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과 학문과 경륜의 수필가
-녹차향 넘치는, 멋을 아는 선비 김시헌 선생-
최원현/수필문학가
봄이 활짝 열리는 날이었다. 삼라만상에 새 기운이 돌고, 초록 여신의 향기가 하늘과 땅을 연다는 춘분 날 이른 오후, 나는 참으로 귀한 분을 만나 뵈었다. 헌데 꽃샘 추위라던가. 봄을 시샘하는 차가운 바람이 심술을 부려 햇볕은 따사로와 보이는데도 체감온도는 아직도 한 겨울이었다. 따끈한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바라본 김시헌 선생님, 전에 뵈었을 때보다도 신수가 훨씬 더 좋아 보이시고, 오늘따라 넥타이와 조끼와 양복이 유난히 더 잘 어울려 멋쟁이 노신사이심을 한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근황을 여쭤 봤더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수필강좌를 하신다며 여전히 바쁘게 사신다는 말씀이시다. 월요일엔 인천 중앙도서관, 화요일엔 부천에 있는 엘지백화점, 수요일엔 미아동 신세계백화점, 목요일은 구로동 애경백화점, 그리고 금요일엔 천호동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수필작법을 강의하고 계신다 했다. 사실 IMF 한파로 경제가 극도로 위축되고, 사람들의 씀씀이도 아주 많이 줄어들고 있는데도 선생님의 수필강좌가 여전히 성황을 이루는 것은 선생님의 수필에 쏟으시는 열정과 수필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수강생들도 알게된 것이리라.
김시헌(金時憲)선생님은 192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시어 안동농림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셨다. 잠시 제도사와 측량기술자로 근무하신 적이 있었지만 해방후로줄곧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걸어오셨는데 여기에 수필가의 길을 함께 하신 것은 한국문단의 큰 행운이요 복일 것 같다. 선생님께선 처음엔 시와 소설을 쓰셨다고 한다. 그러나 30세쯤에 읽게된 일본어판 ‘나의 종교와 인생’이란 수필집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6.25직후 ‘하루살이’란 수필집을 읽게 되면서는 수필을 써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받으셨다고 한다. 31세때부터 영남일보와 매일, 대구일보 및 도기관지인 도정월보 등에 수필을 발표하다가 1966년 <현대문학>에 ‘사담(私談)’이란 수필이 천료되면서 중앙 문단으로 나오게 되셨단다. 1968년엔 경북수필동인회를 창립 하셨고, 다음해엔 동인지 <수필문학>(후에 경북수필로 바뀜)을 창간 하였으며, 경북수필동인회 2대회장, 한국문인협회 경북지부 부지부장을 역임 하셨고, 지금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펜클럽 한국본부, 수필문우회 회원이시다. 수필집으론 3인(김진태,장인문,김시헌) 수필집인 <산문산책> 1집(1972)과 2집(1995), 5인 수필집 <인생의 묘미>(1975)를 내셨고, <멋을 아는 사람>(1982), <두만강 푸른 물에>(1984), <오후의 사색>(1990)등의 수필집을 내셨으며, 경북문화상(1978)과 한국수필문학상(1987)을 수상 하셨다.
수필가 김규련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김시헌 선생님은 인격과 학문과 경륜을 두루 갖춘 청순한 인품의 선비시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수필에선 항상 담백하면서도 향기 높은 녹차 맛 같은 선생님만의 수필 맛이 감돈다고 한다. 평생을 교단에 몸 바쳐온 교육자로서,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고, 온유하면서도 강직한 성품 만큼이나 무언의 행동과 바르고 깨끗한 삶의 자세들이 수필 속에서 그대로 스며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밑바탕에 사유의 철학적 사상과 정감을 깔고 독자에겐 영혼 깊숙히 조용한 희열로 다가가는 선생님의 수필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 주변의 이야기들인데도 특유의 문장력에 의해 아름다운 정과 진솔한 표현으로 읽는 이에게 은은한 공감을 불러 일으켜 문학적 수필로 승화하는 수필문학의 진수를 확인케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게는 사실 빈손 뿐이다. 돈도 없고, 벼슬도 없고, 명예도 없다. 놓고 가야 할 소중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마음인들 오죽 가뿐하랴. 깨끗하게 살고 멋있게 살 수 없는 것이 한이라면 그 한 조차 버리도록 노력이나 해야겠다.’
