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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시모음
호수 / 장석남
단추를 한 다섯 개쯤 열면 돼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근심처럼 흐르는 안개를 젖히면 그만이에요
갈대나 물결
새나 바람
평수 많은 밤
어디서 오는지
아주 커다란 보석이죠?
익숙한 별자리가 무어예요? 가령
웃거나 울던 하늘 기슭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해요
단추를 한 다섯쯤 풀면
지나던 메아리가 멈춘 듯
어디서 왔는지
아주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 호수를 찾는 일이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2
고요한 물 / 도종환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적막 / 안도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화살/이시영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고요살이 1번지 / 서정춘
가서는 돌아오지 않던 메아리들이
도르르 고사리순에
말려있는
그곳
고요하다 / 정호승
강아지똥이 얼어붙어 고요하다
개밥그릇도 얼어붙어 고요하다
천지연 폭포도 얼어붙어 고요하다
새벽이 지나도록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도 날아가다가 얼어붙어
고요하다
단단한 고요 / 김선우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멍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길 날아온 늦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멧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단단한 고요 / 이재무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세지는 때는
망종( )에서 몸을 빼 소서(小暑) 쪽으로 느리게
걷는 절기의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때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대던 매미 울음 뚝 그친 막간
어슬렁대던 개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수 즐
기고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
백치의 순간에 이르게 하던
살구씨처럼 단단한,
이제는 어데 먼 데로 귀양 떠나 죽었는지 소식조차 없는
고요를 찾아서 / 정호승
나는 소란한 고요가 좋다
고요한 고요보다 소란한 고요를 찾아
너에게로 가려 했으나
고요한 고요가 너무 고요해서
지금 고요를 찾아 떠날 수가 없다
무릎을 꿇고 두 손 을 모으고
너에게로 달려가
소란한 고요의 자세를 완성하려 했으나
고요한 고요를 떠날 수 없어
나는 지금 고요를 깨뜨릴 도끼를 들고 있다
고요는 고요를 깨뜨려야 고요하다
고요는 고요에 있지 않고 소란한 길 위에 있다
신발과 자동차가 다니는 길바닥에 있다
길 위의 비둘기를 보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닥을 보며 고요하다
내가 찾아가야 할 너는 부디
내가 도끼로 고요를 깨뜨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소란한 고요를 찾아 고요하라
고요 /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고요하다는 것 / 김기택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사이에서
서로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고요한 나날들 / 이문재
포장을 뜯지 않은 건전지처럼 가만히 기다리자
꽃상여가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 그 안에 관은 없다
사람들이 집을 비운 마을의 한낮은 고요하다
펼쳤던 손을 자르고 아래로 내려간 겨울 나무들
바람의 안쪽은 말라 있고 그 맨 앞은 보이지 않는다
꽃상여를 불태우며 없는 죽음을 죽이는 사람들이 활기차다
자물쇠 채워진 우물물이 조금씩 고이고 돌아와 누운
집들이 깊숙해진다 더 기다리자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유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없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 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 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고요가 바꾼 것 / 송재학
대비사 대웅전 돌 계단 앞에 남풍이 머물면
고요는 돌 계단을 상승이 아니라 하강으로 바꾼다
고요가 붙잡는 정지의 힘!
맞배 지붕의 대웅전이 옥빛 손뼉을 치면서
계단 너머는 팽팽해져 알 수 없는 깊이까지
나는 빛의 속도롤 다녀온다
돌 난간에 향기처럼 새겨진 안동초는
꽃피우는 순간의 정지에서 벋어 나왔다
그때 물 소리는 폭우에서 뿜어져 나왔고
물봉선은 모든 씨앗을 바람의 난간에 맡긴다
그때 저녁의 저수지에서 찰랑거리는
종소리는
느림에서 정지 사이의 돋을새김
고요 / 김남조
이젠/말을 버릴까 싶네/몇백 년 늙어버린/말과 울음에게/가서 쉬어라/가서 쉬어라고/거대한 하늘 물뿌리개/봄비 적시는 이 날에/작별하고 싶네//겨우내 노래하던 새/묘지에서도 노래하던 새/몇백 년 그럴 양으로/성대가 더욱 트인/새여 노래여/날아가거라/날아가거라고/손짓해 보내고 싶네//소리내는 모든 건/내 하늘에서/석양으로 저물어가고/청징한 고요 하나/남은 삶의/실한 고임돌였으면 싶네
고요는 이제 / 박희진
가장 깊숙한 영혼의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언어의 절에까지 꿰뚫고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빛샘물 고요, 무궁의 고요,
고요는 이제 시의 핵심에서나 찾을 수 있다.
