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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생전의 이자익 목사.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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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익 총회장의 겸손, '나는 마부였습니다'
근래에 어느 종교 지도자들의 도박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비판이 물끓듯 한다. 돈을 잘못 관리하고, 행실이 부도덕하며, 정치적인 파벌과 갈등 깊다는 이야기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도 자신의 부끄러운 일들을 각성해야 할 타산지석의 경고라 생각한다.
이자익(1879-1958. 12.)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던 총회가 1924년 9월13일,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모였다. 직전 회장인 함태영 목사 진행으로 총회장 선거를 했는데 총대 196명 가운데 이자익 목사가 과반 표를 얻어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통상 예로하면 지난 회기 부총회장이 다음 총회장에 당선 되었는데 이런 경우는 이변이었다. 이 목사는 대형 교회 목회자도 아닌 농촌교회 담임이었고, 정치적인 수완이 있는 그런 인물도 아니었던 것이다.
총회에 참석한 회원 가운데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남장로교 전주선교부의 테이트(L. B. Tate,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였다. 그가 전주에서 금산으로 다니면서 금산 지주요 부자인 조덕삼과 그 집 마부로 살던 이자익에게 전도해서 그 두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테이트 선교사가 금산교회 설립교인인 조덕삼과 이자익에게 한 날 한 시에 세례를 베풀고, 또 한 날 한 시에 집사와 영수로 임명하고, 이자익을 금사교회 초대 장로로 세웠다.
또 그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으니 이자익 총회장은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 열매였던 것이다. 그는 “이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된 일은 제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고 감격하며 미국 선교부에 이 소식을 알리겠다고 하였다.
이자익 목사의 설교
- 머슴 출신의 3선 총회장, 한국교회를 바로 세운 최고의 법통 -
1. 인간 이자익 목사
이자익 목사는 1879년 7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가난하고 배고픈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육지로 올라와 전라북도 김제에 이르러 지주 조덕삼의 집에 마부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17세의 일이었다. 이자익의 인간성은 성실, 근면, 충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의 성실성은 주인 조덕삼의 눈에 들게 되었고 집안의 많은 하인들이 있었지만 조덕삼은 이자익을 총애하였다. 이자익은 또한 근면한 사람이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장남인 조영호가 공부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고, 한문과 한글을 깨우쳐 오늘날 일기를 비롯한 성경공부집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자익은 충성스런 사람이었다. 주인이 예수를 믿자 그는 주인이 믿는 예수를 같이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제2의 주인 격인 테이트(Lews Boyd Tate, 최의덕) 선교사 곁에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였다. 이자익은 지주 조덕삼으로부터 사람을 대하는 인격과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테이트 선교사로부터는 법과 원칙에 의하여 교회 조직을 다스리는 행정과 정치를 배웠다. 이는 모두 이자익의 성실과 근면과 충성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2. 신앙인으로서의 이자익 목사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과 같은 날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다.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시작된 교회에서의 제일가는 일꾼은 이자익이었다. 1905년 10월 11일 현재 김제금산교회의 전신인 두정리교회에서는 테이트 선교사가 학습문답을 실시하였고, 문답을 받은 5명 중 3명만 합격하였는데 조덕삼, 이자익, 박화서 3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6개월 후인 1906년 5월 마지막 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6년 6월 30일에는 위의 세 사람이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 세 사람 중 조덕삼과 이자익은 1907년 1월에 교회의 모든 살림과 행정을 맡아 일하는 영수로 임명받았다. 영수는 목사나 장로가 없는 교회에서 당시에 설교까지 맡아서 해야 하는 중요 직책이었다. 이는 수 십 명의 교인들 중에서 이자익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1907년 여름 금산교회는 테이트 선교사의 사회로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투표를 하였다. 모두들 조덕삼 영수의 피택을 생각하였으나 결과는 이자익이 장로로 먼저 피택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아무런 풍파가 없었다. 