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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폐출 당시 장희빈은 둘째아들을 만삭 상태였고, 왕비로 오른 해인 1690년 출산을 하여 둘째 아들을 얻었음.
숙종이 크게 슬퍼하며 이 왕자의 이름을 (성할 盛 목숨 수壽 )하여
성수라 붙여주었음.
대군 성수(1690~?)
부 - 숙종
모 - 희빈장씨
형제 - 경종
장희빈의 아들로써 훗날 왕위에 오른 경종의 존재는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경종의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곤 함. 그래서 설명해보자면 대군 성수는 장희빈이 중전 자리에 있을 때 태어나서 사실상 숙종의 유일한 '적통왕자'의 신분이었음.
하물며 막 중궁전에 오른 장희빈한테도 매우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아들인 셈이었음. 이 왕자의 존재가 있고 없고가 당시 중전이었던 희빈의 미래를 책임져줌과 동사에 역사자체를 뒤바꿀 수도 있었기 때문임..
하지만 대군 성수는 태어난 지 두달 만에 죽었음. 사유는 돌연사였는데 정설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야사에서 외척 일가의 사주를 받은..(아마도 인현왕후 쪽을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 한 궁녀가 깨죽을 잘 못 먹여서 그렇다는 카더라가 민간에서 한창 돌았다고 함.
어린 왕자를 허무하게 잃은 희빈도 마음의 병을 얻은게 원인이었는지 이때부터 머리에 종기도 번지면서 앉아있는 날보다 누워있는 날이 많을 장도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음. 숙종도 눈물을 보이고 식사까지 거르면서 슬퍼했음. 성수의 존재가 당시 희빈과 희빈을 아끼던 숙종에게나 모두에게 그만큼 컸다는 반증임.
다시 이 성수가 태어나고 죽은 전후 배경을 살펴보자면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온 건 음력 4월의 일이고 영조가 태어난 것은 음력 9월임. 인현왕후가 재입궁할 때 숙빈 최씨는 임신중이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숙종의 유일한 자식은 경종뿐이었음.
그런데 성수 왕자가 계속 살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인현왕후가 과연 재입궁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희빈으로 물러 났을 때도 신하들 중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었음.
“9년과 6년,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면서 인형왕후와 장희빈이 왕비로 있던 것은 세월이 오래고 짧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세자가 있으므로 도리어 중하다고 한 걸 보면 장희빈에게 세자와 더불어 대군까지 있었더라면 인현왕후의 복귀는 글쎄?
신하들 입장에서도 세자와 대군 두 왕자를 낳은 중전을 폐하자고 하면 당파와 상관없이 결사반대하지 않았을까? 숙빈이 임신중이었지만 아들을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당시의 영아사망율을 볼 때 노론도 필패의 도박이었을 거임.
대군의 지위도 문제가 됨. 인현왕후가 복위했을 때 경종은 인현왕후의 양자가 됐는데 그럼 대군은? 엄마는 후궁인데 본인은 대군이 되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하게 됨. 그렇다고 엄마한테 맞춘다고 태어날때부터 신분이 무려 적통왕자였고 아무 잘못도 없는 대군을 군으로 강등할 수도 없고... 조선 시대 종법상 장희빈 제사를 지낼 봉사손이 없어지니까 인현왕후가 경종이랑 성수 왕자 둘 다 양자로 들일 수도 없고.
설령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았더라도 성수 왕자가 있었으면 경종 시절에 노론이 보여줬던 하극상이 일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봄. 경종이 온갖 모욕을 참으면서도 연잉군(영조)을 살려 줬던 이유는
삼종(효종,현종,숙종) 혈맥을 이은 오직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까..
그런데 내 친동생이 있다면 그것도 연잉군보다 4살 연상인 적통대군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짐.
2살 아래여서 바람막이 하나 없던 경종에게도 의지가 꽤 됐을 것이고 성수 왕자가 왕세제가 안되더라도 성수 왕자의 자식으로 후계자를 삼을 수 있었을 테니 노론이 그렇게까지 무시할 수도 없었을 거고 알고 보면 꽤나 성깔 있던 임금님 경종도 막 휘두르고 살지 않았을까 연잉군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종친 중 하나로 살았을거임.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성수 왕자가 살았더라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아니라 폐비 민씨와 왕후 장씨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첫댓글 오..... 재밌다 역사가 바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