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金山, (1898 ~ 1984)】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 만세시위 참여"
1898년 10월 11일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 종성면(鍾城面) 금산동(錦山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김종욱(金宗昱·金鍾郁)이 있다. 1919년 당시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선천면 천북동(川北洞)에 있는 신성학교(信聖學校)에 다니고 있었다.
신성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설립한 학교로 선천군에서 제일 먼저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리던 3월 1일 낮 1시에 신성학교의 종도 울렸다.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교 학생 150여 명이 교문 밖으로 나가 행진하며 주민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학생들 60여 명도 합류하였다. 학생들이 남교회와 북교회를 거쳐 선천면 중심지로 나가는 동안 주민들이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천남동(川南洞) 시장에 이르렀을 때는 시위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본격적인 시가행진이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선천군청과 선천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시가를 돌았다. 이때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대와 함께 출동하여 발포하면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시위대가 해산한 후에도 신성학교 기숙사, 교직원 사택, 교회 목사관 등을 수색하여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을 검거하였다. 이날 신성학교 학생으로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1919년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자 상고하였다. 고등법원에 제출한 상고 이유서에서 ‘일본은 말로는 합방이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타이완의 원주민과 같이 대우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선언한 것은 2천만 민족의 생존을 위함이며, 나아가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자신이 만세를 부른 것은 보안법에 저촉되지 않으니 마땅히 무죄라고 항변하였다.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1919년 10월 6일 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1920년 11월 26일에 다시 체포되어 잔여 형기를 치른 뒤 1920년 12월 6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난징유학생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귀국하여 1927년부터는 마산교회(馬山敎會)에서 목회 일을 보면서 서울, 사리원 등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 등을 다니며 명설교와 명연설로 이름을 날렸다.
1945년 이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어 여러 번의 고배를 마셨으며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