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1997 년 IMF 전후이다
그당시 대기업에서 미국으로 수출 많이 하는 애리에 버턴이 달린, 버튼다운 남방 샤쓰가 미국시장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서 미국 국방성 바이어가 주문하고 싶다고 해서 물어 물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생산 수출하고 있는 두산 그룹 사업부를 알아내서 방문하여 설득한 결과, 일단은 그들의 오더기본 수량 은 10만장 20 만장 인데 , 억지로 설득하여 미국 국방성 오더이고 당신들은 절대 손해 보지 않고 등등 집요하게 설득하면서, 한번 잘 팔리면 우리도 많은 량을 주문할수 있다고 유인 하였드니 일단은 동의하여 적은 수량이지만 우리 오더를 수행 하기로 했다 .
조건은 수출후 5% 를 콤미션을 바이어 입금후에 , 나에게 지급하는 조건으로 1 차로 그들이 하던 그대로 약 10,000 장을 수출하고, 몇달후 2차 선적 10,000 장 하며 차곡차곡 수출했는데 바이어 3 차 리오더가 접수하고 문제가 발생 했다,
두산 측에서 더이상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두산의 그 부서가 이익이 많지않아 부서 자체가 없어 지게 되었다
그부서가 없어 젔으니 아무리 해도 이미 오더 들어온 수량을 만들수 없단다.
나는 바이어 요구사항을 100% 들어줘야 해서 고민을 많이 하니까.
두산 담당직원이 나를 잘봐서 말하길 "모든 거래처를 인계 할 테니 나보고 직접 만들라고 한다 "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들 노하우를 준다고 하니, 한번 직접 만들어 보자 결심하고 생전 처음으로 직접 생산을 하기위해 인수를 받고 직접 생산에 들어갔다. 완전 생짜백이 걸음마도 제대로 배우지 않고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 라는 일념으로 , 지금 생각하면 모험이고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러나 , 원단과, 프린트 공장, 부자재 공장 들 약15 개 업체 , 그리고 부산 하청공장 3 군데 등 포장 박스공장 까지
전부 인계받은 상태로, 그많은 업체가 하나도 틀리지않고 잘 도와줘서 , 생산을 위해 부산으로 달려가서 , 하청 공장을 설득하고 상담후 제품이 아무 사고 없이 잘 선적되어 5% 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15~20 %까지 올려 여러번 선적을 해서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 문제가 발생 했다.
생산 수량이 늘어나 5만장을 생산후 포장완료 된 제품을 까다로운 검사통과후 선적 할려고 하니 , 갑자기 흔해빠진 개방 코타가 ( 누구나 피복조합에 신청하면 주는 ) , 돈 주고도 구할수 없는 상황이 되고 제품 10 불인데 코타값은 12불~ 15불 이다, 문제는 손해를 보드라도 선적을 해야 하는데 코타를 구하지 못하면 선적이 불가능 해서 바이어에 대한
신용과 완성된 제품을 거의 버리다 싶이 싼 가격을 받고 처리해야 했다.
선적 되지 못하면 이태원에서 원가 이하로 팔아도 10장 내외의 소량이다, 나머지는 쓰레기다.
큰일이 났다 . 옷 한장에 약 8000 원 정도 드니 큰돈을 손해보기 되었다.
이 코타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대우그룹에서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고, 난 그곳에 가서 마지막 남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한국 전역에 코타가 난리가 나서 담당 부장을 만나러 가면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
수많은 업체가 동일한 어려움이 있게되어 , 어떤이는 코타 때문에 아들이 다 죽어 간다고 아버지가 와서 사정사정 해도 되지 않았다. 바로 장사의 원리는 다 같다 .
