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문명의 사악함에 분노와 공포 아프리카 문명화란 허울로 자행된 백인 식민지배자들의 악랄한 착취 진정 ‘어둠의 세계’ 는 과연 어느쪽? 서구의 도덕적 타락과 허상 “적나라”
영국의 탐험가 스탠리는 아프리카를 가리켜 ‘암흑의 대륙’이라고 명명했다.이때의 암흑이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란 의미만이 아니라 문명의 빛을 받은 적 없는 무지와 야만의 세계임을 뜻한다.부락민족간의 끔찍한 대학살,기아,독재국가 이미지가 오늘날 언론에 꾸준히 언급되고 있어 심지어 우리에게도 아프리카는 여전히 암흑의 세계로 일부분 인식될 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잔상처럼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면,19세기 말 서구사회에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암흑과 어둠의 세계로 비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서구의 식민지로서 아프리카는 문명의 지배와 종속을 받기에 마땅한 곳이었으며,점차 서구문명의 빛을 받아 개발돼야 할 미개척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동양도 서구인의 의식에는 비문명화된 세계로 다가오지만,그래도 동양이 서구인에게 무언가 이국적인 향취를 풍기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문명의 태동에 앞서 고대의 동양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웠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아프리카는 영원한 문명의 암흑지대로서 서구인의 사고에서 배제돼 있었다.그들에게 아프리카는 문명의 역사가 존재한 적이 없던 곳이며,다윈의 진화론적 사고로 보면 아프리카인은 아직 진화되지 못한 종족으로 간주되었다.이 모든 것은 그 당시까지 서구사회가 줄달음쳐온 제국주의 역사가 산출한 지배와 예속의 이데올로기였다.
작가로 나서기 전 오랫동안 선원생활을 지낸 조지프 콘래드는 32세때 아프리카의 콩고강을 항해했다.아프리카의 잘록한 허리부분을 가로지르는 콩고강은 대륙의 평원과 정글 한가운데를 깊숙이 파고든 강이었다.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강 지역은 상아 무역으로 유명했으며,백인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이곳에서 젊은 콘래드는 ‘인간 양심의 역사를 더럽힌 가장 사악한 약탈의 현장’을 목격했다고 훗날 한 에세이에 기록했다.
‘어둠의 속’(1899)은 서구인의 탐욕스런 제국주의 역사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콘래드의 문명고발서다.문명화라는 성스러운 이름 아래 휴머니즘을 말살하는 서구문명에 절망한 작가의 회의적 시각이 짙게 깔려있다.
영국 템스 강가나 유럽을 타락시킨 인간의 이기심이 이제는 문명의 손때가 묻지 않았던 순수한 태고의 자연 내부까지 뻗쳐가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통찰하는 작가의 내적 성찰이 깊이 배어나는 작품이다.
삶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요구하는 작가는 주인공의 직접적인 목소리에서 비켜나 '말로우'라는 제3의 인물을 통해 사건을 회상하며 기록한다.그러면서도 서술자인 말로우는 사건을 체험하며 자신의 정신적 도덕적 변모과정을 하나씩 내비치고 있어 독자는 그와 함께 인간 존재의 새로운 인식에 가까이 다가간다.말로우의 정신적 변모는 위험한 콩고강을 거슬러 찾아간 '커츠'라는 중심 인물과의 만남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벨기에 상아 무역회사의 아프리카 주재원인 커츠는 특출난 능력을 보인 식민지 지배자이지만 최근들어 소식이 끊기자 상황을 알아보러 말로우는 콩고강 상류까지 모험을 떠난다.이 여행에서 목격한 백인 식민지배자들의 악랄한 착취와 원주민들의 처참한 비인간적 상황은 말로우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따라서 아프리카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말로우의 여행은 작품의 제목과도 같이 어둠의 세계,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을 향한 여행이며,동시에 깊숙이 은폐돼 있던 문명화된 서구인의 적나라한 본성을 발견하는 자아탐색의 여정이다.
쇠줄에 묶인 채 죽어가는 원주민들,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중년 흑인, 매를 맞아 죽어가는 원주민, 그러면서도 서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백인 지배자들.
이 모든 상황은 암흑대륙에서 썩어가고 있는 서구문명의 퇴적물로 서구인의 도덕적 타락상을 선명하게 말해준다.유럽에서 그토록 높이 칭송받는 커츠는 실상 탐욕에 몰두하는 가장 잔혹한 상아 수집가에 지나지 않는다.“모든 야만인을 박멸하라”는 커츠의 말은 도덕적 자아의 중심이 텅 빈,공허하고 부패한 인간의 궁극적 모습이다.
아프리카 대륙이 서구 문명세계와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어둠과 암흑의 세계는 아니다.이곳을 암흑의 세계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 문화의 이데올로기다.문화의 우열을 가르며,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는 서구 중심 사고에서 비롯된다.더구나 서구문명의 뒷면은 물질적 탐욕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서구문명의 빛나는 허울 뒷면의 핵심까지 체험한 커츠의 마지막 말은 “공포”라는 절규였다.
죽음에 앞서 마침내 서구문명의 속성을 깨달은 커츠의 짤막한 외침은 작가 콘래드가 서구 제국주의 문명에 내린 최종 판결문이다.
<홍덕선 성균관대 영문학과 교수>
◎콘래드의 생애/조실부모… 선원으로 유랑생활
콘래드는 1857년 제정 러시아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폴란드 영토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낭만적 기질의 작가며 출판 편집자였던 아버지는 정치적 자유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혀 유배생활 끝에 어머니와 함께 죽고 말았다.러시아의 압제정치에 대한 반감은 평생 콘래드를 따라다녔으며 그의 정치소설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외삼촌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콘래드는 17세가 되기도 전에 고향을 떠나 선원으로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오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등 낯선 곳으로의 여행 경험은 훗날 작품의 좋은 소재가 됐다. 1886년 영국으로 귀화한 콘래드는 선원생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37세에 첫 장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로 본격 나섰다.‘로드 짐’‘비밀정보원’‘노스트로모’ 등은 모두 개인의 도덕적 비전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다룬 진지한 대표작이다. 문단과는 비교적 고립된 채 30년간 창작생활을 했지만,1924년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조이스와 함께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