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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하는 날 비를 맞으며 환송하는 강정활동가들과 시민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우리는 육지에 살고 있어서 지구 표면 대부분이 바다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로 육지에 갇힌 채 땅에만 적응한 우리의 모습을 비꼬는 역설일 수 있다. 바다를 항해하면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넘어 육지의 존재는 사라져버린다. 그저 바다와 파도 그리고 하늘과 구름으로 가득 찬 푸른 세상이 바로 지구의 모습이다. 사실상 모든 육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지만 본토를 자처하는 큰 섬들은 작은 섬들을 차별하고 억압해왔다. 그것이 오랜 세월 반복된 서럽고 아픈 작은 섬들의 역사다.
섬들은 본토에 종속된 부속 도서들이다. 본토를 위해 존재하는 주변부이고 본토를 지키기 위한 국경의 요새들이며 본토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들과 죄수들의 귀양지였다. 육지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바다를 중심에 놓고 역전해서 보면 바다의 중심부에 가장 가까운 지점은 소위 본토들이 아닌 작은 섬들이다. 이 섬들의 주민들은 원래 육지를 바라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것이 섬 주민들의 운명이고 바닷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국가주의자들은 국경선이란 인위적인 경계선을 긋고 인접한 섬들을 변방화시키며 본토의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로 삼아왔다. 그러기 위해 바다로 향한 섬 주민들의 시선을 반대로 돌려 본토만을 바라보며 살도록 세뇌했다. 오늘날 각각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국경에 인접한 제주와 오키나와와 대만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섬들에 세워지고 있는 전쟁 기지와 군사시설에 깊은 우려를 느끼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 평화를 위한 활동과 시도를 해야만 할 텐데 한·중·일은 전쟁 준비를 평화를 위한 준비라고 주장한다.
모순이다. 제주에는 거대한 해군기지가 세워졌고 오키나와 열도에는 일본의 미사일 기지들이 들어서고 있다. 대만에서는 이전에 휴면 상태였던 군사기지들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80년대 말 옛 냉전 체제가 전환된 때부터 시작되었던 화해 무드가 이제 다시 새로운 미·중 간의 냉전 체제로 들어가면서 한·중·일 사이에 놓인 소위 동중국해에 다시 군사적인 긴장이 감돌고 있다. 이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중국·북한·러시아가 연합하고 미국과 일본과 우리나라 그리고 과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여러 나라까지 이 대결 구도에 참여하는 복잡한 양상이다. 그 대결과 긴장의 한복판에 제주와 오키나와와 대만이 놓여있다.
세 쌍둥이 섬: 제주, 오키나와, 대만
제주와 오키나와와 대만은 각국의 변방에 놓인 비운의 섬들이다. 모두 소위 본토인들에 의해 차별과 착취와 수탈, 압박과 배신을 당해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자국의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자결을 강요당했고 이등 시민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본토 방어를 위한 군사 요새가 지어졌거나 새로운 군사시설을 짓고 있다. 섬들이 본토에 종속되기 마련이지만 이 세 섬은 그 종속과 의존이 더 극적이다. 그러나 섬이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니다. 원래 섬 주민들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항해하며 주체적으로 살아왔다. 적어도 바다에 인위적인 국경선이 그어지고 이민국의 허가를 받아야 이 선을 넘나들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국경선이 섬들을 막장으로 몰아넣었다. 본토는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섬들을 더욱더 본토에 기생하도록 만든다. 결국 섬들은 본토인들의 욕망을 배설하는 위락 시설이 늘어선 관광지가 되거나 본토를 수호하는 군사적인 전초기지로 전락한다. 섬에서 자라나는 젊은이들도 자기 고향에 남아 스스로 자신의 섬을 지키고 발전시키기보다는 본토에 나가 출세하는 것을 꿈꾼다.
