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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역 유적 답사 -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城郭) 공산성(公山城)
2014. 8. 19
공산성의 위치도
공산성 관광 약도
공주(公州)는 20년 전에 무령왕릉에 한번 다녀가고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공산성(公山城)은 처음이다. 첫눈에 나를 사로잡는 것은 높은 석성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공주가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백제(百濟)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을 오늘 실감하게 된다.
공산성 금서루 쪽으로 오르는길에 늘어선 비석군
공산성 탐방 기념 스냅핑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錦西樓)
금서루에서 공북루 쪽으로 난 석성
남쪽을 향하여 난 성벽길 1
남쪽을 향하여 난 성벽길 2
남쪽을 향하여 난 성벽길 3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忠淸南道 公州市 山城洞)에 있는 공산성은 서기 475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3만의 병력으로 백제 수도 한성(漢城)으로 쳐들어오게 되니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피해 백제 문주왕(文周王-제22대)이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遷都)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부터 공산성은 웅진시대(熊津時代) 백제의 중심이 된 것이다. 성왕(聖王-제26대) 16년(538)에 부여(夫餘)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公州)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築造)한 중심 산성(山城)이 바로 공산성(公山城)이다. 사적 제12호인 이 공산성은 총연장 2,660m, 해발 110m의 능선(稜線)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새지(要塞地)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百濟時代)의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조선시대(朝鮮時代) 때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지로 추정되는 왕궁지(王宮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靈恩寺), 조선시대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雙樹亭)과 사적비(史蹟碑), 성을 통하는 문이 4개가 있는데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는 원래 남아있었던 것이고, 동문인 영동루(迎東樓)와 서문인 금서루(錦西樓)가 최근에 북원 되었다고 한다.
동문인 영동루(迎東樓) 1
동문인 영동루(迎東樓) 2
동문인 영동루(迎東樓) 3
답사대원들은 매표소를 통과하여 즐비하게 도열해 있는 비석거리를 지나,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하여 성 밖에서 보아 오른쪽 성위로 오른다. 성위에서 왼쪽 성벽으로 가는 길은 공북루 보수공사로 막혀있었다. 그래서인지 매표서 유리창에 <무료입장>이라는 표지가 있었던 것 같다. 성위를 걸으면서 발아래 펼쳐진 아늑한 공주시가지의 모습이 고도(古都)답게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아마 일상 보아왔던 도시의 분주함과 시간의 촉박과 압박 속의 생활 때문일 것이다. 성벽 위를 걸으면서 마음의 힐링을 얻는 것 같다. 성벽을 돌아 높은 대지 위 조금 멀리 쌍수정(雙樹亭)이 있었는데 간과(看過)하여 답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신도가 그려진 깃발 (청-좌청룡, 백-우백호, 적-남주작, 흑- 북현무) 백제는 영원한 우주를 나타낸 황색으로 나타나 있다.
사신도 깃발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하지만 <쌍수정>의 유래를 알아보면 진남루 서쪽에 위치한 정자로,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 공주까지 내려와 공산성에 피신하고 있었다. 산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했던 쌍수(雙樹:두 그루 나무)에 기대어 이괄의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했던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느티나무 두 그루에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벼슬을 명하고 이곳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734년(영조 10)에 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처음 정자를 지었을 때 당시의 이름은 삼가정(三架亭)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重建)하였으며, 1903년(광무 7)에 다시 정자를 세웠는데 그때 이후 쌍수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인조가 이곳에 머물렀을 당시의 사적을 기록한 비(쌍수정 사적비)도 남아 있다.
쌍수정(雙樹亭)
성안 쪽에는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 자연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게 보여 지고 있다. 가족 단위, 부부, 연인들이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길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 사이의 산책로가 이곳의 자랑이기도 하다.
숲속 산책 길
수림이 무성한 공산성 내부
진남루에 닿았다. 진남루는 공북루(拱北樓)와 함께 공산성의 주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공산성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이 진남루는 성의 남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關門)이었다. 높은 석축기단(石築基壇)을 좌우로 대칭(對稱)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 기단에 걸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樓閣)의 효과를 내고 있다. 원래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축성(石築城)으로 개축(改築)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로 이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축(修築)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復元)한 것이라고 한다.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1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2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3
알고 보니 지진남루에서 동쪽에 있는 영동루(迎東樓) 쪽으로 성벽 길을 가야하는데, 우리대원들은 성안쪽에 있는 영은사 쪽을 향하여 걸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영동루, 광복루(光復樓), 성내의 백제시대 유구(遺構)로는 임류각지(臨流閣址),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지당지(池塘址), 목곽고(木槨庫) 등이 있었는데, 그리고 공산성 만하루(挽河樓) 와 연지(蓮池) 등을 못 본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만하루(挽河樓) 와 연지(蓮池)
연지(蓮池)1
연지(蓮池) 2
드디어 영은사가 나지막이 자리한다. 영은사(靈隱寺)란 사찰명은 임진왜란 때 산신령이 꿈에서 도움을 주어 왜적을 번번이 물리쳤고, 그래서 이 절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해서 영은사로 불렀다고 한다. 영은사는 조선 세조4년(1458)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부렀다가 이괄의 난 (1624) 때 이절에 피신한 인조(仁祖)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되었고, 여기서 승병은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사찰이다.
영은사(靈隱寺)로 내려가는 길
영은사(靈隱寺) 전경
영은사(靈隱寺) 주불전
영은사(靈隱寺) 현판
영은사(靈隱寺) 원통전
북문인 공북루를 실견(實見)할 수 없다. 지난해 성벽의 일부가 붕괴되어서, 지금 보수 공사가 한창이란다. 하는 수없이 처음 들어왔던 서문인 금서루를 빠져나와 공산성 답사가 끝이 났다.
