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싶다 - 사윤수
나의 꿈은 반짝반짝 찰랑찰랑 흘러가는 만폭 냇물 가에 고쟁이 입고 퍼질러 앉아 빨래를 하는 것이다. 만산홍엽 병풍 삼고 소살소살 물소리에 맨발을 담근 채, 한세월 무심히 빨래를 하고 싶다. 얼룩지고 때 묻은 마음의 빨래들도 다 끄집어내어 툭툭 탁탁 방망이질 하고 술렁술렁 헹궈 너럭바위에 늘어 말리면 좋으리라. 그리고 벌러덩 드러누우면 눈이 알싸하도록 푸른 하늘이 거기 높이 있으리라.
1.
농경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빨래는 피해갈 수 없는 노동이었다. 여자라고 하니 달거리 나이라도 돼는 줄 아는가 모르겠지만 거의 예닐곱 살 만 되면 빨래를 해야 하는 건 기본이었다. 빨래를 수북이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인 채 간당간당하며 미나리꽝 옆의 수로나 친구들이 모이는 곳, 혹은 좀 멀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빨래터로 향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삼학년 쯤 이었을까. 동생을 업고 빨래 대야를 옆에 낀 채 걸어가던 나를 무슨 이유로 때리려고 쫓아오던 큰 외삼촌을 피해 달아나다가 내가 그대로 둑길 아래 도랑에 빠졌던 기억이 아직 선하다.
까치가 동동 얼어 죽은 겨울, 얼음이 얼었다고 누가 빨래하기를 면해주랴. 고무장갑이 아직 시골구석에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오동지섣달에도 찬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얼음장이 놀라 자빠지건 말건 빨래 방망이로 얼음을 깨고 비밀처럼 흘러가는 여울물에 부르튼 손을 담그며 빨래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냇가에는 큰 물줄기를 벗어난 저만치에 미지근한 물이 고이는 작은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것이 온천의 실오라기였는지 아니면 물이 고이면서 햇살에 데워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구세주는 표녀(漂女)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거기에 번갈아 손을 담가 녹이고 양잿물로 만든 거무노릿한 사분(비누)을 빨래에 치대며, 여인들은 가족사 세상사를 주워섬기며 엄동설한 노천세탁을 견뎌갔다.
2.
그 시절 여성들의 노동은 어느 것이나 과중하였다. 험한 시집살이까지 있었으니 대가족 구조에 하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해냈을까 싶다. 그럼에도 빨래에는 노동의 개념을 넘어서는 어떤 큰 의미가 숨어있었다.
의식주 자체가 빈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빨래를 통해 그 삶의 고단함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요즈음은 온갖 계면활성 세제와 세탁기가 의기투합하여 빨래를 해주기 때문에 거의 방망이질을 안 하지만 옛날에는 빨래의 때를 잘 빠지게 하려면 방망이질을 꼭 해야 했다. 길쭉한 방망이는 윗면이 맞배지붕 모양이며 밑면은 완만한 반원형이다. 밑면이 빨래와 마찰이 잘 되는 각도를 유지해야 하고 방망이질에도 빨래의 두께와 결에 따라 강약 강약약 두드리는 요령이 있다. 그래야 손목과 어깨가 덜 아프다.
때로는 빨래를 과하게 두들겨 패는 아낙이 있는데 바로 그 비고의적 합법적 몽둥이질을 통해 여인들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설사 당시의 여성들은 빨래를 그저 고된 노동으로만 여기며 불만이 컸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름 속에 자신은 어느새 빨래를 통해 분노와 설움을 배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모저모 꼴사나운 하늘 행세를 하는 남편이나 서슬 퍼런 시어미를 빨래에 투사하여 한껏 두들겨 패며 보복하고, 자신의 울가망한 처지를 스스로 매질하며 푸는 엄청난 카타르시스 효과가 ‘빨래하기’에 숨어 있었다.
타작(打作)은 농경 생활의 수확 방식이다. 장작 패기, 볏단 털기 등등 콩 타작 도리깨질도 마른 콩깍지를 마당에 늘어놓고 -굳이 표현하자면- 피가 튀듯 가혹할 정도로 두들겨 패서 튀어나간 콩을 쓸어 담는 일이다. 그때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래 방망이질에는 단순히 타작을 통해 얻는 효과를 넘어 더 확장된 차원을 해석해 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라는 매개체 때문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타작과 물로 이루어지는 노동이 유일하게 빨래이다. 삶에 대한 미운정(타작, 방망이질) 고운정(행굼, 정화)을 아우르고, 나아가서 세심(洗心)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 장르가 바로 ‘빨래하기’ 이다.