섬들이 평화로워지고 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원래 모든 땅은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이라는 바다 중심적인 의식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육지와 본토에 기반을 둔 각국의 정부는 섬들의 주체적인 자립이나 독립을 원치 않기 때문에 섬들의 그런 자발적인 운동을 탄압해왔다. 제주도민들이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했을 때도 정부는 그 주장과 요구를 무참하게 탄압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가장 처참한 피해를 안겨준 곳도 격전지가 되었던 오키나와였고 그 이후에도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미군들의 군사기지로 공여했다. 무리한 전쟁의 패전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본섬 대신 자신들이 점령한 섬과 주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것이 일본에 종속된 오키나와의 아픈 숙명이었다.
대만도 청일전쟁에서 패전한 중국이 그 전쟁 배상을 위해 일본에 넘겨주었던 배신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 억압과 수모에도 불구하고 섬들은 독립이나 자립을 할 수 없었다. 본토 정부에 대항하기에는 섬들이 너무 작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정부들은 행정기관을 동원해 섬 주민들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며 이용해왔다. 섬 주민들은 모난 행동을 하면 제주의 4·3이나 대만의 2·28처럼 무참하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섬 주민들이 이등 국민으로 차별받으며 비루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평화롭고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길은 섬들이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섬들의 연대는 가까이 있는 섬들의 연대에서부터 더욱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결국 세상의 모든 섬들이 연대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
섬들의 연대
나는 지금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제주도민이 된 이유는 2005년 제주도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제주도에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군함과 잠수함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해군기지가 건설되었고 우주 전쟁 산업의 전초기지들이 들어서고 있다. 나는 제주도가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기지도 전쟁 산업도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희망을 품고 해군기지가 지어지는 구럼비 바위에 올라가 매일 기도드렸고 군사시설 건설을 몸으로 제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2016년 5월 결국 해군기지가 완공되었다. 실망하고 낙담한 운동가들은 떠나고 주민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무리가 남아 군사시설들을 공원이나 대학 같은 평화적인 용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며 투쟁하고 있다. 강정의 해군기지 반대 활동은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섬 주민들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이다. 나는 제주도뿐 아니라 오랜 세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해온 오키나와도, 그리고 앞으로 더욱더 군사적인 위협과 긴장의 중심에 놓이게 될 대만도 모두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 섬들이 함께 연대하자는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제주, 오키나와, 대만이 둘러싸고 있는 동중국해를 공존과 평화의 바다(공평해)라고 명명하자는 조약골 님의 제안에 찬성한다. 이 바다에서는 전쟁도 군사훈련도 군함의 운항도 불허하자는 선언을 하고 섬 주민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를 감시·감독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서 2014년부터 제주와 오키나와와 대만에서 평화운동가들, 주민들과 함께 매년 번갈아가며 평화의 바다를 위한 섬들의 연대 캠프를 열고 있다. 2014년에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2015년에는 오키나와에서 2016년에는 대만에서 2017년에는 오키나와 이시가키섬에서 2018년에는 다시 제주에서 2019년에는 중국 본토에 인접한 대만 진먼섬에서 이 캠프를 열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지만 2023년에 다시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에서 평화 캠프를 열었고 올해 8월 말에는 다시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여덟 번째 캠프를 연다. 이 섬들의 연대 캠프를 통해서 제주·오키나와·대만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공평해에 확산되고 있는 군사기지들과 점증하는 군사적인 긴장에 대한 자신들의 불안감을 나누고 군사주의에 대한 저항과 반대 운동을 강화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섬들의 연대 캠프는 매년 한 번밖에 모일 수 없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사이에 각 섬에서 군사기지 건설이나 확장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들을 응원하고 섬들의 연대 캠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섬들을 방문하는 항해를 준비하게 되었다.
