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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
아내가 있었기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바로 나의 아내이다. 내가 아내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나는 2학년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의 12층과 6층에 각기 살고 있었지만 서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몇 번 얼굴만 마주쳤었다.
학력고사를 치고 우리집은 이사를 했고 이사 가는 날 6층 창가에서 이사가는 우리집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하얀 목련꽃 같은 아내의 모습을 나는 대학생활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나의 졸업 페스티벌의 파트너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아내는 겨우 대학 1학년이었다.
졸업 후 나는 춘천에서 군생활을 하였고 우리는 주말 연인이 되어 대구와 춘천을 오가며 서로의 사랑을 키워가며 나의 제대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군생활이 다 그렇듯이 어느듯 제대를 하고 여기 저기 입사시험을 치고 합격한 회사 중 대구와 가장 가까운 창원에 직장을 구하였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주말 연인이 되었고 이제는 결혼계획을 세우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를 시샘해서인지 거침없는 삶을 살아온 내가 너무 자만해서인지 결혼 날을 받으려고 하던 때 나는 직장생활의 사소한 부주의로 내 삶의 모습을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도 슬픈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119가 오래되지 않아 도착하였고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산재병원인 창원병원으로 이송되어 여러장의 X-ray를 찍었다. 그러나 의사는 어디 다친지 모르겠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 해서 경북대학병원으로 이송을 가게 되었다. 창원에서 대구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나는 얼마 다친 것 같지 않았는데 일을 너무 크게 벌리는 것 같아 회사와 앰브란스에 동승한 동기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여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부모님이 오시고 다음 날에는 대구에 살고 계시는 친척들까지 찾아오시고 당시에 직장을 다니던 아내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등산을 즐겼던 다치기 전▶ 사랑하는 아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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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곳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해서 가족들은 죽더라도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이나 한번 받아 보자고 주장해서 대구로 온 다음 날 나는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이때까지 나는 쇼크상태였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다가 응급실에 들어가서야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들자마자 내가 의사에게 제일 먼저 물은 말이 "나 장가갈수 있냐"는 것이였다. 그만큼 나는 아내를 사랑했고 또 책임지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싶었었다. 하지만 의사는 냉정했다. "당신은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지 못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한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곳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었다. 내 머리에는 머리 양쪽을 뚫어 추를 매달아 놓은 상태였고 이때 나는 내가 경추 6,7번 골절과 이로 인한 척수손상을 입어 사지마비 상태가 되었다는 것과 현재의학으로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평생 누워서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가야 한다는 믿기 힘든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열흘 뒤 상태가 조금 나아진 나는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내 몸 상태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 손가락만 까딱거릴 정도였다. 그 해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었고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를 욕창 때문에 2시간마다 자세변경을 해주느라 잠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내의 핼쓱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 오기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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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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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집 떠나 서울까지 와서 아버님과 같이 간병하는 것도 힘든 일일텐데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대소변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웃는 얼굴로 처리해 주었고 나는 숨어있던 아내의 잠재력에 무척이나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었다.
한 달이 지나 수술을 하고 나는 겨우 휠체어를 탈 수 있었고 아내는 이것만해도 감사하다며 신이 나서 휠체어를 탄 나를 병원 이곳 저곳을 밀고 다니며 그동안 변한 바깥세상을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으로 옮겨 재활치료를 받게되었다. 이곳으로 오면 무엇인가 달라질 줄 알았던 나는 별다른 치료방법과 차도가 없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아내가 몇 일 쉬러 대구에 내려가 있을 때는 이렇게 살아야하는 내 자신이 수치스러워 자살도 생각해 보았지만 혼자 힘으로 죽지도 못하는 내 신세가 처량해 밤새워 소리 죽여 울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몸 상태가 조금이나마 좋아질까 싶어 차디찬 병실바닥에 새우잠을 자며 행여 내가 마음의 상처라도 받을까봐 힘들어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늘 미소만 짓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아!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나는 퇴원을 결심했다. 퇴원을 결심한 후 나는 열심히 물리치료와 재활운동을 했다. 힘들고 아플 땐 내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아내만을 생각했다.
약 1년의 병원생활을 뒤로하고 퇴원 할 때 나의 기분은 착잡하고 참담하기만 했다. 예전의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은 나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모든 생활을 남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나약한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퇴원 후 신변 정리를 대충하고 그 해가 지나고 겨울이 긴 잠에서 깨어날 무렵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아내와 혼인신고만 하고 오붓한 둘만의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사를 하고 우리는 오래간만에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여행도 다니고 평소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한 곳들을 가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휠체어 탁구를 알게되어, 망설이다가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며 한 번 해보라는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로 탁구장으로 찾아가 열심히 배웠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거의 매일 탁구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하여 운동도 하고 나와 비슷한 상태의 많은 사람들도 사귀게 되었다. 운동을 한다고 바쁘게 다니는 중에도 나는 늘 마음속에 아내에게 미안한 점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결혼식이었고 또 하나는 자녀 문제였다.
아내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모습을 아내는 나에게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부러워하는 것 같았고 집안에 일이 있어 친척들이 모였을 때도 아내는 식을 올리지 않아서인지 친척들도 잘 모르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내를 볼 때 이젠 내가 아내에게 뭔가를 해줘야 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를 입기 전에 나는 가수 '신해철'의 '인형의 기사'라는 노래를 좋아했었는데 이 노래의 노랫말 중에 '눈 부시도록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라는 대목이 있었고 나는 늘 나의 신부를 꼭 그렇게 해주고 싶었었다. 노랫말처럼 97년 5월의 푸르른 날에 우리는 양가부모님과 친지들,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을 갖고 싶은 마음은 아내와 나 둘 다 간절했지만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과 아기를 갖는 시술을 하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아내와 나는 알기에 서로의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서로 회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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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딸의 어린 모습 ◀◀ 지금의 두 딸 모습 |
그러던 어느날 근처에 사는 처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방신문에 불임에 대한 칼럼을 쓰는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한번 가보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몇 일 망설이다 그 병원을 찾아가 시술을 하게되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연달아 2번이나 실패를 하였다. 그때마다 실망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가 너무 안되어 보여 아기를 가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 팔자에 자식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며 서로를 위로하며 또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팔자에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먼저 실패한 기억이 어느 정도 가신 1년 뒤 아내를 설득해서 마지막 딱 1번만 더 해보자며 찾은 병원에서 아내는 쌍둥이를 가지게 되었다.
다음 해 7월 두 딸아이가 태어났다. 채원이와 채림이라고 아내가 이름을 지었다. 두 아이 다 건강했다. 쌍둥이라 혹시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수술실에서 나오는데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딸아이들을 볼 때 주책스럽게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고마웠고 반가웠다.
나는 누구나 다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의 대가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장애를 입기전에는 사회에서 자칭 엘리트로서 모든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했었고, 장애를 입은 후에는 내 나름대로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도 했지만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용기를 북돋워준 아내가 있어 함께 노력한 결과 나의 사회적 위치를 찾고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를 입은 것에 연연하기보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의 모습이 더욱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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