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거펠드 2009년 가을 겨울 패션컬렉션 런웨이 1부
칼 라거펠드 2009년 가을 겨울 패션컬렉션 런웨이 2부
칼 라거펠드(Karl Lagerfeld)의 스타일은 사브르처럼 화려하다. 비록 그가 패션의 영원한 왕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는 현재 패션의 황제이다. 푸른 선글라스를 자주 쓰고 다니는 사교계의 명사인 앤 슬레이터는 칼 라거펠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은 2만 5천 마리의 터키산 코끼리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매력 있으며 강합니다. 나는 그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압도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배우 린제이 로한은 칼 라거펠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은 천재입니다!"
"나는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 나는 패션가게로 들어가서 그의 제품을 움켜잡기를 원합니다."
보그의 패션 편집자인 에이미 새코는 칼 라거펠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은 나를 수줍게 만드는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나는 시대의 발전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나이대의 사람들만 아니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내 인생에서 유일한 야심이 있다면, 그것은 28사이즈의 바지를 입는 것이다."라고 칼 라거펠드는 말한다.
패션의 세계를 그가 다스리기 전에 칼 라거펠드는, 어린 왕자였다. 그는 독일 우유 사업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덴마크 국경 근처의 12,000에이커 가량의 개인 사유지에서 자라났다. 그가 4살 때 그는 그 자신의 시종을 갖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매일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으며 그들의 재산도 무사히 남아 있었다. 칼 라거펠드는 그가 전쟁이 일어났던 순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에 모든 순간에 햇빛과 무지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유별나고 별난 스승인 동시에 유별나고 별난 악당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에게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겨우 6살이야. 그런데 나는 6살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근시였음에도 그가 안경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이 점에 대해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모습이야."
그가 10대가 되었을 때, 그가 담배를 피려 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꾸짖었다, 이 점에 대해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네가 담배를 피운다면, 너는 네 손을 나에게 보여주어야 해." 그의 어머니의 사려 분별이 있는 말들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동성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동성애는 단지 머리색깔과 같은 거야, 몇몇 사람은 검은색이고 몇몇 사람은 금발이지, 알게 뭐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사려 분별이 있는 말들에 의해 칼 라거펠드는 자존심을 가지게 되었다.
칼 라거펠드 테디베어
세련된 검은 옷과 빳빳한 와이셔츠의 깃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 테디베어는 유명한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드를 디자인한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봉제완구 브랜드 슈타이프는, 칼 라거펠드를 디자인한 곰인형을 한정판으로 생산하였다. 이 유쾌한 인형을 보며 칼 라거펠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나는 어린시절 어떠한 장난감과도 가지고 놀지 않았다. 나는 오직 자라나기만을 바랬다."
칼 라거펠드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1933년 9월 10일에 태어난 패션디자이너이다. 비록 그 자신은 그가 1938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태어난 고향의 세례 기록에 따르자면 그가 1933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예술가는 프랑스의 파리에 그의 인생의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패션계에서 다양하게 여러 공동 작업으로 일하고 있으며 그는 샤넬의 수석 패션디자이너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칼 라거펠드의 최초의 이름은 칼 라거펠트였으나 이후에 그는 그의 이름을 조금 더 부드럽고 부르기 쉬운 이름인 칼 라거펠드로 바꾸었다.
칼 라거펠드는 1953년에 프랑스 파리로 그의 인생의 기반을 옮겼다. 처음으로 그는 패션업체를 위한 도안가로 일하게 되었다. 칼 라거펠드는 1962년에 장 파투를 떠난 뒤로는 자유계약 패션디자이너로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 파리에 그의 작은 패션가게를 세웠다. 이 때에, 그는 크리스챤 디올의 터키식 점쟁이였던 제레아키안 부인과 종종 상담하였다.
그녀는 칼 라거펠드가 패션과 향수에 관한 분야에서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가 1973년 봄에 보여주었던 클로에 컬렉션은 "수준 높은 패션"으로 평가받으며 큰 이슈를 끌었다. 그는 이 클로에 컬렉션에서 느슨한 짧은 재킷과 실크 셔츠 재킷을 보여주었다.