고요 / 임보
내장산(內藏山) 깊은 골 원적암(圓寂庵) 뜰에
붉은 감 주렁주렁 매달렸는데
저놈 익기 기다리며 침만 삼키다
산까치 한 마리 졸고 있어요
고요한 시간 / 양수창
전화벨의 진동 소리에
땅의 한 부분이
약간 흔들리다.
한 떼의 새들이 날아오르고
바람은 고요해졌다.
숲의 미동(微動)조차
감지되는 오후(午後).
전화벨의 진동 소리에
하늘의 한 부분이
서서히 흔들리다.
이 고요한 우물 / 이성선
허공에 꽃으로 안기거나
바람으로 울며 다니거나
내 돌아가 마지막 들여다볼 곳은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이승을 구름으로 흐르고
삼십삼천 하늘을 학으로 날아도
돌아가 마지막 들여다볼 곳은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나의 일생
누더기 벗으며 닦고 닦아서
해로 뜨고 달로 뜨고
부서져 몸은 다시 별로 피어나도
변하여 걸어가는 내 모습 하나하나
남김없이 비추어주는 곳
나고 죽고 살아가는 온갖 길이
거울보다 더욱 잘 비치는 나라
누가 나를 몰고
내가 또 나를 몰고 가는 닿는 땅
그 죽음에 이르러 들여다볼 곳도 오직
이 고요한 우물뿐입니다.
죽는 순간의 내 눈빛이 담겨지는 곳
죽는 순간의 내 미소가 비치는 곳
고요를 향하여 / 이성선
높은 산에 눈 내리고 내리고
그쳤습니다. 산이 갰습니다.
구름이 산을 떠났습니다,
그후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고요
바람도 없는 저 孤絶의 산정을
내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말씀 있을 듯 없는 산상을
내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라보다가 이대로
오래 바라보다가 이대로 이 자리에
늙어 죽어버리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입니다.
내 가슴의 고요 / 이향아
너를 바라보는
내 가슴의 고요에서는
낮은 풍금소리가 난다
낙엽은 사철
아름다운 사연의
엽서처럼 지고
그 발자욱마다 기도로 스미리
풍화하는 노래로 잠기리
함께 가는 강물의 유유함이여
함께 가는 햇살의 눈부심이여
너를 생각하는
내 가슴의 고요는
살구꽃잎 흩날리는
4월 훈풍 같다
땅 위에 이런 은혜
다시 없으리
눈물 가득 너를 보는
내 가슴의 고요
고요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저 오실라나
토옥---- 톡!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하늘빛 고요 - 피정(避靜) 일기 / 고진하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 안에서
새로운 신뢰를 얻길 원합니다.
털갈이하는 짐승은 아니지만
갈아입은 새 옷이, 빛나는 현재(現在)이길 원합니다.
해일 휘몰아치는 당신의
바다, 거센 의혹의 물살 견디면서
제 영혼의 진주를 키우렵니다.
고통은 저의 다정한 벗,
반지를 끼듯 삶의 고통과 팔짱끼고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가렵니다.
소지(燒紙)가 타오르듯
사랑은 불타올라야 하는 법. 이미
죽은 저를 위해
비석 따윌 세우지 말게 해 주십시오.
심해(深海)의 물고기처럼 저는 당신에게
눈멀렵니다.
눈멀어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겠습니다.
강진만(灣) 오늘
저 바다에 떠 있는 하늘빛 고요는 바로 접니다.
당신의 크신 은총에 감사할밖에요!
세상의 고요 /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고요, 격렬한 - 내 발 앞의 배추벌레 / 손진은
꼼짝하지 않고 죽은 체하는
한 마리의 고요를 본다
공기들을 일순 긴장시키며
물질이 된 놈의 태연
한낮의 정적과 바람 햇살을
상처로 덮은 채
놈은 격렬하게 떨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금이 갔을 것이다)
몸뚱이를 온통 귀로 만든
저 번지는 선들의 소용돌이
무정부주의자처럼 흔드는 섬모들
허나 웬걸
겁먹은 마음 같은 건 놔둔 채
전신으로 빛과 그늘 대기와 어울리는
저 몸,
속타고 있는 불의 싹들
열리는 몇 칸의 창(窓)으로
나뭇잎들의 옷자락이
초록을 헹구러 다가서다!