지금 아파트의 좁은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번거롭게 물을 갈아가며 손빨래를 하는 것과, 갯버들 드리우고 푸른 물새가 호로록호로록 날아다니는 냇가에서 마음껏 방망이질을 하며 빨래하는 것은 결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다. 그리고 흘러가는 물에 빨래를 헹구니 얼마나 쉬운가. 만약 우물에서 계속 물을 길어 올려 헹궈야 한다면 빨래는 끝내 중노동의 영역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헹구기’는 애꿎은 빨래에 대한 존재의 한바탕 일방적 난타전이 끝난 뒤에 오는 화해 모드이다. 그것은 빨래는 물론이고 고된 삶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비록 힘든 나날이지만, 빨래를 비비고 치대고 두드려 헹구다보면 어느새 여인의 가슴에 맺힌 슬픔과 괴로움도 물결에 헹구어져 멀리 멀리 흘러갔다. 빨래터는 곧 세심당(洗心堂)이었다.
물의 형이상학적 가치와 성스러움은 이미 알듯이 그 높은 뜻은 대상과 장소를 편애하지 않는다. 빨래터에 강림하신 물의 신은 빨래하는 아낙의 영혼을 맑게 씻어준다. 하늘 아래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과정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고난과 시련을 달래며 존재를 치유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빨래의 하이라이트는 빨래를 너는 일에 있다. 흙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가득히 빨래를 널고 빨랫줄 한 가운데를 바지랑대로 높이 밀어 올리며 괼 때 빨래의 미학이 완성된다. 바지랑대는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빨래를 만국기처럼 널어, 속 깊이 품은 아낙의 바람들까지 실어 허공으로 올려 보내는 그 순간은 구원과도 같다. 윤한영의 시 「빨래」에 그러한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걸려있어야 할 최후의 정당한/ 까닭으로/ 여기 선상에 놓인 옷감들처럼/ 이토록 청명한 빛에/ 나도 펴고 털어 말려야할까/ 마지막 남은 허위와 위선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가기를 바라/ 나를 널어야할까 /새하얀 속살 같은 그 무지한 영혼만/ 집게에 남겨지도록/ 그리고 나부끼도록/ 온종일 어느 창조의 줄에든 걸려있고 싶다
그 원시적 수공업적인 ‘빨래하기’를 노동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심신수련이며 종교의식이며 위대한 행위예술이 된다. 나는 현대의 어떤 예술도 그 의미를 넘어설 만큼 위대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냇가에서 빨래하는 것이 바이올린을 끌고 가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나, 예술이라는 명명으로 엽기적인 행구지를 보여주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보다 못할 것이 전혀 없다. 빨래를 주제로 좀 더 근사한 독립영화를 만들려면 아낙 대신 비구니를 주인공으로 해도 좋으리라.
‘냇가에서 빨래하기’는 예술 행위가 주는 순기능을 다분히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하다. 김홍도의 그림 「빨래터」가 불멸의 작품이거나, 박수근의「빨래터」경매가가 40억 원 이라는 것은 미술 평론가들의 전문적인 해석은 제쳐두고, 한편 그와 같은 빨래의 숨은 의미에 주어진 찬사이기도 하리라.
3.
진주 전래민요 「진주난봉가」에서 빨래는 한 사건을 전후로 나누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가사를 중심으로 내용을 펼쳐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진주낭군이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에 빨래를 가라고 한다. 낭군이 곧 오시는데 밥상 준비를 시키지 않고 왜 빨래를 가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랜 만에 만나는 부부의 정 마저 질투가 나서 봐주기 싫다는 건지, 아들이 기생첩을 데리고 올지 모르니 며느리보고 피해 있으라는 뜻인지, 아니면 며느리를 한시도 놀지 못하게 하려는 시어미의 심청이 그러한지 하여튼 며늘 아가는 빨래를 하러 간다.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진주 남강에서 여인은 우당탕탕 빨래를 한다. 그러다가 ‘난데없는 말굽소리’가 들려 힐끗 올려다본다. 아니, 저 남자가 누군가. 그녀의 남편 진주 낭군이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가네. 여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빨래를 다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 올라가 도포자락이라도 휘잡지 않을까 싶건만, 착한 여인은 그래도 ‘흰 빨래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온다. 흰 빨래 검은 빨래가 무슨 뜻인가. 고초 당초 매운 시집살이가 본 데 그러하니 다 인정하며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아닐까.