선생님의 수필 ‘묘지’의 한 부분인데 청렴한 선비의 모습, 가르치는 일밖에 모르는 참 교육자의 모습, 욕심 부리지 않고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을 이만큼 진솔하게 표현해 내신다는 것은 평소에 지니신 마음과 생각이 곧 생활의 철학이요, 삶의 신조가 되셨기 때문이리라. 선생님의 호를 무원(無圓)이라 하신단다. 원이란 무한한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좁은 마음을 넓히자는 뜻에서라지만 무원이니 무한한 세계의 원까지는 아니되 가능한 크고 넓은 마음을 갖자는 바람이신것 같다. 선생님께선 문학의 출발을 ‘고독’으로부터 하셨다고 했다. 그 고독을 표현할 대상으로 택한 것이 문학이었고, 시적인 섬세성이나 소설적 지구력엔 부족함을 느끼지만 산문적 요소와 시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수필은 ‘내가 택할 장르다’란 생각이 들어 수필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시적, 소설적 요소가 적당하게 배합되어 잘 생긴 수필이란 장르를 빚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게 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지배했던 허무의식이 마음바닥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수필이란 문학으로 형상화된 것이라 해야 할지.
선생님으로부터 수필의 문학성에 대해 말씀을 들었다. “수필은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 문학이라고 하지만 형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문학으로서 그 무형식의 형식이야말로 수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창조성이라고 생각 합니다. 또한 수필을 대중수필과 본격수필로 구분 한다면 수필정신이 뚜렷하고 수필정신에 투철한 수필을 본격수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울러 문학적인 감동을 일으키는 수필이어야 문학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것이다. 감동이 없는 것이 어찌 문학일 수 있으랴. 허나 감동이란 얻어내는 것이라기보단 저절로 와지는 것이 아닐까. 무더운 여름에도 흘러가는 산골의 맑은 물을 보고 있으면 가슴까지 시원해 지는 것처럼 수필이야말로 그런 잔잔한 감동을 중시하는 문학이 아닌가. 선생님은 작은 기쁨까지도 아주 소중히 하시는 분이셨다. 더욱이 작가로서 창작의 기쁨에 대해선 정신의 결정체가 분가해 나가는 해방감으로 출산의 기쁨과 비교 하신다. ‘창작의 기쁨은 순수하다. 창작의 기쁨은 몸 전체로 온다. 학문이 이지(理知)에서부터 기쁨이 온다면, 성은 피부로부터 기쁨이 오고, 예술은 정서에서부터 기쁨이 온다. 그래서 가장 맑고, 가장 강하고, 가장 오래도록 지속이 된다.’ <수필 ‘창작의 기쁨’ 중>
흔히들 뼈를 깎는 아픔으로 묘사되는 창작과정들, 허나 선생님께선 그것을 기쁨으로 승화 하시니 이보다 더 부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선생님께선 ‘쓰면서 즐기고, 쓰고 난 뒤에 즐기고, 잡지에 발표가 되면 또 즐긴다’고 말씀 하신다.
선생님께선 수필론도 많이 쓰셨다. 그래서 체험의 문학인 수필에서 허구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부탁 드렸다. "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와 달라 작가가 어떤 직접적인 인생의 체험을 가졌느냐에 독자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사건은 그것이 실제 체험이라 해도 꾸며진 이야기로 착각하게 되지만 수필속의 사건은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 해도 독자는 체험의 사실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체험과 허구를 독자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가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만일 허구로 된 수필을 독자가 읽는다면 독자의 머리 속엔 사실 곧 체험의 인간과 허구의 인간 두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결국 허구로 된 인생사와 실제의 인생사가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을 수필로 쓸때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거나 문학적 묘사를 위해서 내용을 약간씩 수정 보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필에선 전혀 체험이 없는 허구란 있을 수 없고 또 체험을 소재로 하는 것이 수필이다 보니 수필 속에 사건이 등장할 때 그 사건의 구성을 체험하지 않은 허구로는 짜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수필의 소재를 택하실 때도 그저 살아가는 중에 받는 일상적 충격에서 얻는다고 하신다. 특히 아름다운 사실에서 받는 충격, 이를테면 예술, 자연, 사람의 마음 등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충격이 바로 글이 되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이 옅어지고, 거기 다시 다른 충격이 더해지는 자극 속에서 글이 이뤄진다는 말씀이셨다. 선생님께선 주로 새벽에 글을 쓰신다고 한다. 하루동안의 신경이 잠재워진 시간에 글을 쓰고 또 다듬기도 하시는 것이다.
