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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묵상글 (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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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
그전에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
제 생각에 더러움이란 죄의 더러움일 것입니다.
이력서로 치면 이력서에 범죄의 이력으로
이력서가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한 거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이나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까?
음식과 관련한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 밖의 먼지나 오물이 우리의 손이나 발을 더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안까지 더럽게 하거나 마음이나 존재를 더럽힐 수는 없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나 바오로 사도 모두 욕망 또는 탐욕을,
사람을 더럽히고 죄짓게 하는 것의 하나로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제 생각에 욕망은 욕구와 욕심 사이의 징검다리입니다.
욕구는 인간의 본능과 같아서 욕구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식욕이 있는 것이 어찌 죄이겠습니까?
성욕이 있는 것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고 먹고살도록
또는 후손을 잇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도 악이 아닙니다.
돼지와 돼지고기가 무슨 악이고 죄짓게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다 선이 아닙니까?
좋은 것들이기에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죄의 씨앗이고,
욕망이 욕심과 탐욕으로 발전하여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개탄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이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긴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 대신 욕망이 자리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와 주님 말씀처럼 복음이 그리고 사랑이
이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시고,
그러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에 담긴 것, 그것이 뭡니까?
욕망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 욕망을 정화하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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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이처럼,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 깨끗해지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그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허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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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국의 곳간이 채워질 것이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베드로 솔로그).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겉모양의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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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스님의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의 내용 중에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야기할 때, 상대로부터 옳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내말을 잘 들어주길 바랄 때가 많아요.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할 땐 섣불리 조언하려 하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 연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들어주세요. 상대를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 하지 않고 따뜻한 관심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사랑의 가장 순수한 표현입니다. 바꾸고 싶어 하면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 기준으로 만들어낸 상대의 문제만 보여요. 진정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에 맞는 부분 이외에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이 좀 있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품어 줄 수 있을 때,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잘 안다 하고 보면 더 이상 상대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내가 잘 모른다.’하고 볼 때 상대를 자세히 보려고 해요. 그래서 사랑은 ‘잘 모른다.’하고 보는 상태예요. 혹시 주변 사람들을 내가 이미 잘 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살펴보세요. ‘잘 안다.’하고 보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과거의 생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끔씩 ‘저를 잘 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제 마음은 저도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어찌 저의 마음을 잘 아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것은 미국이 좋아서 일수도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도 있었고 신문사의 일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은 해산물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질긴 고기를 잘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닮아 치아가 튼튼하였다면 고기를 더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주어진 과제를 미리 하는 것은 부지런해서 일수도 있지만 미리 해야만 편안하게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혼자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아침에 산보하고, 좋아하는 책 읽고, 혼자 식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저의 좁은 판단으로 쉽게 남을 평가하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와 다른 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을 알았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것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한 것도 몰랐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을 문제 삼으려는 바리사이에게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생활을 이야기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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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말씀하신 이후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으십니다. 사실 어제의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 작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이에 있는 복음 내용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는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으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우리 안에서 소리치고 있음을 상기시키시고 동시에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간절히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빛을 담아주셨습니다. 그 빛을 어둠 속에 방치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 빛을 부정할지라도 그 빛은 우리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 빛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하느님을 닮은 것입니다. 그 빛을 등경 위에 두어 많은 곳을 밝힐 수 있도록 하세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의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은 이미 우리 속에 자선을 베풀 힘과 빛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 닮은 빛이 있다는 뜻입니다.
겉을 만든 분이 속도 만드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빛이 있으며 그 빛은 꺼지지 않고 우리 내면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그 빛으로 자선을 베푸십시오.
‘복음을 전하다.’라는 우리 안에 있는 빛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 그래서 마지막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선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문수산에 오르다.
저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저는 등산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곳 갑곶순교성지 근처에 문수산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갔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문수산 산림욕장’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걸으려고, 진짜 걸으려고 그 산림욕장에 들어섰습니다.
걷다 보니 오르막이 있고, 풍경은 더 훤해집니다. 걷다 보니 계단이 있고 풍경은 더 아름답습니다. 바람도 시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상까지 1.6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나는 분명 걸으러 왔는데 걷다 보니 정상에 거의 다 와있었습니다.
내친김에 정상에 도전합니다.
내려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여정도 마찬가지야.
처음에는 가볍게 걷다 보면 중간중간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 같은 아름다움을 만나지, 그러다 보면 그 선물을 주시는 주님 보고 싶어서 정상까지 오르는 거야.