공평해와 ‘요나스 웨일’
나는 2013년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모였던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대회’에서 동중국해와 그를 둘러싼 제주·오키나와·대만이 ‘전쟁 없는 평화의 바다와 섬들이 되게 하자’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항해를 할 것을 제안했다. 이 항해를 위해서는 바람을 동력으로 하는 요트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9년 일본 후나바시의 폐선박 처리장에서 허름한 중고 요트를 구입했다. 인도네시아에서부터 함께 항해 훈련을 했던 명식과 향림이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와주어 같이 제주도까지 조심스럽게 무사히 운전해왔다. 항해자들을 모으기 위해 2022년부터 강정의 평화대학에 피스보이저(peace voyager)라는 훈련 과정을 만들어 청년들을 모집했다. 사람들은 요트가 호화롭다는 인식을 하고 있을 테니 무료로 훈련을 제공하면 많은 젊은이가 지원할 줄로 기대했지만 아무도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후락한 우리 요트를 보고 나면 그런 환상이 깨져버렸던 것 같다. 할 수 없이 어려서부터 강정을 자주 방문했던 식초라는 여학생을 설득해 간신히 한 명의 피스보이저 훈련생을 얻었고 승준이라는 아르헨티나 교포 청년을 설득해 항해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까운 범섬이나 마라도를 돌아오는 연습으로 시작했다. 그 후 세 차례 제주도를 일주하며 조종 훈련을 했다. 원거리 항해를 위해 배를 평수에서 연안용으로 승격시켜야 했다. 여기에 많은 재정이 들었고 시간이 걸렸다. 안전과 통신을 위한 여러 장비를 갖추어 연안용이 되어야만 해외 항해가 가능하다. 해양교통안전공단 직원들은 거대한 국제 여객선이나 상선에나 해당할 만한 무리한 구조변경을 요구했다. 5~6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작은 요트 내부에 외부 충격으로도 물이 새지 않는 격벽을 만들라는 난감한 요구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2023년 6월 1일 제주 강정포구에서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향한 첫 출항을 시작했다. 이 항해를 결심하고 제안한 지 딱 10년째 되던 해였다.
출국에 앞서 부산 수영만에 모인 크루들.
승선자는 선장인 나와 식초, 승준, 쪼, 수산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강정항에서 여러 활동가의 환송을 받으며 출항했다. 그러나 우리 배는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까운 화순항에 간신히 입항해 배를 수리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다음 날 거문도를 거쳐 백도로 들어서니 아름다운 한려수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를 최종 점검하고 출국 신고를 마친 후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에서는 황남덕 목사님과 동아시아 평화센터의 목사님들이 우리를 맞아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주셨다. 히라야마 상은 후쿠오카 시청에서 일본의 모든 항구를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는 문서의 작성을 도와주었다.
‘요나스 웨일’호의 선장 송강호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출발한 후 낯선 규슈 해안의 해류에 밀리며 고생한 끝에 나가사키 데지마항에 입항하였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처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원폭이 투하된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이어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평화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방송국에서도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의 항해를 취재했고 원폭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가들의 초대도 받았다. 나가사키 앞바다에는 많은 강제 징용자가 고통스러운 노역에 시달렸던 군함도가 떠있다. 우리는 그곳을 방문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의 노동자들도 엄청난 강제노동의 희생자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군함도를 지나 나카코시키 섬을 향해 가는 날 밤 선실 양쪽에서 삑삑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은 물체들이 배의 선두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빠른 속도로 바다를 유영하는 이 검은 물체에 부딪쳐 반짝이는 플랑크톤들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돌고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에는 은하수와 별들이 반짝였고 바다에는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돌고래들의 윤곽을 홀로그램처럼 보여주고 사라지는 플랑크톤들이 반짝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나타난 수많은 돌고래 떼가 평화를 전하기 위해 험한 길을 떠난 우리를 응원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전령들 같았다.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새벽녘에 우리는 두 개의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통과해서 나카코시키 섬에 도착했다.
맑게 개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요트 위는 천국과도 같다.