만나주지 않는 부장을 만나기 위해 좀 치사한 방법 이지만, 정장을 하고 대우직원이 화장실 가기위해 사무실 자동문이 열리고, 그틈을 이용 열린문으로 얼른 몰래 들어가 나이도 어린 부장 에게 두손모아 빌면서 나의 전력을 빠른 시간에 설명해서 설득하는데 4번째날 코타를 양도를 받는데 성공한다,
나는 " 공군에서 비행기만 타다가 나와서 어렵게 회사를 운영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다가 큰일이 닥첬다고
하고 몇일을 반복방문한후, 몇일후 자기 외삼촌이 공군 3 성 장군으로 예편했다고 한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외삼촌 3성 장군을 잘 안다고 하고 평소 존경하는 선배라고 하면서 그러면 외삼촌을
봐서라도 공군 출신인 나좀 살려 주세요 하고 간청 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대기업에서 나와 독립할때 내가 제일먼저 오더를 주겠다고 실행 가능성이 희박한 먼 미래를 약속하는 당근도 제시하며 하면서 애걸복걸하니, 불쌍해 보였는지 설득 해서 코타 양도 받을수 있었다.
그것도 시중가격 12~15 불을 저렴한 2불에 양도 받아 무사히 상품을 선적 했지만 많은 날자를 지나서 선적 했고 바이어에게 국제전화로 짧은 영어 실력으로 코타 사정 이야기를 충분히 설명 했드니 선적이 허락되어 선적날자 지나서 수출하게 되었다.
불과 한달여 기간동안 나는 선적하지 못하면 손해액이 너무 크서 ,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고 어마어마한 고통이 있었다.
향상 그렇게 했듯이 무사히 수출후 그부서 전체 80명 회식 하라고, 내가 지갑을 열어 통큰 기부를 했다 .
공사 10훈중의 하나 "은헤를 받았으면 반드시 보은 하라" 는 구절대로 행동 했다. 돈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
그후 10여년후에 그부장이 새로운 의류사업체를 만들어 나에게 왔지만 우리가 취급하지 않는 캐주얼 잠바 쪽이라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선적후 돈을 받을시기에 IMF 가 터저서 미국달라로 받은 제품값은 환전하니, 1 불에 800 원 정도 하던 환률이 1700 원 까지 올라 이익이 100%보다 많았다.
하늘이 불쌍한 나를 애처롭게 보고 돈벼락을 내려 줬다.
그바람에 그해 나는 많은 이익으로 조그만한 회사가 일년에 3억이 넘는 세금을 국가에 내야 했다.
한참 회사가 잘나갈때 , 나는 정신이 없었다 가죽제품도 생산해서 수출을해야 했고 남성정장, 여성정장,
각종 니트의류, 각종 세타의류 ~~~ 등등 전세계 미군PX 스토아에서 팔리는 모든 종류의 의류를 직접 혹은 하청으로
생산하고 수출하며, 직원 15명 정도관리와 뒷처리 회계까지 세법에 반하지 않게 일처리, 나는 만능인이 되어야 했다,
군에서 나와 잘 알지도 못하는 여러 종류의 옷을 한치의 빈틈없이 생산 해야했고 제품품질과 까탈스러운 AAFES 검사를 통과하고,선적일자에 맞게 부산까지의 제품수송, 등등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 필요 했다.
그러니 그당시는 돈 셀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여기서 배웠다 지극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감복하여 복을 내리는 구나 .
고생뒤에 낙이온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 났다 .
IMF 때 주변에서는 죽는다고 아우성 인데 나는 표정 관리해야 했다 .