선생님께선 40여년간 수필을 써 오셨고,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내신만큼 훌륭한 작품들이 참 많으시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시고 문학적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고 여쭤 봤더니 <고목> <처녀 석고상> <아들> <인생의 의미> <해는 다시 뜬다> 등 다섯 편의 수필작품을 추천해 주신다.
나는 선생님의 수필 <고목>을 참 좋아한다. 어쩌면 <고목>이란 수필은 선생님 자신의 모습과 삶의 자세와 삶의 멋 곧 선생님의 자화상을 수필 형식을 빌어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싶다. ‘바람이 와서 흔들면 큰 저항없이 바람의 뜻대로 움직여 주고, 새가 와서 뜻있는 말로 정한(情恨)을 풀면 그것도 모조리 들어준다. ...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내부를 가지고 있는 고목,... 모든 것을 포용 하면서도 그것에 집착 하거나 감겨들지 않는다.’ < 수필 ‘고목’ 중에서> 선생님은 삶의 달관자인 듯 하면서도 때로는 끝없는 소망을 펼쳐내는 젊은이 못지않은 꿈의 소유자이신 것 같은데 아마 그러한 면이 평생 교육자의 모습으로 영욕의 강, 애환의 산맥을 잘도 다스리며 흐트러짐 하나 없이 살아오시게 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선생님께 있어서 수필은 구원이었을 것 같다. 삶 자체가 수필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한 편의 수필을 위해서 날마다 삶을 추스리고 건사하며 살아오셨을 것 같다면 틀린 말이 될까. 선생님께서 경북수필 제2호에 발간사로 쓰셨던 글이 생각난다. ‘수필은 호젓하면서도 군색하지 않고, 맛이 있으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둔하지는 않다. 수필은 건강하지만 파격을 좋아하고, 야유스럽지만 악의가 없고, 날카롭지만 따갑지는 않다. 수필은 길이가 짧지만 소설이 담겼고, 리듬은 없지만 시가 있다. 수필은 부담없게 걷는 산책과 같고, 장바구니 든 아낙네와도 같다. 그 속에는 꿈을 돌아보는 낭만이 있고, 회의를 극복한 철학이 있고, 생사를 초월한 우주가 있다.’
수필을 통해서 바라본 선생님의 우주에는 아주 작은 삶의 편린 하나까지 남김없이 별이 되어 아름다운 조화의 신세계를 열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말씀을 나눠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 속에서 선생님께 문학사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선생님께는 추억이 깃든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김소운 선생님, 서정범, 박연구, 윤고종 선생님들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과 세미나에서 찍었던 사진을 내놓으신다. 흑백사진 속의 고인이 되신 김소운 선생님을 뵈니 유난히 감회가 새로워진다. 사람에게 있어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순리이련만 이렇게 먼저 떠나가신 분을 새삼 생각하니 얼마 되지도 않는 이 땅의 삶을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욕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우리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던 문고판 수필집 <두만강 푸른 물에>를 챙겨 주시는 선생님을 뒤로 하면서 모든 날들에 더욱 기쁨과 평화가 넘쳐 나시고, 무엇보다도 건강 하시라고 기원을 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수필을 위한 남다른 애정으로 수필문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애쓰시며 수필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최일선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선생님께 수필을 쓰는 한 사람으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렸다. 김시헌 선생님! 언제까지나 멋스러움 그대로 간직 하시고 훌륭한 수필로 문단에 금자탑 이루시옵소서. 수필 문우회 모임이 있으시다며 떠나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확실히 멋진 노신사의 모습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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