿음의 원조와 뿌리가 되는 사도들의 신앙고백(마 16:16, 베드로의 고백)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의한 핍박과 박해가 일어나자 세례 받았던 사람 중에 배교자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함부로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세례를 주기 전에 문답형의 질문으로 그들의 신앙을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답형의 신앙고백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고백형으로 발전되어서 자기 고백형의 신경을 외워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앙고백이 점차 보완되었는데, 그 보완된 내용을 세례식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예배 때에 함께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크게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성자 하나님(예수님)에 대한 고백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에는 Credo로 시작합니다. o는 1인칭 주어로 "나는 믿습니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신경은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cre는 심장(생명)이고, do는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참된 생명이 되기에 내 생명을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나는 믿습니다. 내 심장을 드립니다’라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피조물이고 죄인인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즉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인 동시에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는 것은 "나는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
1)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즉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주시는 안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알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순종하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같은 주인을 모시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자매의 관계 혹은 동역자의 관계가 됩니다. 즉 "우리"라는 공동체로 화목을 이루어가겠다는 고백입니다.
2)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성령님에 의해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는데, 그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희로애락을 그분은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할 때마다, 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는 마리아의 생애와 빌라도의 생애를 비교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기 몸을 통해 성탄이 있게 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정치와 인기에 대한 욕심과 사람들의 여론에 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마리아처럼 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빌라도처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이나 주위의 압력 때문에 진리와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습니다. 십자가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대신 받으신 것이고,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백하는 우리의 삶은 그분의 사랑에 반응하고 그 고통에 동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러주셨습니다.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4) 지옥에 내려가셨으며(He descended into hell)
새롭게 번역된 사도신경을 자세히 보면 “장사된 지”라는 부분 바로 뒤에 작은 글씨로 숫자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래 주를 보시면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공인된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갔으며’라는 내용이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 한글 번역은 그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육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영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부활하시어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상과 천하 그리고 지옥까지도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옥에 내려가시지 않으셨다면 지옥에는 예수님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9-10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고, 땅 위에 있는 자들이란 살아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란 지옥에 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모든 사람의 주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5)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사흘’이란 만 사흘 즉 72시간이 아니라 삼일 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시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란 시체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신이 되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시기에 어떤 상황, 어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께서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 함을 이 고백이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즉 "오른쪽"이란 동등한 권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란 ‘거기로부터 즉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 우편에서부터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은 자에게 심판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셈하는 결산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3.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
1)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공회란 공교회란 말로서 보편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지 담이 높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가 교통한다는 것은 함께 행동한다는 것, 모두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성도의 교통은 함께 사귀는 것 즉 교제를 의미합니다. 말씀, 기도, 봉사, 권면을 통해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소그룹에 속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일 예배만으로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회 모임 등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채움 받음으로 신앙의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비로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과 연합합니다. 또한 그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와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가능합니다. 즉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내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의 거울 앞에서만 나의 죄인 됨을 깨닫고,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께 나를 의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4)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몸의 부활은 본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몸이 아닌 본래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몸,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영원히 사는 것이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영생이라는 안경을 쓰지 않고 이 땅을 살면 이 땅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기에 자기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영생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6) 아멘
아멘은 "진실입니다.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동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믿음의 고백이 제 진심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믿는 바를 마음으로 확인하고, 입술로 시인함으로써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나눌 질문]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까?
2.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사도신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