칼 라거펠드는 1970년대에 연극무대를 위한 의상 디자이너로서 일하였다. 그는 2004년에 리인벤션 투어를 떠나는 세계적인 음악예술가 마돈나를 위한 의상을 디자인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카일리 미노그의 쇼걸 투어를 위한 의상을 디자인하였다. 칼 라거펠드는 세계적인 스웨덴 패션브랜드 H&M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2004년 11월 12일에, H&M은 칼 라거펠드에게 남성과 여성 모두가 선택할 수 있는 아울렛으로서 한정된 범위 내에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H&M은 칼 라거펠드의 옷을 아울렛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면서 겨우 이틀만에 그가 디자인한 모든 옷을 팔아버렸음을 발표하였다.
칼 라거펠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유일한 야심은 28사이즈의 바지를 입는 것이다." 패션은 그를 위한 훌륭한 직업이었다. 이브 생 로랑의 이전의 비지니스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게는 칼 라거펠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 라거펠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는 용병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칼 라거펠드는 어린 시절부터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단지 4살 때 그는 매일매일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기를 원했기 때문에 시종을 요구했다.
칼 라거펠트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 소년에게 그가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기를 원한다면 너 스스로 책을 읽는 법을 배워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 스스로 책을 읽게 되었으며 그는 주로 역사적인 인물들의 전기를 열렬히 읽는 열성으로 가득찬 독서가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의 뛰어나며 별난 교육방식은, 아마도 그의 비범한 재능에 영향을 끼쳤다. 그가 그의 어머니에게 정원에 있는 작은 연못에 왜 널빤지가 떠돌아다니는지 질문하였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그 널빤지는 만일 금붕어가 산책하러 가고 싶을 때 거닐기 위한 곳이란다."
2년 후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함부르크를 떠나 파리로 가고 싶다고 말하였고, 칼 라거펠드는 국제 양모 사무국으로부터 상을 수상하였다.
비록 그에게 전위파 패션디자이너인 제레미 스콧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있지만, 칼 라거펠드는 그의 가까운 친구인 자크 드 바스셰어가 1989년에 죽은 이래로 그는 독신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중복될 수 없는 관계와 같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저쪽 너머의 어떤 것이다."
아마도 그의 말은 그의 터키식 점쟁이가 그가 50세 때 말하였던 말을 의미한다. "당신은 가정생활과 성생활, 그리고 직업 사이에서 선택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양쪽 모두 선택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패션계의 아이콘, 칼 라거펠드는 최근 두바이의 업체 두바이 인피너티 홀딩스(Dubai Infinity Holdings)와 독점적인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칼 라거펠드는 패션디자이너이자 패션사진작가이기도 하며 그는 동시에 책을 출판하기도 하며 프랑스 파리에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샤넬의 유명한 패션디자이너인 칼 라거펠드는 식이요법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유럽과 아시아에 20만부 가량 팔렸다. 칼 라거펠드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계엄령에 따라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군대를 이끄는 대장이다. 당신은 그에게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그에게 괴로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과 여성 모두 젊고 날씬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칼 라거펠드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외양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혼에 흥미를 느끼게 만든다."
"샤넬은 나의 어머니와 같다." 연간 4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패션회사 샤넬을 그는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
칼 라거펠드는 패션디자이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패션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패션 무크지인 비저네어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2005년에 V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할 머라이어 캐리의 사진을 그 스스로 찍었다. 그가 찍은 사진 시리즈는 2005년에 상징적 샤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프랑스 사실주의 시리즈 중 하나였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샤넬 2005년 가을 겨울 패션컬렉션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2006년 가을에 미국의 케이블TV 채널인 선댄스 채널에 선보이기도 했다.
"나는 항상 자유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그는 말한다.
"나는 사업가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특별한 회의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마케팅을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의 방식대로 일한다. 내가 하는 일이 자유의 모조품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완전한 자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의 본질이 나의 최고의 사치이다."
앤디 워홀과 칼 라거펠드, 그리고 앙드레 김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칼 라거펠드님은 1933년생이십니다~ 칼 라거펠드 가을 겨울 패션컬렉션에서 사샤 피보바로바 환상적인 여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네요. 첫 타자로 보낸 데는 이유가 있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완성시키고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은 참 보기 좋습니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젊어지고 성숙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하얀 머리를 굳이 염색하지 않아도 그대로 스타일리쉬하게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으로 살려내시는 스타일리쉬한 어르신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