뒤이어 구름도 몇……
직물처럼 짜여진 고요의 허벅지 슬쩍 당겨
한 줄에 꿴 꿈틀 산맥
앞의 그늘 휙 돌아보며 가로질러 간다
말들은 품은 채
땅을 쥐었다 놓았다
하늘 모았다 흩었다 하면서
내 몸 속 창(窓)엔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도 쑤셔박으면서
고요한 균열 / 김명철
금줄이 대문을 가로지르자
눈발에 푸른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당 후박나무의 잔뼈까지 드러나는 새벽이어서
부정하거나 정한 것들도 쉬 드나들지 못했다
한 차례 더 늦겨울 폭설이 있었을 뿐 어둠도 가벼움도 바람도 정갈했다 눈 속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집터의 무게중심이 대문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집 벽에 굵은 금이 가로로 그리고 세로로도 지나갔다 몇달 만에 집은 붕괴되었다
집 없는 내 이마를 송곳처럼 파고들던 빗줄기와 햇살
그는 모자도 없이 먼 길을 떠났다
공터의 구석진 오후, 세발자전거의 꺾인 핸들 위로 덩굴풀이 마음대로 발을 얹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옆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거실이었고 마당이었고 드높은 옥상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천 년을 살았다
오늘 아침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와 금줄을 쳤다 내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따뜻한 고요 / 나석중
오래된 뒤주 위가
보기 좋다
꽃병에 꽃이 웃고 있어
꽃도 꽃병도
서로 좋아하고 있어
그 아래 다듬잇돌 위
나란한 다듬이 방망이 두 짝
건네 오는 눈빛 다정하다
뒷전에 물러 앉아
그런 말 없는 것들의
말 없이도 소곤거리는 것들의
주인은 따로 계시면서
보이지 않는 고요가
따뜻하다
고요 / 조상준
처음으로 아이는 자신의 걸음을 걸었다
백화점에서 옷을 계산하는 사이에 어디론가 떠나갔다
나는 덜컹 겁이 나서 온 힘을 다해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내 눈높이에서 모든 소리가 멈췄다
낯선 사람들 틈에 자신만의 삶의 두려움을 느꼈는지
내 핏줄의 끊어지는 아픔을 들었는지
잠시, 그 고요가 풀리더니 홀로 마주한 세상을 끌고 내게로 달려온다
고요 / 신대철
-고비삽화3
9월, 햇빛 따갑고 바람 싸늘한 자브치르*, '고요'를 캐러 작은 둔덕을 내려갔다, 물 흐른 자국을 찾아 빠르게 앞서 가는 고비 노인, 졸졸거리며 따라가는 맨발의 아이들, 가시나무 헝클어진 마른 흙더미에 이르러 노인은 두 발을 벌리고 가랑이 사이로 흙을 파낸다, 잎 한줄기 보이지 않는데 옮겨 다니며 다람쥐 굴 뒤지듯 마른 땅을 파헤친다, 무엇이 손에 잡힌 듯 소리를 지른다, 잎도 줄기도 없이 땅 속 깊이 고요히 들어앉은 '고요', 돼지감자 같고 마 같은 고요', 베어물면 입 안에 도는 흙내와 물기와 비릿한 단 맛, 입 안 가득 메어오는 공복
발가벗은 아이들이 사막을 이러저리 몰고 다니다 구릉 위로 훌쩍 넘겨버린다
고요한 길 / 김사인
지나는 사람 없고
시든 엉겅퀴 대궁만 멀춤할 때 늙은 호박 엉덩이 무거워
져 이제 혼자는 못 일어설 때
늦은 봉숭아 꽃잎 몇낱과 쇤 고구마줄기와 아주까리, 한
사코 감고 오르는 까끄랭이 환삼과 개미들과
먼 데 누워 계시는 윗대 어른들 생각과 다시 콩밭과
잘 벌은 깻잎과 고추밭과 열무 배추와 불쑥한 토란대 몇
뿌리와 순간 까투리 푸다닥 날고, 문득 아픈 아내 생각과
밭둑 수숫대와 영글어가는 나락들과 엉뚱한 흑장미 한그루와
처서 백로 지나 오오 바람도 흙도 풀도 볕에 잘 마른 것,
개미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들로 나는 두루 그득해져
자불자불 졸리면서
전주 이씨네 산소 치장이나 한번 볼까 길을 바꿔 잡으며
어머니 비석에는 남원 양 아무개 여사라고 써볼 생각과 그
럼 학생부군 아버지는 뭐라고 하나 싱거운 생각도 들다가
이 별의 한 모퉁이에 나도 머무는 데까지 잘 머물다가 어
른들 가시는 것 봐드리고, 장인 장모님도 잘 배웅해드리고,
친구들과도 오명가명 지내다가, 세금이나 과태료 같은 거
밀린 것 없이 있다가, 아이들 짝 만나 서로 돌봐가며 지내
는 것 잠깐 보다가, 좀 아파보니 아파서 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아내 말마따나 너무 많이 앓지는 말고, 그
만할 때쯤 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여뀌풀꽃 분홍 수줍고
배추잎 하나가 우산만 하고
다만
고요한 길.
