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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술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고 앞서간 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고, 둘째는 앞서간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고 그 분이 남기 신앙 정신과 그 유산을 본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 두 사람을 말한다면 주기철 목사(1897-1944)와 손양원(1902-1950)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보다 5살 후에 출생하신 분이 손양원 목사이지만 손 목사님은 주 목사님의 신앙정신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남 지방에는 특히 4분의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최상림(1888-1945) 주기철 이현속(1900-1945) 손양원 목사입니다. 최상림 목사의 신앙정신이 주기철 이현속 손양원에게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손양원은 경남성경학교에서 최상림 목사와 주기철 목사에게 배웠던 학도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손양원 목사는 1902년에 나시고 1950년에 순교하셨으므로 이 땅에서 사신 날은 48년에 불과합니다만 오늘 우리에게 고귀한 신자의 삶의 방식을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와 삶을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1940년 이전까지인데 배움의 길과 나환자들과 함께 지낸 목회기였고, 둘째는 우상숭배에 저항하며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있던 5년이었고(1940-1945), 셋째는 해방 이후 목회와 순교(1945-1950)가 그것입니다. 그 어느 측면을 보더라도 손 목사님에게는 오늘 우리시대의 소시민적 자기 보위적 삶의 행로와는 다른 영적 비범함이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정리해 두리고, 그의 삶의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 드리고자 합니다.
배움의 길
손양원 목사는 114년 전인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咸安軍 漆原面 九城里) 칠원교회의 손종일(孫宗一)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손종일은 1908년 입신하였으므로 손양원은 6살 때부터 부모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됩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913년 칠원 보통공립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5세 때인 1917년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호주 선교사 맹호은(孟虎恩, J. F. L. Macrae)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맹호은 선교사는 1910년 내한하여 호주장로교 마산지부에서 일하던 선교사였습니다. 1919년에는 서울로 가서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귀가하게 됩니다. 그러든 중 손양원은 마산의 창신학교에 편입하여 수학하고, 19세 대인 192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성결교회인 동양선교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 때 나카다 쥬지의 노방전도, 그리고 나환자들을 위한 급식과 전도활동을 보고 자신도 전도자로 몸 바칠 각오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년 남짓 일본에서 지낸 청년 손양원은 1923년 귀국하였고, 부모의 권유로 정양순(본명 정쾌조)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21세 때였습니다. 그리고는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경남노회 관할 하에 있었지만 호주 선교부가 운영하던 일종의 신학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에서 손양원은 최상림, 주기철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1925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감만동에 위치한 나환자 보호시설의 메켄지(Noble Mackenzie) 선교사 휘하의 전도사로 일하면서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양산읍교회, 원동교회 등을 순회하며, 밀양 수산교회 등을 개척하면서 순회 전도사로 봉사했습니다. 부산 나환자보호시설에서 일한 경험이 후일 애양원에서 사역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목회자의 길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935년 4월 5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능라도교회에서 봉사하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 그는 1938년 3월 16일 평양신학교 33회로 졸업했습니다. 그의 동기들이 후일 목사가 되는 강신명, 계일승, 김규당, 김양선 목사, 그리고 경남의 박군현, 박손혁, 배운환, 윤술용, 한정교 목사 등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남노회 부산지방 시찰회 순회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부산을 비롯하여 김해, 양산, 함안 등지를 순회하며 14개월간 활동했으나 무교회 관련 서적으로 성경을 가르친다는 이유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해임됩니다.
그러다가 1939년 7월 15일에는 여수 애양원(愛養院) 교회의 교역자로 부임하였습니다. 애양원이란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한 나환자 보호 및 치료기관이었는데 지역민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1925년 여수의 한적한 섬인 신풍으로 옮겨간 나환자 수용시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 가기를 기피했으나 그는 이들을 위해 전도자로 살기로 작정하고 이곳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신학교 재학 중 애양원교회서 집회를 인도한 일이 계기가 되어 목회자로 초빙 받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외부인은 환자들과의 접촉을 피했으나 손양원은 장갑도 끼지 않고 악수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는 등의 일로 신뢰를 받았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애양원의 ‘양원’을 따라 손양원(孫良原)으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칠원교회에 남아 있는 교적부에 보면 손연준과 손양원 두 이름이 병기되었음을 알 수 있고, 애양원에 부임한 이후 ‘양원’이란 이름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손양원은 ‘단지 나병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가족과 별거되어 고통 받은 이들을 위해 위로의 복음과 하늘의 소망을 전하는 은혜의 전령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흉측한 몰골의 나환자들에게 인간적 사랑을 쏟았고, 전염의 위험 때문에 감히 접근을 기피하는 이들과는 달리 중환자실에도 거침없이 출입하여 선교사들이 크게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도 그는 진실한 목자였습니다.