여인에겐 여기까지가 빨래가 주는 힘으로 최대한 지탱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시어미나 서방이 여인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주지 말아야 했다. 그러면 태산 같은 빨래 정도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주 낭군은 사랑방에서 ‘온갖 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 권주가를 부르며’, 시어미는 또 그 장면을 며느리에게 보라고 등을 떠민다. 참 잔인하다. 시어미가 관음증 환자인지 변태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을 본 여인은 ‘못 본 듯이 물러 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매달아 죽’는다.
바보같이 왜 죽나. 빨래 방망이라도 들고 현장으로 돌진하든지(권장 사항은 아니지만), 아니면 그대도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아야지. 혹여 그대가 낭군을 사랑했다할지라도 사랑은 그렇게 죽음으로 시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다 싫으면 진주 남강을 배경으로 나룻배를 타고 멀리 떠나서 오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볼 용기는 없었던가. 어쨌든 낭군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본댁을 안고 통곡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 가서 천 년 만년 살고 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고 노래한 들 무슨 소용인가.
여인이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을 견딘 건 운명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수 좋은 남강이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우당탕탕 빨래를 할 때 마다 온갖 설움을 씻어내며 언젠가 자신의 운명이 개선되리라는 희망도 가졌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끝내 비참했다.
4.
진주 여인이 일찍이 김병연(김삿갓)의 시 ‘타부’(惰婦-게으른 여자)를 읽었다면 운명은 달라졌을까.
병도 근심도 없고 목욕도 빨래도 안하여/ 십 년 전 시집 올 때 옷을 그냥 입고 있네./ 어린것 젖 물리고 낮잠 자기가 일이요/ 속바지 이 잡느라 처마 밑 햇빛만 좋아하네./ 걸핏하면 부엌 그릇 깨기 일쑤요/ 베 짜기가 싫어 머리를 긁다가도/ 이웃집 굿하는 소리만 들리면/ 사립문 제쳐놓고 날듯이 달려가네.
타부는 만사태평이고 배짱이다. 아이만 낳았을 뿐, 빨래하는 일 조차도 이미 초월하였다. 십 년 전 시집 올 때 옷을 그냥 입고 있는 것도 아무나 하나. 게으름은 거의 디오게네스 수준이다. 철이 없는 건지 남편이 관대한 건지, 이 집은 부부 금슬이 좋든가 아니면 서로를 포기하고 사는 형국이다. 김삿갓 선생이 세상을 떠돌다가 어느 오두막에 머물면서 그 집 안주인을 아주 매력 없게 표현한 시인데, 그 자신도 가출한지 오래되고 차림이 후줄근하였으리라 짐작되건만 그저 못마땅한 듯 가부장적 시선으로 그렸다. 그러나 타부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청결이니 위생이니 하는 비본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각론에 매이지 않고, 가무예술 ‘굿’ 보기를 즐기는, 다분히 존재론적 욕구에 충실한 삶의 면모가 엿보인다. 진주 여인이 이 타부의 생활방식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벤치마킹 하였더라면 극단적인 자해는 피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삿갓 선생이 금강산에서 어느 스님과 나눈 ‘금강산공명시(金剛山共吟詩)에는 빨래에 대한 환상적 시구가 나온다.
스님 - 구름은 나무하는 아이 머리 위를 따라 일어나고 (雲從樵兒頭上起)
삿갓 -산은 빨래하는 여인의 손 안에 들어와 우네 (山入漂娥手裏鳴)
깊고 고요한 산 속, 구름이 나지막이 내려와 나무하는 아이의 머리 위를 따라다니며 마치 장난을 치듯 피어난다. 구름이 그 정도로 낮게 드리운다는 것은 곧 비가 올 조짐이거나 아니면 그 전에 비가 와서 산이 촉촉이 젖은 상태일 가능이 있다. 그기까지 산은 투명한 습자지를 붙들고 있는 듯 적막으로 팽팽하다. 그때 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순간, 태산의 중심은 일시에 여인이 있는 지점으로 쏠리고 소리의 현장이 아웃 포커싱(Selective Focus) 된다. 그리고 방망이질 소리는 다시 수묵처럼 허공으로 번지고 습자지는 소리를 머금으며 아득히 찢어진다. 산이 메아리친다, 전율한다.
