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큰 하느님의 사랑
사람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참으로 유별난 존재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준 존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을 기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기른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들이 팽목항에 모여 바다를 향해 자식의 이름을 부를 때 단장지애(斷腸之哀)의 울부짖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 편에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고사가 있습니다. 촉나라의 마지막 숨통을 죄이고자 진나라 장수 환온(桓溫)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 병사 중 하나가 강변에서 놀고 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너무 귀여워하여 배에 태웠습니다. 그 원숭이 어미는 군사를 태운 함선을 100여 리를 쫓아오다 폭이 좁은 협곡에서 새끼를 태운 배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배에 이르러 새끼를 품어 안자마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한 병사가 그 어미의 배를 갈라보았더니 어미의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환온은 새끼를 납치한 병사를 매질하고 대열에서 쫓아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자식을 잃은 슬픔이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짐승도 그러할 진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처님의 <본생경(本生經)>에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품에 급히 쫓겨 들어온 비둘기를 쫓아온 독수리는 자기가 추적해온 비둘기를 내어달라고 하자 수행자는 비둘기에게 대신 그 무게에 해당하는 자기의 살을 떼어 주겠다고 제안하였답니다. 수행자는 허벅지 한 곁을 떼어도, 다른 허벅지를 떼어도 그 비둘기에 무게에 미치지 못하자 급기야 수행자는 자신의 온 살을 베어주기에 이르러 비둘기의 무게와 같아졌다고 합니다. 재물이 있거나, 없거나 권력자이건, 아니건 그 생명이 가진 가치는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없는 고귀하고 존귀하다는 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임을 일러주는 경문(經文)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수행자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말입니다.
어머니는 새끼를 잃어버리고 찾아나서는 원숭이나 독수리에게 비둘기를 대신해서 자신의 살을 떼어주는 수행자와 같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위대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셨고, 우리들이 그러했으며, 우리들의 자녀들이 바로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식에게 함부로 대하는 부모가 있고, 그런 뉴스가 있어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그것은 정말 아주 극소수의 사례이고 우리의 사회는 아직도 부모의 맹목적인 자식 사랑은 정말 못 말릴 지경입니다. 그것을 자식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아니 하여도 아무런 이유가 없이 사랑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길이며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육적이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의 그 사랑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사랑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차원에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먼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사람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언제나 뒷전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한 인간관계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인간관계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오늘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머니의 사랑과 수행자의 그것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훨씬 큰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데에는 아주 익숙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면서 사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갑시다.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큰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갑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4,21―15,1ㄴ
그 무렵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22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23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쫓아왔다.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24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
25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집트 병거들의 바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어, 병거를 몰기 어렵게 만드셨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피해 달아나자. 주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집트와 싸우신다.” 하고 말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여라.”
27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날이 새자 물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도망치던 이집트인들이 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 되었다.
31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15,1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축일7월 20일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 연도 : +304년경
같은 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리나,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중세 유럽 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중세의 대표적 성인전인 “황금 전설”(Golden Legend)에 따르면, 그녀는 안티오키아에서 살던 귀족 출신의 이교도 사제인 아이데시우스(Aedesius)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유모의 영향으로 성녀 마르가리타는 자라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은밀히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개인적으로 동정을 서원하며 일생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을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의심을 사서 추궁을 받자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는 곧 유모와 함께 집을 나와서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양을 치고 살며 오히려 자유롭고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 지방에 새로 부임한 지방 장관 올리브리우스(Olybrius)가 우연히 그녀를 보고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높은 지식에 반해 자기 아내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지방 장관의 요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을 안 지방 장관은 박해를 빌미로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그때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슬기롭게 답변했을 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죄목으로 투옥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지하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 무렵 그녀의 성덕을 증오하던 악마가 거대한 용으로 변신해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켰다고 한다. 