고요에 바치네 / 김경미
내가 어리석을 때 어리석은 일들 불러들인다는
것 이제야 알겠습니다
누추하지 않으려 자꾸 꽃 본다 꽃 본다 우겼었습니다
그대는 쇠무늬 지워진 맨동전으로 이미 닳아 없어지고
라일락 지나가는 소음들 반원의 무덤 같던 아침,
감빛 구름들 리어카째 굴러 떨어지던 위험한
해질녘에,
가을 낙엽들, 노란 형광의 봄개나리떼 같던 착오,
고장난 검정우산같이
눈동자 종일 젖어 접히지 않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안간힘,
물 흔들지 않고 아침낯과 저녁발을
씻는 일이었습니다
고요의 입구 /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떤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 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꽃의 고요 / 김인희
자신의 생을 요약한
색과
형태와
향기가
벌레에게 먹히지 않도록
기도해본 적 없다 꽃은
그 몸에 수없이 상처를 입히는 벌레들에게도
항거해 본 적 없다 꽃은
자신을 해석해 줄 모든 해석자들이 사라져도
아파해 본 적 없다
웃기만 하는 꽃
이유 없이 밟히면서도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꽃은
자신의 생에 대한 해석을 원해 본 적이 없다
저 꽃
자신을 피워 준 그 꽃나무 지키며
그냥 그저 그 광야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의 친구로 서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시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 하얗게 웃고 서 있다
꽃은 생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것
자신을 피운 그 꽃나무 밑에
색을 묻고
향기를 묻고
형태를 묻고
그저 고요히 웃고만 서 있다 꽃은
고요로의 초대 / 조정권
잔디는 그냥 밟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 넝쿨로 덮인 돌 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에 조그맣게 노크 하셔야 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요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행간의 고요 / 최서진
당신 신발에 내 발을 넣어 보는 일
그만큼의 고요를 생각한다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것은 페이지를 슬쩍 넘기는 것처럼 쉽다
말 없는 시간 속에서 바위가 조금씩
당신 쪽으로 기우는 일을
나는 또 고요라 부르는 것이다
명료한 슬픔을 가진 자세로 어두워져 가는 저녁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너에게 가던 구름이
붉다
물집 잡힌 뒤꿈치처럼 부르튼 마음이
따라서 붉다
어깨동무도 없이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
허공은 사라지는 시간에 겸손해지는 깊이를 가진다
문득 뒤돌아보면, 쓱쓱 지워지고 나는
여기는 어딜까
당신의 고요가 내 고요를 신고 걸어간다
염소 똥은 고요하다 / 권달웅
염소 똥은 고요하다.
풀밭에서 싸우는 염소는
서로 물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뿔을 들이받아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일 뿐이다.
염소 뿔은 뒤로 젖혀 있다.
이미 지는 쪽을 가리킨다.
소리의 부딪침은 소통이다.
울음을 삼킨
염소 똥은 평화롭다.
물러나지 않으려고 뿔을 들이받다가
잠시 물러난 염소는
다시 들이받을 생각을 한다.
물러난 대립은 화해이다.
서쪽 하늘에 긴 줄이 하나 걸려 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풀밭에는
고요가 소복하다.
노을이 고요를 팽팽히 잡아당긴다.
