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旅愁)
이골목 언저리였지 그집이 있던곳
드물던 서구풍 자리 아담한 그싸롱
애닲은 집시 음악에 가슴 녹이면서
애닲은 사랑을 하던 청춘
그리운 그날
희미한 등밑에 앉은
그녀는 고왔지 말수도 적지만
정말 순하고 착했어 마음은 사랑하면서
말로 내지 못해 가슴만 혼자 태우던
청춘 그리운 그날 ,,
한국의 짐리브즈라 불리는 하수영은 묵직하게 깔리는 중저음으로 시작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비롯하여
가수 윤정하에게 준 찬비, 여수, 길 등 많은 곡을 남겼지만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만 히트했습니다. 하수영은 고생만 하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채 34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의 노래중 여수가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좋아 자주 듣습니다.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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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한창 활동 중 인 1977년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1977년 6월21일 오전 고속도로에서 타고 가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해 늑골과 턱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이후 하수영은 무려 9개월의 병원 입원 치료를 마치고 1978년 MBC 라디오 드라마 ‘고백’으로 컴백을 하게 된다.
퇴원한 뒤 무대로 돌아온 그는 ‘고백’에서 작곡가 길옥윤의 제자 역을 맡았다. 그리고 길옥윤이 완쾌를 축하하며 만든 노래 ‘재회’를 불렀다. 그리고 그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는 그의 재기를 바라는 의미로 규정에도 없는 격려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하수영은 음반을 내고 대중들과 만났지만 대중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밤무대와 간혹 이어지는 방송 무대에 나서다 뇌출혈로 쓰러져 1982. 1. 1일 밤 34세의 나이로 입원해 있던 그의 고향 부산 백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며칠 전부터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서 입술을 움직이는 듯이 보였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생전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 이라는 칠순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와의 이별이 서러워 넋을 잃고 흐느낀 주변 사람 중에는 미스 김이라는 젊고 예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하수영이 입원한날부터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병에 매달려 정성을 쏟았다.
깨끗하고 청순한 눈동자로 고통에서 신음하는 하수영의 눈물을 대신 담아내던 미스김과 하수영은 어떤 관계였을까?
하수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소리 없이 병실을 떠나 자취를 감추었는데 주변 친지들도 그녀와 하수영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당사자들도 남긴 말이 없었다. 연인이 아니었다면 인정 많은 팬이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가수 하수영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좋아하는 여성팬들이 많았는데 별세 후 빈소에 문상 온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하수영을 좋아하는 순수한 음악 팬들이었다.
하수영은 가수가 된 뒤 10곡 정도의 노래를 불렀는데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찬비’ ‘청산별곡’ ‘길’ ‘여수’ 등이 있는데 1976년에 발표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만 크게 히트를 했다.
그 노래는 그해 가요무대를 진동시키며 최고의 디스크 판매 기록을 세웠다.
다시 하수영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보면 하수영의 집안은 좋았다. 아버지는 청백리로 꼽히는 법무부의 고위 관리였다. 하지만, 하수영이 경남중학 2학년 때 별세를 했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마지막 월급봉투와 퇴직금, 바깥 물정을 모르시는 어머니와 3남 3녀 대가족이었다. 하수영은 6남매 중 끝에서 둘째였다.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일찍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고물 기타만 들러메고 하루종일 걸리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해서 고교 동창인 대학 2년생 친구의 좁은 자취방에 묵었다. 그러나 오래 얹혀 살 수 없었던 그는 서울 성북동 산비탈에 있는 움막같은 무허가 빈집에서 살았다.
3개월정도를 그렇게 소일하다가 동대문 스케이트장 부근에 있는 원로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음악학원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해 사무실 잡일을 해주고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인데 빗자루와 걸레질도 하고 서무일도 하고 틈나면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불렀지만 가수가 될 길은 보이지 않았다.
1967년 당시에 한창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길옥윤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길옥윤은 그에게 곡은 주지 않고 악기를 운반하는 짐꾼부터 시켰다. 불만없이 몸으로 때우는 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노래 한곡을 취입하게 됐다.
‘사랑은 홍역’. 죽을 힘을 다해 노래에 정성을 쏟았지만 빛을 못보았다. 다만, 이때부터 취입곡이 있는 가수로 인정을 받아 지망생이라는 딱지는 떨어졌지만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히트 가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것은 8년 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살롱가의 무명가수에서 인기가수로 떴지만 후속곡이 받쳐주지 못해 빛을 잃고 가요계 주변을 돌며 방황을 거듭했다.
그의 단짝 죽마고우는 하수영은 운이 지독하게 없는 불운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했다.
큰 재산은 만져 보지도 못한 채 밤무대를 떠돌며 살다가 한때 친구와 가구점을 차렸으나 실패해 쇼크로 쓰러지기도 했다. 한번도 마음 편하게 돈을 써본 적이 없으니 재운도 지독하게 따르지 않았다.
“나는 죽으면 生花(생화)로 덮인 花棺(화관)에 들어간 채로 재가 되어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가족들이 유언대로 육신을 꽃과 함께 화장해 하늘로 떠나 보냈다.
가수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죽거든 생화를 덮어 화장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고생했던 그 맘을 헤아려 볼 것도 같다.
미혼의 총각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명곡만을 남긴채 젊은 나이에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며 이승을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을까?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여러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좋은 노래들을 많이 남겼을 텐데 하수영님이 가엾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여러 가수들이 불렀지만 어떤 가수도 하수영 만큼 잘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부디 좋은 곳에서 영면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추억에 젖게하는듯
잘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旅愁는 정말 여행중 향수를 느끼게 할만큼 애절하고 가슴을 파고드는듯 합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기정수 님
닭띠방에 오셨드군요 반가웠습니다~!
하수영의 ‘’여수 ‘’ 오랫만에
들어 봅니다 하수영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자세히도 올려 놓으셨네요
읽어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34세의 젊은 나이로 햇빛을 못보고 갔다니
참 안쓰럽네요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어머니는 결혼도 못한 아들을 보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오랫만에 하수영의
노래 잘 듣고 갑니다
하수영에 살아온 긴글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동갑인 정하나님의 초청으로 댓글을 남겼습니다. 하수영의 노래는 어딘가 모르게 애조가 있는데 인생도 그렇게 살다간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 최저음의 베이스를 가지고 있어 좋은 노래를 얼마든지 남길수 있었을텐데 아까운 분입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기정수님~
참 좋아 했던 노래네요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 하수영씨~
정말 아까운 분인데 ........
간만에 잘 듣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노래는 모르는 분이 많은데 알고 계셨군요. 삶방에 올리신 글을 보고 하수영의 여수가 생각났습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하수영 가수의 이 노래는 처음 듣네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중 저음 에 부드러운 목소리
너무 좋았지요
반갑습니다. 하수영이 작곡하여 윤정하에게 준 찬비도 하수영의 노래로 들어보면 참 좋습니다. 그만의 부드럽고 묵직한 저음에 애닯은 정서가 느껴집니다^^
몰랐던 얘기를 알게 되었네요
하수영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노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만 히트하고 고생만하다 떠난 아까운 인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