그런데 성녀 마르가리타가 항상 품에 지니고 있던 커다란 십자가가 용의 목에 걸려 삼키지 못하고 결국은 토해내고 말았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바쳤고, 십자가로 용으로 변한 악마를 물리쳤다. 그 후로도 성녀 마르가리타는 많은 고문을 당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겨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용감한 신앙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각오를 마음에서부터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의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로마 순교록”은 성녀 마르가리타를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한 동정 순교자로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진주’라는 뜻을 지닌 성녀 마르가리타는 동방 교회에서 ‘위대한 순교자 성녀 마리나(Marina)’로 불리며 일찍부터 큰 공경을 받아왔다. 서방 교회에서도 그녀는 ‘14명의 구난(救難) 성인’ 중 한 명으로 또한 로마의 성녀 아녜스(Agnes, 1월 21일), 성녀 체칠리아(Caecilia, 11월 22일), 성녀 바르바라(Barbara, 12월 4일),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11월 25일) 등과 함께 대표적인 동정 순교자로서 중세 시대에 큰 공경을 받았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5월 30일)가 들은 신비한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이고, 순교의 순간에 아기를 낳는 여인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을 해서 임산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마르가리타는 십자가나 망치를 이용해 용으로 변한 악마를 무찌르거나 용의 목에 사슬을 걸고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축일7월 20일 성 엘리야 (Elijah)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9세기경BC
같은 이름 :앨리아, 엘리아스
성 엘리야(Elias)는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예언자이다. 히브리어 이름의 어원적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이다. 구약성서(1열왕 17-19장, 21장; 2열왕 1-2장)에서는 엘리야를 제자인 엘리사(Eliseus, 6월 14일)에 비해 비교적 덜 관대하게 소개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활동 시작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엘리사와는 달리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은 이야기도 전하지 않고 생애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대기(21,12)에서는 그의 활약을 아예 언급하지 않으면서 엘리야가 왕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적 전승(말라 3,23)이나 지혜 전승(집회 48,1-11)은 이스라엘 후기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영성에 있어서 핵심 인물로 누린 명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티스베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칠십인역에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 북쪽에 있는 한 지역, ‘길르앗의 티스베’(1열왕 17,1)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서인 마소라 본문은 엘리야를 ‘길르앗의 거류민’이라고 하며 ‘티스베’라는 곳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엘리야 자신에 관한 역사적인 모습은 기적적인 전설들 속에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도 그의 열성을 반영하는 가명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엘리야 이야기들의 구조와 세부 묘사들은 예언 말씀, 엘리야의 소명, 그리고 모세의 전승과 연결되고 예언 계승에 대하여 잘 발전된 신학적 사고를 밝히고 있다. 엘리야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 안에서 흥미를 끄는 특성으로 묘사되었다. 즉 엘리야는 야훼 신앙 수호의 영웅으로,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예언자이며 왕가의 압박에 저항하며 살아있는 신앙을 수호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구약 후기 중간 시기 문헌과 랍비 전승에서는 엘리야가 이 세상에서 신비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 미래의 하느님 승리의 날에 유일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말라기 3장 23-24절에서는 그가 주님의 날의 선구자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랍비들의 율법 논쟁을 해결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엘리야가 메시아 전승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긴다. 이러한 점이 후기 유대 전승에서 약화되었다 할지라도 널리 퍼진 이 특징의 대부분은 열왕기(1열왕 17장) 이야기들의 영향이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사회악과 싸우며 불의한 이를 징벌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전설의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중세 민속학에서는 방랑하는 유다인으로 여겨졌고, 유월절 식탁에는 그를 위한 자리가 ‘엘리야의 잔’과 함께 항상 마련되었다. 그는 새로운 탄생의 보호자로 여겨졌으며 ‘엘리야 의자’는 할례식에 고정되어 있다. 엘리야는 이슬람교 전승에도 강하게 남아있다. 코란에 엘리야는 ‘정의로운 사람들’ 명단에 들어가 있으며, 바알 숭배를 철저하게 적대시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여러 문맥에서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전승에서 착상하여 “먼저 엘리야가 와야만 한다”고 말한다(마르 9,11; 말라 3,23-24 참조). 또한 엘리야가 불행한 이들을 위하여 호의적으로 개입할 것(말라 15,35-36 참조)을 기다리는 민간 신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루가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새로운 엘리야라고 하였다. 예수는 엘리야를 언급하며 자신의 고유 임무를 규정하였다(루가 4,25-26).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새로운 엘리야로 보았다(요한 1,21. 25). 이 전승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야처럼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을 새로이 세우고 또 엘리야처럼 권력가와 충돌하였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열렬하여 응답을 받은 그리스도인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야고 5,17-18).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무엇보다도 엘리야의 특징적인 모습은 메시아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대중의 의견은 예수를 이 모습과 동일시하고, 반면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동일시한다. 엘리야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때 모세와 함께 예수의 곁에 있었다. 만일에 모세가 율법을 떠오르게 한다면 엘리야는 예언자를 떠오르게 한다(마태 5,17).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
축일7월 20일 성 아우렐리오 (Aurelius)
신분 :주교
활동 지역 :카르타고(Carthago)
활동 연도 :+429년
같은 이름 :아우렐리우스
392년경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다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성 아우렐리우스(또는 아우렐리오)는 히포(Hippo) 교회에 임명되었다가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최대의 성당이던 이 히포 교회는 막대한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신임 주교는 두 가지 이단과 싸워야 했는데, 곧 도나투스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였다. 38년간 재임한 그는 이러한 이단 퇴치에 정력을 쏟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또한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절친한 친구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르가리타 자매들과 엘리야, 아우렐리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