문중3년 후배가 이촌동 조흥은행 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는 바람에 지점장에게 미국 정부에서 발행하는 오더 장을 믿어 돌라고 하면서, 나는 군에서 평생 연금을 받으니 당신들 은행에 누를 끼치지 않을것 이라고 설득하여 , 그 당시 통하지 않았던 제도를 새로이 만들다 쉽히하여 내가 필요한 만큼의 큰 액수를 은행으로 부터 융자 및 담보로 하는데 설득에 성공 하였다. 자본도 별로 없는 조그만 중소기업에게 몇십억씩 담보제공및 융자는 어려웠지만 은행은 나를 믿고 아무 지장이 없도록 자금지원을 해 주었다. 내가 가짜로 얼마든지 오더장을 만들수도 있는데 ㅎㅎㅎ
그 미국 국방성 오더장을 근거로 담보나 , 돈 없이도 로칼 LC 를 열수 있어 문경후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IMF 때 동부 이촌동은행에서 대방동 회사를 오는 중간 한강다리를 운행중 나는 내 허벅지를 한번 꼬집어 봤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 수출대금과 원부자재 값을 제하고도 엄청난 금액이 통장에 남아있다.
군에서 재형저축 최대로 보너스까지 3년을 부으면 천만원이 안되었는데 이건 몇억이 찍히니 내가 놀랐지요.
그러다가 한강 대교 중간 쯤 왔을때 나는 "이젠 우리나라가 망하는구나 돈이 많으면 뭐 하겠나 독일에서 인프레이가
심할때 돈 한지게 지고 가서 맥주 한병 사는 역사를" 공부 했으니까. 나라의 앞날이 걱정 이였다
한창 IMF 기간중, 나라가 난리가 난다고 모두가 라면을 사재기 해서 집집마다 농심라면을 박스채로 사서 보관 하는 바람에 회사 바로앞 농심 회사에 엄청난 돈이 들어왔다.
점심 식사후 1 층 상업은행( 농심라면 앞) 지점장실에서 커피한잔하고 있을때, 농심에서 재무를 당담하는 이사가 전화가 와서 200억 의 거금을 맏기면 이자를 23 % 준다고 하면서 상업은행 본점과 통화 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나도 맏기면 그렇게 이자를 주는가 하고 물어 상당한 거금을 고율의 이자 6개월간 받아 봤다 .
그런데 . 이제 유언비어는 상업은행이 부도 난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국민은행으로 부랴부랴 옮기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다음에도 지옥 다녀온 이야기를 해 드리도록 하지요
첫댓글 나는 문경인의. 끈질긴 도전 정신으로.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로 이 무서운 서울도깨비 세상
에서 용캐도 살아 남은것 같다 ~~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ㅎㅎ
보리밥 감자썪어서 각종나물 잔뜩 넣어 비밥밥으로 배 채우던 그정신
성당에서 주는 강냉가루로 만든 빵 얻어 먹어가면서 허기진 배 채우던 그정신 ~~
봄이면 산과들에 가서 꽃잎과오디 등 원 세상에
먹을수 있는것은 전부 먹어 배채웠던. 그시절
감사해야 해여 우리모두 아직까지 건장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억센 문경동기들이여 ~~ 안그래여 ?
공군 전역후
어려운 사회세파를 억척으로 헤쳐
위대하게 창출해낸 전편을 다시 상기시키고
하매나 하며 후편을 많이 기다렸었네^^
내인생 자체가
유랑투성이의 실패작이라 차지 하고라도
친구의 어쩌면 행운이 로또처럼 따라붙는 (노력이 더 컸겟지만)그것은
시절 자체가 그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한것도 부인 않으리오^^
이미 고인이된 용띠 의 내세째 동생은
IMF때 부도를 당해 연세부도를 일으키고
낙심해 술로 세월 보내다 인생자체를 부도내 버렸었지
그기에 비교하면
딸러가 3배 가까이 튀어 전화위복 이란 사자성어를 성취한 그대는
분명 행운아 임에,.......^^
그래도 고향사랑이 넘쳐 긍지를 품고
그 성공담을 고향의 덕에 비유하는 그대 심성 도 높이 샀어라
지옥담이 또 있다니 차분한 맘으로 쓰시길 벌써 기다려 지는군~
기다리는 사람 한명이라도 있어면 쓰기 시작 해야 겠다 고맙네 자내 동생에겐 미안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다"란 말이 종태 친구님에게도 있었네요. 당시 IMF로 망한 사람도 많았고,
많지는 않지만,행운이였던 사람도 있었지요.나는 1996년도 한일합섬을 명퇴하고 원사 오파상을
하고있었는데, 내가 직접 손해본것은 없었지만,거래처들이 부도 나면서 물량이 줄어들어
간접피해는 입은셈이지요..ㅎ
(오파상이라는것이 부동산 복덕방 같이 수출업자와 수입업자 중간에서 거래가 성사되면 약간의
커미션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위험부담은 적지만,수익은 크지 않아서 겨우 현상유지 수준인데
세상이 교통,통신등이 발달 되면서 한두번 연결 시켜주면 다음부터는 저들끼리 바로 거래 해버리니
역활이 점점 줄어들어 수년뒤 회사를 정리했지요.)
