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권한, 사도직의 조건
잠언 30,5-9; 루카 9,1-6 /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2024.9.25
추분이 지나며 날씨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완연한 가을 기운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시대의 징표가 있었습니다. 바로 9월 23일에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입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봉헌한 잔치였습니다. 1974년 엄혹한 유신 군사 독재 시절에 지학순 당시 원주교구장 주교의 체포와 투옥을 계기로 결성된 정의구현 사제단은 ‘암흑 속의 횃불’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추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르신 파견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셨는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몰려 들었으므로 당신께서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기 어렵다고 판단하셨든지 아직 사도로서 충분하게 양성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을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보내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는 사도직 실습을 하듯이 등 떠밀려 파견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과분하게도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 힘과 권한을 주신 스승이 제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주문을 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야말로 철저한 비무장과 가난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듯 무리해 보이는 요구를 하신 배경에는, 그동안 전국에서 당신을 찾아왔던 군중 가운데 치유와 구마의 기적으로 시혜를 받은 백성이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이 도와 주리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무장을 하지 않고 먹을 것을 챙겨가지 않아도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토박이 지지자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추정입니다.
하지만 그 백성이 진짜로 믿음을 지니게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므로 조건부로 요구를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하지만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5)
오늘날에는 사도직 활동을 행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그 누구도 이렇듯 가혹한 조건 하에서 행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특히 철저한 가난의 조건이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직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개 사도직의 여건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그보다는 사도직을 행하는 당사자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힘과 권한이 약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선교 활동에서 그렇지요. 오늘 복음의 상황 역시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힘과 권한은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니다. 성령의 이끄심과 기운을 받아, 구조악이든 개인적인 악이든 성령으로 맞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어제 50주년을 맞이한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은 미사에 앞서 명동 지하성당 내 순교자들의 유해 앞에서 이런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다짐인 셈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제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 이름을 빛내고 아버지 뜻을 펼치려 그날 하루를 오롯이 봉헌합니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 세상의 처음을 보여주신 예수님 따라 세상이 받아먹을 몸, 받아 마실 피가 되고자 십자가의 고난을 수락합니다.
사제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기도하면서 나눔, 섬김, 정결의 삼덕으로 세상과 다른 삶,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사제는 어디서나 환희의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한 성모님처럼 거룩한 영과 빛과 힘을 받았으므로 외로워도 힘차게, 괴로워도 기쁘게 세상을 책임집니다.
사제는 어느 때나 고통의 사람입니다. 타인의 고난을 자기 문제보다 긴급하고 중대하게 여기며, 그래서 세상의 고달픈 짐을 가벼운 멍에에 한가득 싣고 거뜬히 묵묵히 오르고 또 오릅니다.
사제는 자기가 없는 영광의 사람입니다. 지상 최고의 백척간두, 십자가에 올라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낮은 이 높이고 작아진 이는 크게 모시되 자기는 영영 잊어버리는 영광의 사람입니다.
사제는 빛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하는 누구인지 잊은 적 없는, 자기를 태워서 세상을 비추는 일이 전부인, 암흑 속 횃불을 존재의 이유로 여기는 빛의 사람입니다.
2024년 9월 23일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교우 여러분!
박해시대 교우촌 신자들의 다짐을 방불케 하는 이런 사제들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신자 여러분도 하느님의 가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성령의 권한을 받아 사도직에 불리움 받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첫댓글 우리는 너는 어느쪽인가? 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ㆍ좌우,빨강파랑..
그저 "주님의 편" 에 서 있을뿐입니다ㆍ
그것이 그들이 외치는 "정의" 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