거울 속의 고요 / 김완하
가을 숲으로 난 길에는 거울이 하나 서 있었다 걸어오던 길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 거울 속의 고요를 눈여겨보았다
뚜벅뚜벅 걸어갔을 아버지의 발자국은 스미고 이어 내 발자국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아들의 손을 잡고 갈참나무 한 그루 쓸쓸히 잎을 비우고 있었다
싸리나무 한 그루도 가파른 제 어깨를 스스로 보듬어 안고 있었다 순간 숲의 풍경을 찢으며 흰 구름 한 자락 거울 속 고요를 맑게 지우고 간다
말채나무 채찍이 숲의 등짝을 후려 팬다 가없는 시간의 자맥질 속으로 어둠이 와 숲의 고요와 깊이를 재우고 있다
고요의 결 / 조창환
연꽃 벌어지기 전 이른 아침
연잎에 맺힌 물방울 탱글탱글하다
저 맑고 단단한 적막의 흔적 안에는
고요의 결을 쓰다듬던 별빛의
온유溫柔와 수치羞恥가 스며 있다
작은 새의 날갯짓이 스치고 지나간
허공, 파르르 떨리는 연 밭의 혼
어떤 떨림은 잘 쓰다듬으면
이토록 매끄러운 고요가 되는구나
숨 막히도록 은밀한 교감을 나눈
황홀한 눈빛과 속살과 혀의 어둠
고독과 적막 안에 깃든 수줍은 울음
해독할 수 없는 지상의 빛을 품고
중력을 따라 미끄러지는 고요의 결에
신비로운 기품이 스며 있다
고요의 힘 / 안경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내달리는
근육질의 등짝 같은 산맥을 연모하는
차가운 바다는 너무도 절절하여
산은 뭉텅뭉텅 죽음처럼 끊어진다
섬 섬 절벽 피오르드 푸른 핏줄
아득히 솟은 바위의 단칼에 베인 자국
사람의 오감으로는 닿기 버거워
뭉크의 절규만큼이나 막막한 고요다
북위 60도를 넘어
세상은 드디어 조용해지고
사람의 혀는 빙하를 말할 수 없다
무엇이 무엇에게로 흘러서
저토록 깎고 끊어내고 녹일 수 있을까
거대한 산맥 나뉘고 나뉘어
서로를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물가에 매어놓은 작은 배 한 척
제 비늘 털어내느라
잔물결 섬과 섬 사이로
수백만 년 녹아 흐르는
에메랄드빛 열정을 타고 번진다
닻줄 풀고 싶은 행인
거대한 고요를 마신다
고요의 음계
- 생명의 환幻
김추인
문득 궁금해지는 고요의 깊이, 어느 만큼 깊어질 때 임계의 음역에 깃드는 것인지
그 떨림의 경계에서 피었을 꽃을 조우하다
미농지 빛 엷은 잠 속에서 나비를 좇는 듯 하느작이는 나울거리는 꽃의 날갯짓.
Bb, 환타지 풍의 몽환적 고요가 꽃잎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몇 초 사이 젖비린내 헤집으며 오시는 어린 목숨을 보다
그대 물안개 하늘 오르는 해율海律 본 적 있으시던가
그 함묵의 깊이로부터 도드라져 나왔을 희듸흰 배냇짓 뭉클 사무쳐오는 젖내 아득하던 기억 있으시던가
일령 아기의 물푸레나무 잎새만한 잠 곁
고요의 옷을 입은 저 깃 치는 소리는 그냥 희다 우주가 거기 계시다
고요를 시청하다 / 고재종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 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 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어항 속의 고요 / 이영옥
물고기는 사나운 바다를 그리워했다
플라스틱 수초는 물고기를 위해 거짓 춤을 추었다
부드러운 진동에 익숙해졌을 때
물고기의 의심은 가라앉고
말갛게 눈뜬 평화가 물고기처럼 잠들었다
물은 소리를 누르는 힘으로 사랑을 감추고
온몸이 귀인 어항이 물고기의 눈물을 들어주었다
물은 물고기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너는 내 안에서 너를 지킬 뿐이지
그렇다면 울먹이는 어항은 누구의 감정인가
물고기는 가짜 팔이 만든 다정한 품속에서
내일도 무사할 거라고 믿었다
크기를 잴 수 없는 흔들림에 올라탄 채
고요에 닿는 법 / 김제김영
어떤 노래도 부르지 말 것
어떤 문장도 기록하지 말 것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말 것
어떤 손길도 기대하지 말 것
걷지 말 것
그냥
휘어질 것
고요에 대하여 / 나해철
당신과 저의 거리에서
모든 소리는 생겨납니다
사랑해요라는
속삭임은
열띤 살갗 틈새를 비집고
새순처럼 새어 나왔지요
맑은 종소리와
명랑한 새들의 지저귐은
함께 거닐던 광장의
맞잡은 두 손 사이에서 피어났고요
바람 소리는
멀어져가는 당신을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같이
창가에 매달려 덜컹거리고요
으헝으헝
으헉으헉 울음은
가슴과 가슴의 간격이
천 길 낭떠러지여서이고요
적막은
당신과 저의 거리가
무한에 가까워져서 피어난 것입니다
지금의 고요는
소리조차 주검이 된
텅 빈 흔적이
한없이 넓어지고 있어서입니다
당신과 저의 사이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고요함에 대하여 / 야마오 산세이·일본의 시인이며 생명운동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