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영화제'
해운대 아닌 자갈치, BIFF를 품어 기른 건 '삶의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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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부산 중구 남포동 비프광장 야외무대에 구름 인파가 몰려 있다. 전용관인 영화의전당이 없던 시절 영화제 기간 비프광장 야외무대 일대는 스타들을 보려는 영화 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
■ 1996년 때 이른 산타의 선물
'부산은 더는 문화 불모지가 아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수영만과 남포동 극장가는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당시 부산 언론의 달뜬 목소리처럼 부산국제영화제는 그야말로 산타의 선물처럼 찾아왔다.
1994년 말부터 부산 영화계가 꾸준히 추진하고 준비해온 덕분이기도 했지만,
일반 시민에게 영화제는 느닷없이 펼쳐진 축제였다.
더는 문화 불모지가 아니라는 당당한 자기 선언은 영화제를 통해 부산이 자신을 재발견하면서
느낀 흥분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국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당시 부산은 성장축을 상실한 후 새로운 경제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급속도로 침체해가고 있었다.
영화와 관련하여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몇 개 갖고 있을 뿐 부산 영화는 물론이고
부산 문화 전체가 앙상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일할 곳도 즐길 것도 변변찮아 위축되어가기만 하던 때, 부산은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 개최 도시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시민들은 1996년의 이 선물을 열정적인 축제로 승화시켰다.
지방에서는 좀체 만나기 힘든 배우를 보려는 욕심 때문이든 국제영화제라는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든 접하기 힘든 국가의 영화에 대한 갈증 때문이든 그 모두가 영화제를 자신의 축제로 즐기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이런 열정에 가장 놀란 이는 우리 자신이었다.
위의 자기 선언을 호기롭지만 무력한 구호로 읽지 않고 간절한 희망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당시의 부산을 짓누르고 있던 자기 불신과 자기 비하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산타의 진짜 선물은 국제영화제 자체가 아니었다.
아예 성공을 의심하거나 기껏해야 2, 3회밖에 못 갈 거라던 서울 충무로 영화가와 뭇 도시의 회의적인 예상 속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역동적인 축제로 만들어낸 부산의 열정, 우리 자신조차 주눅이 들어 잊고 있었고
믿지 않았던 그 열정을 재발견한 것 그것이 산타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산타는, 1996년 가을 남포동 극장가를 가득 메우고 주변의 좁은 골목길을 몸 부대끼며 돌아다녔던
우리 자신이었다.
■ 국제영화제, 왜 부산이었을까
당시 한국영화계가 급속한 발전으로 새로운 르네상스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 국제영화제 출범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95년 이후 대기업의 거대 자본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는 제작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훨씬 이전부터 조금씩 제기되어 오던 국제영화제 개최 요구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국제영화제 개최 도시는 왜 하필 부산이었나.
이 질문은 당시의 언론도 심심찮게 던진 것이었다.
당시 집행위원장이나 언론이 내놓은 답변 중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바다였다.
칸영화제 등과 같은 세계적인 영화제를 예로 들면서 영화와 바다의 낭만성으로 강하게 연결했다.
서울 같은 엄청난 대도시도 아니고 한적한 소도시도 아닌 도시,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유동성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 결정적으로 바다와 지척인 거리에 영화관이 몰려 있는 도시라는 점이
부산 영화계의 적극적인 노력과 더불어 국제영화제의 부산 개최에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으나, 국제영화제가 선택한 부산의 바다는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화의 바다와 마주앉은 자갈치시장 앞바다였다.
그 바다는 비치파라솔로 뜨거운 햇볕을 피한 채 선글라스 너머로 힐끔거리는 바다, 그래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원색의 수영복에 고무되어 과장된 웃음을 남발해도 무방한 바다, 혹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물 덩어리가 온몸을 뒤흔들며 울부짖어도 내 몸엔 물방울 하나 튀지 않는 채 멀찍이서 구경하는 바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바다는 오늘 밤의 먹을거리를 건져 올려야 하고 늙은 어머니의 약값을 캐내야 하고
아이의 학비를 낚아 올려야 하는, 곧잘 부산 삶의 현장으로 대변되던 바다였다.