새롭게 군사기지가 지어진 이 작고 외로운 섬에서 온종일 떠도는 고양이들의 먹이를 주러 다니는 동네 바보 청년과 토네이도라는 이름의 푸드트럭 장사를 꿈꾸는 한 소년이 매일 같이 우리 배를 찾아왔다. 그 소년은 우리 배에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환영합니다’라고 쓴 어설픈 종이 현수막을 걸어주었고 그 소년의 어머니는 남편이 잡은 물고기를 먹으라고 우리에게 갖다주었다. 며칠 후 우리는 맞바람을 받으며 가고시마를 향해 출항했다. 가고시마 항구까지는 길고 아름다운 협곡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오른쪽에는 얼마 전 용암을 분출했던 사쿠라지마 화산이 호수 같은 바다를 둘러싸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가고시마 해양경찰들이 들이닥쳐서 항해의 목적과 앞으로의 항로에 대해 캐물었다. 무엇보다 군사시설들에 접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가고시마에는 치란특공평화회관이라는 기이한 기념관이 있다. 치란에는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자살폭탄 공격을 하도록 전장에 투입했던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장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서 출격하여 무모하게 희생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있다. 나는 일본이 스스로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반성하고 이들의 애석한 죽음에 대한 통한과 국가의 책임 표명을 기대하며 전시물들을 관람하였지만 그런 참회 고백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추악한 침략 전쟁에서 천 명이 넘는 자기 나라 젊은이들의 소중한 목숨을(개중에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 무의미하게 불사른 일제의 광기 어린 역사를 미화하는 기괴한 평화기념관이었다.
우리는 가고시마를 떠나 남쪽으로 100km를 내려가 다네가시마에 도착했다. 다네가시마 서쪽 10km 지점에는 미군의 군사 훈련장이 되어버린 마게시마라는 섬이 있다. 미군의 군사훈련으로 인해 그 섬에 서식하는 마게시마 토종 사슴은 멸종위기에 놓여있지만 일본 정부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네가시마의 평화운동가들은 마게시마 군사기지 철회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지만, 다수의 섬 주민에게는 외면과 냉대를 받고 있었다. 미야케라는 의사는 자신들을 찾아온 우리를 ‘폭풍과 함께 바다를 건너온 평화의 사람들’이라며 반갑게 맞았다. 우리는 정원이 딸린 미야케 상의 집에 머무르며 그 섬의 활동가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우리가 다네가시마를 떠나 마게시마에 접근하려고 하자 한 선박이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고 진로를 방해하였다. 오후가 되자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게 일었다. 우리는 선수를 야쿠시마로 돌려 새벽 미명에 야쿠시마 안보항에 도착했다. 숲과 이끼로 가득한 야쿠시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기도 해서 더 유명해진 섬이다. 수천 년을 살아온 거목들이 빽빽한 이 아름다운 섬 곳곳에 겨울 산행 중 실종된 한 한국 청년을 찾는 전단들이 붙어있었다. 야쿠시마도 전쟁에 쓸 목재를 운송하기 위한 산악철도들이 험준한 산속에 깔려있었다. 나는 식초와 함께 수령이 7천 년이나 된다는 신비의 나무 조몬스기를 찾아갔었다.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하산했다. 세상에 나무보다 더 평화롭고 유익한 존재가 없어 보였다.
