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胡志明)과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기일(忌日)엔 제사 지내
통치이념 ‘3꿍정신’은 목민심서 벤치마킹
지난 1월 중순 다산 정약용 선생의 7대손인 정건영(36)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 환경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 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정씨는 다산 선생과 같은 나주 정(丁)씨다. 정 소장은 2006년 한국 환경자원공사에서 베트남에 사무소를 연다는 계획을 듣고 자원했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의 국부(國父)인 고(故) 호찌민 주석이 생전에 다산의 목민심서를 탐독했고 피신할 때에도 늘 몸에 지녔으며 관 속에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호찌민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산을 꼽았으며 다산의 기일에 반드시 제사상을 올렸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만큼 정약용을 평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베트남과 아무 연고 없던 정 소장을 베트남으로 이끌었다.
호찌민 주석은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트레이드마크인 ‘3꿍 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트남이 한자문화권이고 호찌민의 젊은 시절만 해도 한학을 공부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산다(꿍아), 함께 먹는다(꿍안), 함께 일한다(꿍땀)의 세 가지 정신이 호찌민의 ‘3꿍 정신’이다. 호찌민은 ‘국민과 더불어 살고 함께 먹으며 같이 일한다.’는 3꿍 정신을 가지고 청빈한 삶을 살며 민본주의를 실현했다. 양국 학자들은 3꿍 정신의 민본주의가 지방관이 애민정신에 입각해 지방 행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목민심서의 민본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한다.

말년의 호찌민

다산 선생 영정

목민심서(牧民心書)
목민심서는 정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순조 때 천주교(天主敎) 박해로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책이다. 다산 선생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뽑은 자료를 모아 목민심서를 엮으며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고자 했다. 내용은 총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 한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은 목민관의 부임 길(부임), 목민관의 자기 수양(율기), 법과 도리에 기초한 공무 처리(봉공), 목민관의 백성 사랑(애민), 지방 행정의 실무(이·호·예·병·형·공전), 흉년의 백성 구제(진황), 물러나는 길(해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호찌민(胡志明·Ho Chi Minh·1890~1969)
본명은 웡떡탄(Nguyen Tat Thanh).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州)에서 농민 출신 문인학자(文人學者)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프랑스선(船)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구엔아이(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회의에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해 유명해졌다. 이후 혁명운동을 계속하며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했다.
1941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주도해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다. 이른바 ‘8월 혁명’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됐을 때부터 사용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969년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베트남 국민 다산에 관심 많아… 후손인 만큼 늘 행동 조심
정건영 한국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
한국 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베트남 환경상을 받았다.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호찌민 주석이 사숙(私淑)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다. 최근 정 소장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가 베트남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는데요.
“한국에서 ‘호찌민이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아 베트남에서도 다산 선생이 누구인지, 목민심서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얼마 전 호찌민박물관에서 호찌민의 유품에는 목민심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하노이국립대 교수들이 목민심서를 읽어보고 정부관리(목민관)로서의 애민정신과 청렴함을 강조한 다산 선생의 철학이 호찌민의 통치철학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목민심서가 베트남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가요.
“목민심서가 현재 베트남 공무원의 필독서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목민심서를 베트남어로 번역하고자 희망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자 문화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한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번역을 해야만 베트남 국민들이 읽을 수 있거든요. 요즘 베트남에서는 부패를 척결하자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공무원이 익혀야 할 덕목이 목민심서에 잘 나타나 있어 의미가 있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베트남인에게 호찌민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베트남 국민은 호찌민을 ‘호 아저씨’라고 불러요. 베트남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이 지향하는 사상에 상관없이 호찌민을 민족의 아버지로 여깁니다. 모든 화폐에 호찌민 그림만 그려져 있을 정도로 호찌민은 국민의 절대적인 우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호찌민이 탐독했다는 다산의 목민심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베트남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양국이 호찌민과 목민심서로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는다면 여러 모로 유익할 거라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라는 점을 주변 베트남인도 알고 있나요.
“(베트남의) 젊은 세대는 다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사상적인 측면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하면 호찌민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하며 공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산 선생의 후예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산 선생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학자인 다산 선생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아서요. 제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힘이 되기도 해서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도 바르게 행동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환경도 열심히 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