이렇게 공산성은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많은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성에는 백제부터 고려와 조선, 그리고 오늘까지의 시간이 쌓여 있는 곳이다. 공산성은 백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든든한 지킴 터로 남았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는 힘이 있을 때 아름다울 수 있음을 공산성은 보여주고 있다.
원거리에서 잡힌 금서루 쪽의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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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령왕릉 쪽만 가보고 공산성은 못가 봤는데
에브노말의 답사기를 통해 많은걸 보고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곳 다녀오셨군... 비가 와서 어떻게하나 했는데 우중에고 강행을 하였군 비는 맞지 않았는지. 감상 잘 하였네
출발 할 때 인터넷으로 공주지역의 날씨를 검색해보니까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걱정하면서 우구를 준비했지.
다행히 답사 중에는 비가 오지않아서 답사를 무사히 끝냈다네.
귀가길 추풍령 휴게소에서 비를 한 줄기 맞이했지만 우산을 휴대하고 다녀서
대처가 잘 되었다네.
염려해준 덕분에 답사를 무사히 끝냈다네.
고맙네!!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이란 책(저자-金聖昊)을 탐독했는데
그 책에서는 공주에서 백제가 64년간 都邑했다고 우리 역사가 말하는데 公州에 있는 史蹟으로 보아 적어도 200년 이상 王都였다는 주장을 하더군.
그 많은 능이나 성으로 보아 60여 년으로는 어림 없다는 주장을 하더군. 많은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나도 현직에 있을 때 한국교원대학에서 수강할 때
<沸流百濟>에대한 국사를 담당한 교수로 부터 들은 기억이 떠오르네.
정보 고맙네!!
그 주장의 요지는
우리의 古代期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외에 또 하나의 王國이 있었다. 이것이 곧 백제 시조 온조의 형인 沸流의 백제이다. 비류는 공주에 도읍했다가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일본 열도로 쫓겨가서 그 다음해(AD 397)에 망명 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韓民族(비류백제)이 세운 日本 天皇國家의 起源이다.
<沸流百濟> 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 없는 모양이지??
공주 유적지 안내 리프렛에는 <沸流百濟> 국에 대한 기술이없으니
안타깝네.
@에브노말(김기현) 아마 그런가봐! 설만 있지 사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학설인가봐....
日本 古代史는 日本史記를 통해 기술되는데 日本 史學系에서는 日本史記를 바탕으로 天皇이 萬歲一統이라고 하지.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金聖昊씨의 학설로 보면 지금의 천황도 沸流百濟의 後孫 즉 백제의 後裔라는 거라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8.21 15:35
역시 전문가들의 답사기는 사진도 해설도 너무 힘들어 역사공부도 부족하고 관찰력도 모자라 얼른 이해하기도 힘들다. 좌우간 너무 멋져요.
모두들 고맙네...
백제.신라 고구려. 가야나라...몽고.거란. 한족.....
모두들 방문 해주시고... 지나간 역사의 발자취를 - 공부 하려하시고... 찾으려고 마음써 주시니 고맙네.
모두 내가 잠시 잠간 동안 거쳐 온 역사 일세...
그리 아시고, 너무 알려고 하지 마시와요.
--그것은 모두다..그 시대, 그 사람들의 발 자취일 뿐...
--지금 내 시대의... 나의 발자취를 잘 남기도록 하시면 어떠하실까요.
역사는 그 민족이 걸어 온 거울이고
내일을 걸어 갈 나침반이라는 걸 부정한다 이건가?
역사를 알려고 하지 마라??? 상식 이하의 논조!!!!
꽈배기야!!!
@夢谷
@夢谷! 고마우네.
자동차는 항상 앞으로 전진하게 되어 있다오.
잠시잠간 길을 잘못 들거나...방향이 잘못 되었을 때.. 약간의 후진이 있을 뿐...
**나침반은 항상 앞.앞.앞.앞으로 가는--방향과 진로를 가리킨다오.
**나침반이 지나온 뒤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있는가?????
역사 진행은...다가올 미래를 향하여 간다오.
지금 우리가 신라로.고구려로. 백제로 돌아갈 수 있는가???
..자나온 발자취는 약간의 거울로 삼아...핸들을 바로 잡는데 쓰일 뿐
역사에 집착하지 말라 이거요.
자나간 것 보다-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夢谷 지나간 세월호에 나라가 매달려 있으면 되겠는가?
툴 툴 털고 일어서서 -전진. 전진 .전진 .또 전진 하여야 되지 않을까!!!
우리 역사에 잘 못 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지나간 역사의 ... 불랙홀에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오.
몽곡! 이 꽈배기의 말도 좀 새겨 들어 보시면...복 되실 텐데...
몽곡! 밥 먹었나요. 이 꽈배기가 주는 밥 먹었나, 이 말씀이요!!!
@夢谷 마라톤 선수가 뒤를 돌아다 보면서- 달려가는 선수 보았는가?
국가가 지나간 옛 역사만 바라보고..전진 할수 있겠는가!!!
어떤 분은 자기 아버지가 술 고래 였는데... 자기도 술에 취하여 산다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담배 골초였는데--자기는 담배를 잘 피우지않는다고 하던 분도 있더이다.
어떤 분은 아버지가 이혼 했으니..나도 이혼한다고 하던 분도 있더이다..부전 자전이랄까???
지나간 역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이거지... 지지지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잘 못된 점을 발견하고..버릴 것은 버리고
새로운 세계...글로벌 세계로 전진하자
인생의 앞날..미래사를 바라보고 전진하자 ..이거지 ..지지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