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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삼일 예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건너감(Pascha)입니다!
가톨릭교회 각종 전례 시기 가운데, 절정이자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성탄 시기도 큰 축제이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중요한 시기가 성삼일입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집중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사흘간의 교회 전례를 우리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극도의 고통과 번민, 수난을 통과하시고, 죽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신 후, 마침내 영광스러운 부활로 건너오신 파스카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본질이요 핵심, 전부입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그리스도 신자로서 다른 그 어떤 신앙 행위나 신심 행위보다 몇백 배, 몇천 배 중요한 이 성삼일 예식에 만사 제쳐놓고 반드시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풍성한 가치와 의미, 중요성을 내포한 예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와 현양 제대 앞 성체 조배,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과 십자가의 길 기도, 그리고 마침내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이 모든 예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건너감(Pascha)입니다.
이번 성삼일 기간 우리는 또다시 건너가고, 넘어서고, 극복하는 노력을 거듭해야겠습니다. 나를 넘어 이웃에게로, 이웃을 넘어 주님께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어제의 죄와 허물로 가득한 부끄러운 나를 넘어 주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아 말끔해진 나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끝끝내 용서하지 못해 생지옥을 살고 있는 나를 넘어 통 큰 용서를 통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는 새로운 나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누군가로부터 서비스를 받고, 케어를 받는 나에서 서비스를 베푸는 나, 극진히 섬기는 나, 이웃의 발을 씻겨주는 나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주님 만찬 성목요일
<누가 말씀으로 목욕한 사람인가?>
복음: 요한 13,1-15
오늘은 사제들의 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위해 사제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찬례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분명 사랑의 행위로써 구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 온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하느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가 주는 양식으로 부모처럼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는 목욕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리고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유다만이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목욕을 하지 않은 채 성체를 영하는 것은 구원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하는 목욕은 무엇일까요? 성찬의 전례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유다는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먼저 깨끗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면 말씀으로 깨끗해진 이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줌이 아니면 구원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기도 어렵지만, 받기도 어렵습니다. 사랑 받으면 고마워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기 더 어려운 이유는 내가 사랑 받지 못한 처지를 하느님과 이웃을 원망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 즐거움을 빼앗긴다는 데 있습니다. 지옥도 분명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겨 먹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도 십자가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케이티 파이퍼(Katie Piper)는 영국의 장래가 촉망되는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시샘한 한 스토커에 의해 그녀는 얼굴에 염산 테러를 당합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그녀는 자기 얼굴을 보며 살 의욕을 잃습니다. 부모와 함께 지내며 자살 생각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가 세상에 나가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갇히는 게 지옥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려면 먼저 부모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녀는 용기 있게 세상 밖으로 나갔고 그 용기에 감탄한 사람과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고쳐주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빛을 피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둠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면 어떤 존재가 될까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랑 받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으로 깨달아 목욕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그리스도교』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사랑을 피할 곳은 지옥 뿐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안전한 투자는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게 상처 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분명 당신의 마음은 괴로움으로 찢어질 것이다.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심지어 그 어떤 동물에게도 마음을 주지 마라. 이런저런 취미와 사소한 사치들로 당신의 마음을 꽁꽁 감싸라. 이기심이라는 관 또는 장식함 속에 당신의 마음을 집어넣고 단단히 걸어 잠가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안전하고 깜깜하고 움직임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 장식함 속에서 변할 것이다. 그것이 다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깨뜨리거나 꿰뚫거나 또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극 또는 적어도 비극을 맞이할 위험을 피하기 위한 대안은 이런 지옥살이뿐이다. 천국을 제외하고, 당신이 사랑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옥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발을 씻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도 되고 세례성사는 물론이요, 고해성사도 됩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갈 곳이 지옥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말씀으로 목욕을 한 사람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목욕하지 않으면 성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성사를 영하지 않거나 성사를 영해도 유다처럼 소용없게 됩니다. 먼저 말씀으로 왜 성사가 아니면 지옥인지 깨닫도록 합시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3,1-15: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탈출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파스카, 즉, 죽음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과월의 축제로,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 대축일로 지내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행하신 성체 성혈의 의미와 그 의식을 우리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 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절) 예수님께서 건너가심은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고귀함을 벗고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으며, 우리에게 맞추어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우리와 함께 계시던 분이 당신의 충만함(참조: 콜로 1,19; 에페 1,23)으로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곧 떠나야 할 때가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그 일로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 그들이 장차 닥칠 끔찍한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도다움을 뜻한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은 만찬 때,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은 후에 표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3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4절).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5절). 말씀이신 분,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무릎을 굽히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은 그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손수 부으셨다.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황송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7절)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8절)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되는 신비는 그들의 발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할 발이므로 그 발을 씻고 당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음으로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는 길이요”(요한 14,6)라고 하신 분께로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깨끗한 발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자들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비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9절) 하자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제자들처럼 영예롭게 대하시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발을 씻어 주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못으로 갚아드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12절)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인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는 것이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숙일 때, 겸손해지며 더욱 확고해진다. 이 겸손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5절) 예수께서 먼저 당신의 모습이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멀리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가까이할 때이다.
이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 거룩한 밤에 이 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상 식탁에 앉을 때까지 당신의 말씀과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 되면 제 바로 형님과 함께 시골에 가곤 했습니다.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탄 뒤에 한참을 걸어가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신 시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먼 거리였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도착하고 나서는 너무 신났습니다. 개울가에 가서 놀기도 하고, 고양이, 개, 소 등의 동물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올챙이 잡고 개구리 잡던 것 역시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지요. 이렇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지요. 온몸에 달라붙는 모기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상황이 뭐가 재미있을까 싶습니다. 당시 시골에는 제 또래도 없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놀 수 있는 대상은 같이 간 형뿐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면, 아마 “저는 그런 곳에서 못 살아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긴 게임에 빠진 아이의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화가 나서 불을 질렀다는 아이도 있더군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뭐가 재미있냐?’고 하겠지만, 제 기억 속에서 시골 체험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뭐라 하셨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이분들의 음성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옛날의 몇 장면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선명한 기억을 지금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자기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순간이고 미래를 잘 사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화려한 것, 멋진 것보다 오랜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장면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장면에는 늘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지금 내 자리도 먼 훗날 기억에 오래 간직될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을 지냅니다. 이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있음에도 제자들을 향해 또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주님을 봅니다. 그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전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오늘의 전례를 통해 사랑을 다시금 바라보고 또다시 그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한다(레프 톨스토이).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요한 13,11)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날에
제자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주시며
그들의 영혼이
깨끗이 치유되어
오롯이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바라셨지만
유다만은
깨끗해지지가 않았네.
그리하여 그는
자기 뜻대로 고집스럽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고 말았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제 몸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씻어주십니다.
그분의 희생과 겸손한 사랑이 전해집니다.
그분의 손길을 따라
저의 추한 죄의 얼룩들이 씻겨져 내려감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자신의 가장 더러운 내면을
온전히 그분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나의 더러운 치부를
그분께 드러내 보여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음을 준비하실 그분을 온전히 만나기 어렵습니다.
서로의 발을 닦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관계가 아니듯이
서로의 치부를 감싸줄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저도 제 발을 교우들에게 맡깁니다.
저도 교우들을 위해
제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죄의 동질성 의식입니다.
복음 말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6-21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