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金山, (1905 ~ 1938)】 "김산이 넘어온 혁명의 열두 고개, <아리랑>"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출신으로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이다. 11세 때인 1916년에 가출해 친구나 친척네 집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다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쳤으나 불합격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먼저 가출했던 둘째 형을 만나 형네 집에 가서 얹혀 지내며 살았다. 이후 중학교 입학 시험을 다시 보아 합격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 김산은 3.1운동 후 곧장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산은 둘째 형이 준 돈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김산은 친구 한 명과 함께 방을 빌려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는 일자리를 구하면서 도쿄제국대학에 응시할 준비를 했다. 김산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4시에 일을 했고, 일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헌 책을 사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김산과 같은 힘들게 일하는 부류의 유학생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면서 놀렸지만, 김산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을 '달걀 껍데기'라고 부르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산은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일제 군경과는 달리 글로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랐다. 1920년 김산은 일본 유학 대신 소련으로 가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소련으로 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온 김산은 둘째 형이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심부름 맡긴 200원을 그대로 가지고 도망쳤다. 작은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안동에 도착, 원래 계획대로 소련으로 가고자 하얼빈 행 기차를 탔으나 당시 적백내전의 여파로 인해 기차가 소련까지 운행하지 않았다. 이에 계획을 바꿔 남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향하기로 결정하고 700리 여정을 한 끝에 도착했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입학 최저 연령이 18세여서 당시 15세였던 그는 억울한 심정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김산의 기나긴 여행 이야기가 알려지자 신흥무관학교 측에서 특별히 입학 시험의 기회를 주었고 마침내 3개월 코스(속성과)에 입학하도록 허락받았다. 1920년 겨울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의 교정과 식자로 활동했다.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와 광동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 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했다. 1925년 7월 광저우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조선청년총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인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민족연맹을 결성했다. 1926년 오성륜, 김성숙 등과 함께 광저우 폭동(광둥 코뮌)에 참가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았다. 1927년 광둥성 하이루펑에서 펑파이가 해륙풍 폭동을 일으키고 하이루펑 소비에트를 건설하자 동참했다. 펑파이가 '칠살령(七殺令)'을 발표하며 학살을 선동하자 지주들을 학살하는 인민재판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베이징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중국국민당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신의주 경찰소에서 심문을 받고 다음해 4월에 풀려났다. 또 1933년 국민당 경찰에게 체포 당해 일본으로 인계돼 신의주 경찰소로 갔다가 풀려난다. 당시 일제강점기 였으므로 일본 국적으로 간주 돼 일본 경찰에게 인계되었다. 이어 공산당 북부 지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캉성은 일본의 첩자로 몰라는 지시를 해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옌안에서 처형당했다.
여기엔 민생단 사건도 영향을 주었다. 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3. 회고록: 《아리랑》[편집] 그의 삶이 이렇게 자세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1937년 말,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를 만나 3개월 동안 20여 회에 걸친 구술을 통해 그의 혁명적인 생애를 다룬 《아리랑의 노래》의 초고가 완성되어 책으로 출간된 덕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 때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 고영광을 초청했다. 2018년 8월 15일에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여했다. 김산의 생애와 명예 회복 과정을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에서 100회 특집으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