야쿠시마에서 250km 떨어진 아마미오시마로 가는 바닷길은 동중국해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오는 쿠로시오 해류를 지나가야 한다. 야쿠시마의 어부들은 그곳이 일본에서 가장 험한 바다니까 조심해서 항해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중간에 있는 나카노 섬 경유를 원했지만 모두 아마미오시마로 직항하자고 해서 방향을 틀었다. 아마미오시마에도 일본 자위대의 미사일 기지가 두 곳이나 세워져 있었다. 숲을 베어내고 지어진 군기지는 그 섬에만 서식하는 희귀한 검은 토끼들의 멸종을 재촉하는 환경 파괴의 주범이었다. 또 그 군사기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다거북이 산란하는 아름다운 가토쿠해변에도 콘크리트 방벽을 세우겠다고 한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섬을 떠나기 전날 밤 아마미오섬의 평화활동가들은 우리를 한 호텔의 식당으로 초대하여 섬의 전통 음식으로 대접해주었고 우리 배에까지 함께 와서 밤늦게까지 산신이란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다음 날 아마미오시마를 출항하여 우리는 도쿠노시마와 오키노에라부섬을 거쳐 7월 15일 대망의 오키나와 헤노코에 도착했다.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은 우리를 맞이하러 항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헤노코의 ‘쿠션’이라는 활동가들의 숙소에 머무르며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미군 기지 건설 현장에서, 또 바다에 나가서 시위를 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주민들이 우리를 환송하기 위한 바비큐 파티를 열어주었다. 오키나와 남부 요나바루에서는 가나이 목사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사시키교회에 머무르면서 오키나와 평화공원과 전쟁의 희생자 묘역들을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비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비석들이 즐비한데 그 위로는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역사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는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염려했던 대로 태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태풍 독수리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독수리가 지나가자마자 바로 그 뒤를 이어 태풍 카눈이 따라왔다. 우리는 두 태풍의 계곡을 빠져나가기로 결의하고 서남쪽 300km 떨어진 미야코지마를 향해 출항했다. 우리 뒤를 바짝 따라오는 태풍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논의 끝에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엔진을 가동했다.
미야코지마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항구의 어부들은 태풍을 대비해 분주하게 배들을 고박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입항하자 어부들은 우리 배를 자기들의 항구에 정박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다. 태풍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왔는데 다시 태풍이 부는 바다로 내몰릴 지경이었다. 이때 우리를 마중하러 나온 키요미 씨와 우에사토 씨가 적극적으로 중재해 간신히 선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야코지마에서 만난 어른 중에는 이상하게도 아리랑 노래를 아는 분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나는 군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아리랑비를 보고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야코지마는 많은 일본군의 군사기지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위안소’들이 있었다. 그 작은 섬에 스무 개가 넘는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선의 여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이국땅에서 수치와 고통을 겪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노래를 마을 주민들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미야코지마에는 더 큰 군사기지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한 여인은 자기 아이들이 또다시 전쟁을 겪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매주 아이들과 함께 전쟁 반대 시위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우리는 미야코지마를 떠나 이시가키로 향했다.
이시가키에도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었고 주민들은 반대운동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서쪽 끝에 놓인 국경의 섬은 요나구니섬이었지만 이곳에는 이민국이 없어서 이시가키에서 출국 수속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외롭게 군사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테츠 씨와 지애 씨를 꼭 찾아가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이민국 직원들을 설득했더니 휴가 중인 상급자에게 오래 통화한 끝에 상급자가 휴가에서 복귀하고 나면 자신들이 요나구니섬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서 출국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의외의 답변에 놀라웠고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이시가키를 출항하고 나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면서 천둥과 번개가 쳤다. 새벽이 되자 날이 개며 멀리 요나구니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오쯤 되어 섬이 아직 멀리 있는데 벌써 테츠 씨가 방파제 언덕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인들도 가기 어려운 서쪽 끝에 놓인 이 외딴섬을 한국의 젊은이들이 돛배를 타고 찾아온다는 것이 어찌 특별한 방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 일본의 끄트머리 섬에서 작고 아담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마치 〈안경〉 같은 일본 영화에나 나올 법한 한적한 바닷가에서 커피와 롤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손님을 맞는다. 우리가 그를 방문하면 그 카페는 우리 때문에 며칠 동안은 영업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이런 외로운 섬의 서쪽 끝 평화롭던 구부라 마을에 중장비들이 들어와 미사일 공격을 지원해주는 레이더 기지를 세웠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평생 마이크로파(microwave)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불평하며 일본 정부에 항의하였지만 오랜 싸움을 버틸 장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소수의 주민이 그 섬을 지키고 있다. 이런 평화의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메신저로 ‘요나스 웨일’호에 승선한 우리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이시가키 섬에서 이민국 직원들이 출국허가서를 내주기 위해서 요나구니섬으로 왔다. 이들의 이례적인 호의로 ‘요나스 웨일’호는 8월 15일 요나구니섬을 출항하여 대만의 화련을 향해 출발했다.