남포동 비프광장과 어깨를 맞대고 앉은 국제시장 역시 고통과 웃음 사이를 억척이라는 방식으로
헤매고 다니는 공간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초창기 비프광장의 역동적인 축제는 자갈치시장 앞바다와 국제시장에 깊이 밴 삶에 대한 열정이 좁고 복잡한
미세혈관을 통해 그곳에 몰려들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중앙 중심의 집행진을 보며 느끼는 지방의 소외감은 비프광장의 열정에 어울리는 집행진의 뜨거운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 매끈하고 화려해졌지, 그런데 이 소외감은 뭘까
좁은 광장과 골목의 열정은 흥미롭고 신기한 에너지를 주는 듯 소비되었지만, 이내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산 연고의 프로야구단 홈구장은 좁고 낡은 구덕운동장에서 커다란 사직운동장으로 일찌감치 떠나갔고
시청 또한, 연산동의 신청사로 옮겨갔다. 영화제 역시 2006년 남포동을 완전히 떠나 근사한 모습으로
해운대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
남포동 극장가의 눈치를 보며 셋방살이를 해야 하는 처지, 해외 유명 손님의 숙박 문제 등이
해운대구의 적극적인 지원, 해운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최신식 영화관, 영화의전당 계획 등으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화제의 바다는 자갈치시장 앞바다에서 해운대 바다로 대체되었다.
영화와 바다의 결합은 여전했지만 이제 영화제가 선택한 바다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바다 대신 웅장하고
현대적인 거대도시가 전망이라는 소비재를 독점하는 바다다.
이 바다는 복잡한 골목과 좁은 광장 대신 과거의 흔적을 말끔히 밀어낸 빈터에 저 홀로 우뚝우뚝 뻗어 오른
아파트들 그리고 벡스코나 세계 최대의 백화점 같은 센텀시티의 우람한 건축군들, 구질구질하고 답답한 일상을 피해 바다 위를 매끈하게 휘돌아가는 광안대교 등과 이어졌다.
그리고 타인과의 부대낌을 최소화한 신속하고 질서정연한 귀갓길을 보장해주었다.
그 대신, 속절없이 드러나는 타인의 삶과 어둠 속의 나 사이를 가로지르는 몇십 분 혹은 1시간 반가량의 격절감이 수많은 이들의 몸과 부딪친 후 오롯이 나의 삶으로 바뀌는 과정 또한 송두리째 잘려나가 버렸다.
이제 영화의 바다는 우리 삶의 바다가 아닌 그들이 대상화한 바다로 변모해가는 듯하다.
아시아 영화 비중이 줄어든 반면 비아시아 영화가 그만큼 늘어났듯 영화제는 세계적인 대도시의 경관과 닮은 곳을 찾아 들어갔다.
영화제가 영화산업으로 확장되고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이전해오면서 센텀문화산업진흥지구는 글로벌 영상
특성화 도시로 기획되었으며 부산은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로도 지정됐다.
하지만 부산영화계가 영화제의 제대로 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했듯 부산 시민의 삶의 열정이 지금의 센텀지구와는 긴밀히 연결되지 못하는 듯하다.
오히려 이 공간은 영화·영상산업계의 임시수도 혹은 임대 사무실처럼 보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싼 낯선 외압에 직면했다.
영화제가 '다이빙벨'을 초청하자 부산시장은 영화가 정치색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고
문화부는 국고 중단을 통보했으며 지역의 한 국회의원은 영화를 불량식품에 비유했다.
이에 맞서 영화제는 영화를 상영해냄으로써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화제 폐막 후 감사원은 영화제 사무국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영화는 전국 상영관에서 매몰차게 내쫓겼다.
영화·예술·시민사회단체는 그 배후에 영화진흥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했고 영화는 결국 법정에까지 가게 되었다. 영화는 애도 표현과 진실 규명 촉구를 위한 방식일 수 있다.
이에 대한 각종 외압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이며 부산국제영화제 특유의 축제성을 훼손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조명기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공동기획: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