이는 먼저 조덕삼 영수의 훌륭한 신앙과 인격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을 장로로 세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당시에 장로는 설교도 하였는데 지주인 조덕삼 영수가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덕삼 영수는 그 후에도 과수원 땅을 교회에 헌납하고 돈을 들여서 지금의 기역자(ㄱ) 예배당을 짓도록 헌신하였으니, 이는 그의 마음에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이자익을 택한 교회 교인이나 테이트 선교사에 대한 조금의 서운함도 없었다는 증거이다. 이자익은 1908년에 장로 장립을 받은 후에도 주인에게 절대로 교만하지 않았고,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여 예전보다 더 충성하며 섬겼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항존직 선거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 세상의 벼슬자리도 아닌데 되려는 욕심에 서로 싸우고 험담하고 선거운동하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는 개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노회나 총회의 임원과 각 부서의 자리다툼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3. 농촌 목회자로 전국교회를 설교하다
조덕삼 영수는 1910년 봄에 장로로 피택되어 그해 10월에 장립을 받았다. 먼저 장로가 된 이자익 장로가 조덕삼 영수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장립식을 빨리 서둘렀고 조덕삼 장로의 장립식을 자신의 것보다 더욱 성대하게 치르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이자익 장로는 1910년 주인 조덕삼이 장로로 피택 된 후에 테이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신학 수업은 지금과 달라서 매년 3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3개월 반만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나머지 8개월 반은 소속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실습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자익은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요즘 식으로 특별전형에 의하여 입학하였는데, 이렇게 입학한 사람은 5년간의 과정을 마쳐야 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이자익이 신학생으로 공부할 때 3월부터 6월 중순까지만 자신이 설교를 맡았고, 나머지 기간에 이자익 장로가 교회에 내려와 있을 때는 설교를 그에게 모두 맡기곤 하였다.
이자익 장로는 신학교 시절 평양의 유명한 교회는 모두 방문하였고, 목회자로서 경험과 실력을 쌓아갔다. 1915년 6월 이자익은 장로회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15일 금산교회의 청빙으로 제5회 전라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이는 조덕삼 장로의 은혜에 대한 이자익 목사의 보답이었고, 이후 평생 조덕삼 장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시골 교회 목사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이자익 목사는 1924년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열린 제13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이 되었다. 그의 총회장 당선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으로 당선된 그 교회당에서 자정이 될 때까지 기도하였다고 하니 오늘날 총회장 당선의 풍경과는 다른 감동적인 모습이다. 그는 다음날인 주일에 1000명이 모이는 신창리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후에 그는 총회장으로서 여러 유명한 교회 강단에 서고 교계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으나 금산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는 조덕삼 장로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명예에 욕심을 품지 않은 결과였다.
이자익 목사는 일제를 거치는 동안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1938년 총회가 신사참배 결의를 강행할 때는 아예 총대를 사양하고 총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자익 목사는 1925년부터 36년까지 호주선교부의 권유에 의하여 거창선교기지의 순회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약 20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았다. 목사가 귀하던 시절 그는 평안한 목회지를 두고 일제의 박해 속에서도 농촌 오지의 교회를 돌보며 설교하고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4. 설교한대로 살고, 말씀 중심으로 치리한 최고의 법통
이자익 목사는 제13회 총회장뿐만 아니라 해방 후 1947년 제33회와 1948년 제34회 총회장을 연이어 역임하였다. 이른바 3선 총회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세계 다른 나라의 기독교 역사에도 없는 일이다. 이자익 목사의 3선 총회장 경력은 우선 신사참배 없이 일제를 지낸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뛰어난 행정가였고 법과 원칙에 의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사심 없이 회의를 진행하였던 결과였다. 이자익 목사가 총회의 법통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13회 총회장으로 사회를 보던 1924년 총회에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통과시켰다.