대만 동해안에는 쿠로시오 해류가 북상하고 있었다. 배는 남서향으로 기수를 잡았지만, 해류와 바람은 항해를 돕지 않았다. 어렵사리 시간을 지체하며 17일에야 우리 배는 화련에 입항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만을 일주하는 계획을 세웠고 먼저 타이중의 대만 동아시아 역사자원 교류협회를 찾아갔다. 이곳을 이끄는 후루가와 씨는 대만 동해 대학의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만 청년들에게 인권과 평화 등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여 대학에서 논란을 일으킨 분이었고 그로 인해 청년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분이었다. 나는 이분과 평화의 바다를 위한 섬들의 연대를 위해 같이 협력해왔다. 이곳에서 만난 청년들과 세디크족의 마을을 방문했다. 세디크족은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다 거의 멸족당한 대만 저항의 대명사가 된 원주민들이다. 무력 투쟁이 진압된 후 살아남은 유족들은 섬처럼 고립된 청류 마을로 강제로 이주당해서 감시 속에 살게 되었고 이들이 살던 땅은 일본에 빌붙어 같은 원주민들을 살상했던 이웃 부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자손들의 대조적인 명암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우리는 타이난의 장영 대학교에서 신학대학 학생들을 만나 대만 사태에 대해 토론하고 최남단 컨딩으로 갔다. 그곳에서 란위섬으로 가는 페리를 기다렸으나 강한 바람으로 운항이 중단되어서 결국 기차로 대만 남동부 해안가 타이마리에 위치한 파이완 부족의 마을로 갔다. 파이완족은 1874년 파선으로 표류하다 상륙한 미야코지마 주민들 50여 명을 학살하여 청일전쟁(일본의 대만 출병)에 영향을 끼친 모란사 사건을 일으킨 부족이다. 이곳의 파이완족은 선조의 땅에 세워진 군사 공항의 토지 반환 운동을 벌여왔었다. 그러나 현재 대만은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시진핑의 협박으로 불안한 나머지 군사기지들을 더 확대하고 있어서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더 작아졌다. 대만은 중국에 고개를 숙이고 평화롭게 통합의 길을 걷자는 편과 자유를 위해 미국과 손잡고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하자는 편으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비무장 평화의 길을 찾아가자는 우리의 입지는 이전보다 더 좁아졌다.
우리는 타이동으로 이동해서 페리를 타고 란위섬에 갔다. 대만 정부는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들을 물고기 통조림이라고 속여서 이 섬에 저장했다.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결국 정부의 사기극은 끝났지만 아직도 저장된 핵폐기물들은 열악한 상태에서 저장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이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을 만났지만, 몹시 지쳐있는 듯했다. 누구 하나라도 이 엉터리 핵폐기장 문을 가로막고 서서 매일 일인 시위라도 한다면 반대 운동의 불길이 다시 타오를 것으로 보였지만 그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대만의 독재자 장제스(장개석)가 자신의 장기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을 가두었던 녹도(뤼다오)를 들렸다.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형무소 같았다. 이제 이곳에는 뤼다오 인권문화원이 세워졌다. 그 기억관에는 독재에 저항하다 10년 동안 그 형무소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차이쿤링 씨의 사진도 게시되어 있었다. 그는 2014년 평화를 위한 섬들의 연대 캠프가 열렸던 제주 강정마을에도 대만의 참가자로 와서 대만의 인권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타이동을 거쳐 아미부족을 방문했다. 아미족은 자신들의 전통 보트를 타고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던 해양 부족이다. 이제 이들이 살아왔던 바닷가는 정부와 자본가들의 관광지 개발로 점차 잠식당해가고 있다. 아미족 지도자 사토이 씨는 ‘요나스 웨일’을 타고 온 우리 일행들을 소개하면서 평화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도리어 우리를 응원해주며 전통음악 공연으로 모은 후원금까지 주셨다. 우리는 화련에서 타이루거족이 살았던 깊은 협곡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살았던 험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통해 원주민들의 삶과 전통에 대해 이해하려고 했다. 대만의 원주민들은 육지에서 온 중국인들과는 달리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만 안에 존재했던 조상들의 나라와 땅을 되찾으려고 한다. 