그렇게 정상에서 주님 만나고 다시 내려오지. 왜냐고? 내려와서 사랑해야 하니까. 사랑은 내려와서 하는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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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갑곶성지에 처음 소임을 받아 갔을 때, 큰 나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그루의 큰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느 신부님께서 작은 벚나무 15그루를 심으라면서 성지에 놓고 가셨습니다. 이 15그루 만으로 이 횅함을 없앨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주신 것이라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성지에 가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심었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벚나무가 너무 크게 잘 자라 있는 것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래에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어야 나무 한 그루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별것 아니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작은 씨앗 하나 심는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습관도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과자 광고 문구 중에 ‘손이 가요, 손이 가, ***에 손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하나 먹고 나면, 이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메시지 확인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보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뉴스도 보고, 인기 영상도 보고, SNS 등도 확인하면서 오랜 시간을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데 시간을 쓰게 됩니다.
작은 악습도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별것 아니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미래를 위한 과감한 시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그분의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보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닌, 자선을 통해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일 미사 참석 한 번 한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또 교회 안에서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선,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이 나의 마음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뜻이기에 아주 자그마한 것이어도 가장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제게 말씀하십니다. 성당에서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더 성당에 오고 싶다고 하십니다. 성당 의자에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모습에 ‘역시 신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십니다. 자기 아이가 성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웃으면서 “아이가 참 밝네요.”라고 받아주시는 모습에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지만, 그 결실은 어떤 전교 활동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하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악은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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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을 말하는 입은 신조차 막을 수 없다(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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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예수님이 궁극의 답이다-
그동안 강론에서 참 많이 다뤘던 주제가 무지입니다.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부정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무지의 힘도 참 막강합니다. 평화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잔인하고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문명시대라하지만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야만시대입니다. 그리하여 죄도 많고 병도 많고 사람들도 날로 사악해지는듯 합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참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탐욕, 분노, 잔인함, 폭력, 보복, 질투, 교만, 허영, 어리석음 등 그 뿌리에는 무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궁극엔 무지에서 기인하는 병이요 죄요 악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반복하여 나눴던 “행복하여라”로 시작된 참행복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봤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입증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똑똑한 듯 하나 실로 어리석은, 헛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입니다.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지혜는 없었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렸습니다.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본말전도, 주객전도, 표리부동의 위선적 사람들입니다. 안팎이 같은 진실함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혜와 사랑이 결핍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자 깜짝 놀라는 어느 바리사이입니다. 손을 씻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잊을 수도 있습니다. 관행이라 하지만 결벽증 환자가 아니라면 그리 놀랄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이 정곡을 찌릅니다. 이들의 무지와 위선을 폭로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같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말씀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를 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탐욕과 사악의 무지한 인간들, 또한 부정적 인간현실입니다. 만인의 참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이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아무리 위장해도 속은 저절로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자선을 통해 속을 비워내면 저절로 속은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선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을수록 속은 비워지고 깨끗해지기 마련이요 겉 역시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지혜와 사랑의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비단 자선뿐 아니라 모든 선행과 사랑의 수행 역시 속을 비워 겉과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런 안팎이 같은 진실한 사람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숨긴 것이 없는 투명한 삶이니 하늘을 우러러 두려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불안할 것도 없고, 또 세상 어느 것들에도 소유되어 노예된 삶이 아니니 참으로 자유롭고 넉넉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행복한 삶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초한 대부분 불행이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저절로 따라 오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복음의 힘’과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라는 두 소주제로 이뤄졌습니다. 복음의 힘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이를 하나로 종합한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유롭고 행복하고 부요하게 하는 복음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열화와 같은 강론은 인간 무지에 대한 지탄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입니다.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 달린 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꿨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입니다. 아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혜와 사랑의 하느님 자리에 우상들을 둔 참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은 여전히 오늘도 계속됩니다. 무지의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이 참 사랑과 지혜의 증인들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도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107년경 순교한 사도교부로 성 요한 사도의 제자이자 성 뽈리카르보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일치의 박사”인 성인입니다. 그가 로마로 압송될 때 보낸 7통의 주옥같은 편지중 감동적인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순교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인은 같은 편지에서 순교의 고통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새생명이 태어나듯이 순교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된다 해서 순교한 날을 “천상탄일”의 축일로 지내는 전통도 성 이냐시오로부터 기인합니다.
참으로 무지에 답은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자 예수님과 일치를 이뤘던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행위로서 마지막 숨까지 성녀의 입술위에 늘 있었다. 성녀는 그의 방앞에 써붙였다. ‘예수님은 내 단 하나의 사랑이시다(Jesus is my one love)’.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8.16)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었다.”
무지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일치의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과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행복한 참나의 하느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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