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최수근
갑자기 복통이 왔다. 며칠간을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한 봄비가 초록 잎새에 스미고, 꽃들은 수줍은 듯 살며시 꽃망울을 터뜨린다. 939번 버스를 타고 가는 차창 밖 풍경은 봄날의 따스함 그대로인데, 나는 계속해서 복부에 통증을 느낀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한동안 폭음을 계속했던 탓이다. 돌이켜 보면 거의 두 달 이상을 술에 의존하다시피 하였다.
아내에게선 알콜 중독이란 말이 나왔다. 천성적으로 착한 아내는 내게 거의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최근 들어서는 감기몸살에 걸려있다.
회사에 도착해서 좀 더 참아볼까 하다가 이번 기회에 검사도 받아 볼 겸해서 조퇴를 하고 병원으로 갔다. 접수를 하고 조금 기다리니 내 이름을 호명한다. 의사는 내게 언제부터 아팠는지 묻는다. 최근 2,3일 동안 간헐적으로 복통이 왔다고 말한다. 술을 좀 많이 마셨다고 솔직히 말한다. 가족병력에 대해서도 묻기에 아버지가 간경화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주워들은 의학 상식을 동원해 간초음파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간초음파는 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검사로 검사결과 이상이 있으면 단계적으로 정밀검사를 한다고 말해주며 한 번 받아보기를 권한다.
초음파실로 들어가니 간호사가 반듯하게 누우라고 지시한다. 조금 있으니 이상스럽고 끈적끈적한 액체를 복부에 잔뜩 바른다. 잠시 후에 의사가 와서 그렇지 않아도 복부비만으로 배가 부풀어 오른 내게 자꾸만 배를 부풀리라고 주문 한다 그렇게 해서 이리저리 문지르고 하더니 십분 정도 지나 끝이 났다. 잠시 후 다시 문진실로 가니 젊은 여의사는 담담하게 간 속에 반경1.7센티 가량 혹이 있으며, 조금 더 큰 병원에서 CT를 한번 찍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웃으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아버님이 술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술을 많이 드시면 어떻게 하냐고.
3일분의 약을 처방받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의사의 마지막 말이 기억의 저편에서 오랫동안 봉인된 듯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내 무의식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취해있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 태어난 단어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가족들은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대구의 변두리에서 양계장을 하다가 그곳에 공단이 생기면서 우리 오남매는 학업을 위해 대구에 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양계장을 계속하기 위해 성주 선남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주말이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부모님이 계시는 양계장으로 가서 계란 수거 작업이나 닭똥치우기 등 일을 도와드리곤 하였다. 그때도 아버지는 항상 취해있었다. 가족들이 같이 모여 살지 않아 매일 같이 보는 모습이 아니어서 인지 술에 취해 구성지게 노래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약간의 멋스러움을 느끼게 까지 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자취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부모님 곁이 그립기도 해서 육 개월 정도를 선남에서 대구 서문시장 부근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통학을 하며 부모님과 잠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비포장으로 달리는 버스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매일 취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정서적으로 예민해진 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학기 초 중간고사 기간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날도 아버지는 취해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 같다.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 아버지 때문에 못살겠다고 ! 아버지 때문에 죽고 싶다고! ” 그렇게 소리 지르고 나니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집 앞 야산으로 도망쳐 버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의 수색작업으로 나는 오래지 않아 산에서 내려와야 했고 다음날 아버지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며 학교를 가야 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아버지는 취해있지 않았고 내 방에는 새 책상이 놓여있었다.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열흘 정도를 금주하셨다. 아마 아버지에겐 당신의 의지로 버틴 가장 오랜 금주기간이었을 것이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내 나이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가된다. 아직도 아버지의 내면 전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름 지을 수 없는 끝없는 상실감이 당신을 힘겨운 현실로 몰아가진 않았을까 상상해볼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것을 닮아간다고 한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애증의 존재인 아버지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불혹(不惑)을 지나고도 한참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볼 나이에 나는 아직도 미혹(迷惑)에 빠져 헤매고 있다. 오래된 습관의 무질서한 잿더미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피폐된 공간속에서 혹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을 것이다. 간에 혹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은 아버지가 내게 보내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너마저 나처럼 살지 말라는…. 어쩌면 아버지가 다시 내게 보내는 새로 산 책상일 것이다.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려본다. 다르게 살고 싶다. 어차피 삶이 내 몫으로 한정된 유한한 것이라면 다르게 산다는 건 또 다른 삶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