5.
빨래를 세탁기가 해주니 더없이 좋고, 그 시간에 여가를 즐기며 취미생활과 자아성취를 추구하는 부류도 많다. 나 자신도 물론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우리가 자연에서 얻는 성취 이상의 것을 꼭 준다고 할 수는 없다. 더러는 빨래하는 즐거움을 세탁기에게 빼앗겼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세탁기에게 물어보니 결코 뺏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은 멀어진 것, 잃어버린 것, 하지 않는 것은 과연 불필요하고 의미조차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것은 영원히 사라져야할 이유가 되는 걸까.
『오래된 미래』*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우리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 -인간본성을 포함하는- 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어플루엔자』*도 “진보란 진실을 찾는 수단이며 평온과 사랑과 생에 대한 외경에 눈뜨는 방법이요 영속적인 조화에 동참하는 길로써,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면 돌아가는 것도 진보”라고 했다.
문명의 발달로 얻는 편리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거 같다. 편리한 기계들을 사들이고, 속도를 높이지만 자연과 몸이 함께 이루며 얻는 정신의 가치는 점점 더 맛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스티브 잡스의 성공적인 삶과 그의 발명품이 현대 문명을 이끈 바는 가히 경이로우나 그가 인류의 정신에 기여한 바도 과연 그만할까. 앞으로 더 귀신 탄복할 기술과 물질문명이 이어지겠지만 인간의 행복은 그것과 비례하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승객의 절반 이상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주위에 어떤 사람이 함께 타고 가는지, 창 밖에 꽃이 피었는지 먼 산이 푸른지 도무지 둘러보지 않는다. 풍경도 읽어야 하거늘, 좀 심하게 표현하면 휴대폰을 우상으로 섬기는 로봇들이 내내 고개를 수그린 채 화면을 경배하고 있는 지경이다. 예전에 없었던 그 풍속은 새롭거나 진지하다기 보다 뭔가 병든 모습처럼 안타깝고 씁쓸하다. 그 속에도 자연과 인간을 공부하는 길이 있겠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이루고, 향기를 맡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결코 서로 닿을 수 없는 차이와 같다.
요즘 천연염색이며 도자기 만들기, 템플스테이 등등 체험학습이 유행이다. ‘냇가에서 빨래하기’ 프로그램도 만들면 좋으리라. 4대강 파헤치지 말고 강가나 냇가에 빨래터나 좀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래서 가끔 속세를 떠나듯 세심(洗心)을 가듯 빨래를 차에 싣고-우리 집엔 차가 없지만- 나가서 하고 싶다. 물론 합성세제는 쓰지 말아야겠다.
몌별로 헤어진 애인은 만나고 싶지 않을지라도 아파트에서 손빨래를 할 때마다 나는 냇가에서 빨래하고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픈 바람이 솟구친다. 요즘은 아파트가 확장형이라 베란다마저 없거나 좁다. 하늘이 펼쳐져 있고 감나무 대추나무, 봉숭아 맨드라미가 있던 마당 형에서 무(無) 마당 형으로 변해가는 이 시대에 인간성도 점점 좁아지는 건 아닌지, 마당으로 회귀하지 않는 한 인간성이 높고 넓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한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그러니 내 꿈의 목록에는 아파트라는 간이역을 떠나 마당 있는 오두막집에 도착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혹여, 옛날로 되돌아가서 한겨울에 고무장갑도 없이 찬물에 빨래해도 좋겠느냐는 식의 소모적인 시비는 걸지 마시라. 세답족백(洗踏足白), 상전의 빨래에 종의 발꿈치가 희게 된다는 말로, 남을 위하여 한 일이 자신에게도 이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남을 위할 것도 없이 ‘냇가에서 빨래하기’는 자신의 일을 하며 자신을 아주 특별히, 심오하게 이롭게 하는 일이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어플루엔자』- 올리브 제임스 지음
- 2011. 문학마당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