이들은 대만이 중국에 통합되는 것도 원치 않고 분리 독립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이란 나라도 대만이란 나라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그들의 신이 내려온 거룩한 산과 조상들이 살았던 땅에서 부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항해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올라와 하이쿠이라는 이름의 태풍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 두 태풍은 대만 인근에서 함께 엉켜서 후지와라 효과라는 불규칙한 상호 간섭 현상을 만들어 번번이 일기예보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지룽의 비샤항에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끝에 9월 5일 비바람과 높은 여파를 헤치며 마지막 귀국길에 올랐다. 10일 동안 밤낮없이 푸른 수평선만이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지구의 한 부분에 불과한 육지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을 뿐 원래 지구의 대부분은 바다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제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청년이 바다에 빠뜨린 변기를 무리하게 잡으려다 턱을 선체에 부딪치는 바람에 의식을 잃는 당혹스러운 사고가 발생했었다. 망망대해에서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선원을 끌어올려 어깨를 때리고 얼굴에 물을 붓자 사라졌던 눈동자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놀라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제주도 남방 150km 전방에서 전방의 세일(돛)과 마스트(돛대)를 지탱하는 포어스테이라는 굵은 스테인리스 와이어가 끊어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제 돛은 하나밖에 쓸 수 없었고 그마저도 마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오로지 순한 바람에만 쓸 수 있었다.
가슴을 조이는 조심스러운 항해 끝에 마침내 9월 14일 밤부터 멀리 제주도 해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쁘게 탄성을 지르는 이도 있었고 눈물을 훔치는 선원도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우리는 강정항으로 귀환했다. 강정의 활동가들이 카약을 타고 우리를 맞으러 바다로 나왔고 포구에는 많은 사람이 환영하기 위해 나와주었다. 우리들은 열흘 동안 통신이 두절되어서 소식을 모른 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 뜨거운 포옹을 했다. 우리는 입항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터트리고 모두 바다로 뛰어드는 세리머니로 107일간의 공평해 항해를 마쳤다.
‘요나스 웨일’호가 카약팀의 환영을 받으며 강정항으로 입항함.
국가 너머
나는 공평해를 항해하며 한국과 일본과 중국과 같은 국가주의와 그 체제를 지탱해주고 또 이에 편승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군사주의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나 국경선도 없고 군대도 군인도 없는 새로운 평화의 나라를 발명해야 한다.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는 어쩌면 푸른 대륙에서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다. 육지는 인간에 의해 너무 오염되고 타락했다. 인간은 땅과 같이 하나님의 소유물인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유화해 버렸고 돈으로 환산하여 사고, 판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다. 이미 인간들은 물도 사유화하고 있고 앞으로는 맑은 공기도 돈이 없으면 마실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는바다로 나가서 바다의 영혼을 마시고 바다의 영성에 취해야 한다. 바다는 아직 사유화되지 않은 공공재다. 여기서 다시 공유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고 자본에 잠식당한 땅과 물을 되찾아와야 한다.
공평해는 내게 영적인 홍해와도 같았다. 나는 ‘요나스 웨일’과 함께 5,000km의 바다를 건너며 내 의식이 종살이하던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와 군사주의 세상에서 탈출하여 전쟁도 맘몬도 국경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영적인 세례를 받았다. 대양을 건너서 신대륙을 발견하듯 공평해를 항해하며 우리 시대에 꿈꿀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희미한 윤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나라를 향한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바다에 흩어져있는 세상의 모든 작은 섬들이 자신의 존엄성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연대하자는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섬들에 이미 오랜 세월 존재해왔던 교회들이 이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