손양원은 전도사는 애양원에서 일하던 중인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일제는 1935년부터 신사(神社)참배를 강요하였는데,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하고 저항하였으나 탄압이 심화되자 점차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고, 1938년에는 한국교회의 최대 교파인 장로교회 마져도 신사참배를 공식 가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그것이 강압에 의한 불법적인 가결이라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반대의지는 약화되었고, 저항보다는 타협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보통 ‘신사불참배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북과 이남,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신사불참배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직화되자 일제는 1940년 일제검거란 이름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원 체포, 구속하기 시작하였는데 손양원도 이 때 체포되었습니다. 손양원은 개인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부흥집회를 통해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서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의 체포는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구금된 그는 곧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다시 청주 형무소로 이송되고 이감되었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곧 그의 가족은 애양원 사택에서 쫓겨났고, 적절한 거처가 없던 이들은 전전하던 끝에 부산 범일동 범내골 판자촌(현제 변전소 근처)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때 가족들은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이런 어려움 중에서도 손양원 목사의 부인은 부산 사상교회의 민영석 집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해 투옥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상의 민영석 집사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쌀 두서너 되, 토란 줄기, 갈치 말란 것 등을 나눠주는 사랑을 베풀었다는 증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자녀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해 학교를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했습니다. 그래도 살기 어려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동희와 동장은 1944년 초부터 해방이 오기까지 구포의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살게 됩니다.
순교의 길
만 5년간 투옥되었던 손양원은 해방과 함께 1945년 8월 17일 석방되었고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여 애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1946년 2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 제3기에 해당합니다.
해방 후 상황은 혼란했습니다.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48년 10월 19일에 있었던 ‘여순(麗順)반란사건’이었다. 여순사건이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당시 국방군) 제14연대를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급파하기로 했을 때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19일 저녁 8시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곧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순천을 휩쓴 뒤 곧 바로 광양·곡성·구례·벌교·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습니다. 해방 후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의 활동이 불법화되자 이들 세력은 지하활동으로 전환하여 폭동과 살인, 방화를 통해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고 소위 ‘혁명적 여건’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비록 반란은 일 주일만에 진압되었으나 많은 양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당시 좌익학생들은 기독교는 친미적이라 하여 크리스챤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했는데, 이 와중에서 손양원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살해되었습니다. 손목사의 투옥 때문에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던 이들은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각각 다니고 있었는데 반란이 일어난 다음날인 10월 21일, 좌익 학생들에 의해 피살된 것입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님은 부산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비통한 가운데 몇 일을 보내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로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됩니다. 그는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여수의 나덕환 목사를 통해 구명활동을 하여 즉결처분직전에 있던 그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손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답사를 하면서 아홉 가지 감사를 했는데 이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가정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하고... ”로 시작해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하게 하셨으니 감사하고,” “사랑하는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양자 삼고자 하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하고” 등은 극한 고통 중에서도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고자했던 손목사의 고뇌에 찬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참 신앙인이었기에 영결식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 선생은 아들 나이에 지나지 않았던 손양원 목사를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손양원은 애양원 교회에서 목회하는 한편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 반대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것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계승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 결과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뀌게 됩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을 권고 받았으나 손양원 목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교회도 지켜야하지만 병들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환자들을 두고 혼자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저 도망가면 누가 나환자들의 벗이 되겠느냐며 끝까지 나환자들의 벗이 되어 강단을 사수하던 그는 1950년 9월 20일 수요일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었고 28일 목요일 밤 순천으로 옮겨가던 중 미평(美坪)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 역시 순교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안위를 구하거나 유욕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길 원했고, 병든자와 함께 살며 하늘의 위로를 전하는 소박한 전도자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애양원교회의 가난한 목사였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다른 영적 고상함이 있었습니다.
손양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상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주님 바라보고 살았고,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자기 신념을 지키며 살았고, 종국에는 신념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6.25 동란이 일어나고 좌익이 전라도로 내려오자 그에게 피하려고 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억지로 뱃머리까지 데려갔으나 거절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 품”이라며 피난을 거부하여 결국 순교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둘째, 사랑을 실천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성 다미안(1840-1889)처럼 나환자들을 사랑했고, 아픈자와 함께 하는 사랑과 연민을 지닌 목회자였습니다. 일본인 전도자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호주의 메켄지(Noble Mackenzie, 1865-1956)의 영향이 없지 않으나 그에게는 육신의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동정(compassion)이란 함께 ‘괴로워한다’(suffering with)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에게는 아픔자와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사랑을 실천한 목회자였습니다.
셋째, 그는 회개와 자숙을 강조하며 순결한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손 목사님이 저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죄를 경계하고 회개를 신자의 삶의 일상으로 강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이 남아 있는 85편의 설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회개와 자숙이었습니다. 손 목사님이 잡히시던 날은 수요일이었고 그날 설교하려고 써 둔 선포되지 못한 설교문의 요지도 회개였습니다. 회개치 않는 것이 6.25 전쟁, 곧 민족상잔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회개와 자숙을 강조했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권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만이 참된 신이며 세상의 구주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싸웠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이런 신앙적 확신에서 천황의 현인신 됨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유였고, 국기배례 반대의 근거였습니다.
다섯째,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가르쳤고 원수까지 용서하는 용서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식을 죽인 이를 양자로 받아드린 일은 세계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백범 김구 선생은 이 사랑과 용서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이라고 썼습니다. 이 용서가 진정한 화해의 기초였습니다. 그래서 박형룡은 손양원 목사의 장례식에서 그에게 성자 칭호를 부여해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섯째,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기독교적 삶(christian life), 기독교적 가치, 그리고 기독교적 행동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정치나 군사력이나 폭력이나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처럼 기독교회가 비난 받는 현실에서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한 이교도가 기독교신자가 되고 세례받게 되었을 때 자기 휘하의 노예 1,250명에게 자유를 준 일은 커다란 충격이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위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용서, 화해는 기독교적가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양식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위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앞서간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분이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두 가지를 위해서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고 둘째는 믿음의 길을 가며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의 위력을 보여주신 손양원 목사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또한 복음의 위력을 시위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