로칼LC로 혜택을 많이 보았네요...로칼LC제도는 한일에서 적극 추진하여 만든 제도인데...
수출업자가 오더장이나 LC를 근거로 은행에서 로칼LC를 발급받아서 인수증과 원자제 업체에
제시하여 원자제 받아서 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 받으면 원자재 대금을 갚으면 되니까 외상장사
하는셈이지요. 내가 로칼부 과장으로 3년 근무하다가 홍콩지사로 나갔지요...ㅎㅎ
진작에 만났어면 서로 도움이 될뻔 했네
이미 때늧었지만 아쉽다
근면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
그때 조흥은행에서 나를 도와준 후배가 10년 정도 지난후 사회에 나와 나에게 전화 가 왔다
선배님!! 청주 비행장 골프장 식당 그늘집 운영에 2억에 나왔는데 싼것 같다고 인수 해도 되는야고 묻는다 .
나는 절대 안된다 그것은 사기다 일년에 수익이 그렇게 나오지도 않고 일년 마다 경쟁 입찰 이니까 사기다 하면서 위험에 빠질뻔한
그후배 안전하게 지켜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다른분야에서 일하다 새로운 분야로 사업을 하려고 하면 성공 확률이 3% 미만이란 소리가
많이 돌아 다닌다 3% 미만에 도전해서 실패 하지 않은 나는 하늘이 도운것이라고 생각한다 .
조회수 60명을 넘겨 3 탄 준비 했읍니다
지금까지 사업 노하우 전부 맑히는데 누가 복사 할 사람도 없고 , 문경시장 할 일도 없고 동기회장 다 해봐서 감투도 신경 않쓰도 좋고
내글읽어보고 까칠하게 비위 상하는 이야기도 없고 나이가 들어 정말 좋다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마음대로 이야기 할수 있어서 ~~ㅎㅎㅎ 그냥 재미로 순수 하게 봐 주세요
이렇게 많은 댓글과 방문자 에게, 그옛날 배고플때 먹고 싶었던 , 대파 잔뜩 넣고 한우와 무우를 넣고 가마솥에 끓인 소고기국밥에다
뜨끈 뜨끈한 나무때서 지은 기름 졸졸 흐르는 하얀 쌀밥에 김장김치 곁들여 배차전 진짜 참기름 양념간장 찍어서 같이 먹어면
인생 행복 하련만 또 코로나 연장이라 벌금 내고 모이기는 ~~~~ 그렇네
위 3성장군 출신은 선배로서 공사교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했고 , 생도때 영어 방송을 듣다가 아나운서가 영어를 잘못 가르켜서 전화해서 시정한것이 인연이 되어 둘이 결혼을 했고, 옛날 남북조절위원회 한국측 여자대표인 분이 부인이였다 .
지금도 문막 근처에 전원주택에서 조용히 살고 있고 , 당신 친인척 덕분에 내가 어려운 시기 큰도움이 되었다고 하고 비온는날이라 대방동 공군회관에서 좋은 선물과 함께 집까지 내차로 깍듯이 모셔드렸드니 무지 좋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