“금후로는 총회 총대가 폐회 전에 특별한 사고가 있으면 허락을 받고 행동을 할 일이며,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경우는 여비를 지불하지 않기로 하며, 총회 허락 없이 조퇴하는 총대는 다시 노회에서 총대로 선출하지 않기로 동의가 가결하다.”(제13회 총회록 47쪽)
총회 총대들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엄격한 원칙을 적용한 결의였다. 이는 이자익 목사 외에는 아무도 결의할 수 없었던 단호한 조치였다. 이 결의가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총회는 첫날만 지나면 자리를 많이 비우는 나쁜 버릇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총회장도 없다.
이자익 목사는 세 번의 총회장뿐만 아니라 전북노회장(1919-20), 경남노회장(1927-29), 대전노회장(1952) 등 삼남의 모든 지역에서 노회장을 역임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이 또한 그의 뛰어난 행정력과 법과 원칙을 세우는 정치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건전한 법통의 정신으로 당시 시끄러웠던 마산 문창교회 사건을 해결하고, 6년간 분규로 몸살을 앓던 웅천교회(주기철 목사의 모교회)를 화해시키기도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해방 후 친구 목사인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자유당 내각의 입각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시골 목회자의 길을 지켰는데, 이 사실은 그의 행정력이 나라 살림을 맡을 만큼 대단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법과 원칙에 밝은 이자익 목사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는 개정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아 총회 헌법을 전면 개정하였고, 이는 오늘날 장로교 총회 헌법의 기초와 근간이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은 일제와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이자익 목사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법을 외치는 사람은 많으나 사리사욕에 치우치고 정치적 편가르기에 편승하여 중심에서 치우치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총회는 혼란스럽고 법과 원칙이 서지 못하여 고소와 고발 사건이 교회 밖의 법정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자익 목사의 역할이 그리워지는 때이다.
5. 교육을 통한 교회부흥을 실현한 설교자
이자익 목사는 대전신학교(現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를 세우게 된 동기는 조덕삼 장로의 영향이 컸다. 일찍이 조덕삼 장로는 1906년 금산교회 내에 유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가 을사늑약 바로 이듬해였는데, 조덕삼은 민족을 구하는 길이 교육에 있다고 믿었다. 유광학교에서는 한글과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매일 아침 예배를 드렸다. 후에 일제의 박해가 시작되고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조덕삼 장로의 아들로 학교장을 맡고 있던 조영호 집사는 일제에 맞서 아예 학교를 자진 폐교시키고 말았다. 이자익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교육에 대한 의지는 조덕삼 장로와 그 아들 조영호 교장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학교에서의 교육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도 한 몫을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1954년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바로 교장직을 사퇴하고 원래의 목회지였던 전북 원평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1958년 10월 7일 소천하였고, 9일에 대전노회장(葬)으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6. 이자익 목사가 필요한 오늘의 한국교회
현재 한국교회는 이자익 목사가 활동했던 시대처럼 난세이고, 사회적 혼란과 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고조된 시대이다. 이 시대의 고민은 이자익 목사의 역할을 이어 받아야 할 인물의 부재에 있다. 이 시대는 그 옛날 이승만과 안창호를 잇는 정치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다. 사회적 민족적 문제에 대해서도 길선주, 이승훈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기독교 기관과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가하면 교회 부흥의 주역이 되어 김익두, 이성봉, 최권능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흥사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각 분야에 업적을 자랑하는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또 다른 면에서 인물을 원하고 있다. 바로 교회 현장에서의 바른 목회자 상(像)과, 교회의 질서와 법을 바르게 세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행정적으로 바르게 하여 개교회와 노회, 총회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 옛날 이자익 목사는 후배였던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이러한 면에서 한국교회를 위한 최고의 적임자로 쓰임을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고민은 이자익과 한경직을 이어받을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설교와 삶을 일치시켜 살아가는 정직하고 올곧은 법통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누구인가? 노회나 총회의 정치에서 법과 원칙을 소신 있게 세워나가는 존경받는 교회정치인은 누구인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인격자가 누구인가?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혼란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각 악기마다 뛰어난 연주자는 많은데 이를 모아 하나의 하모니로 조화시킬 수 있는 지휘자가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오늘날 꼭 필요한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향한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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