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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라파타르, 생애의 고지(高地)에 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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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HIMALAYA ; Sagramatha National Park
2017—[Khumbu Himal] EVEREST.B.C. TREKKING — (최종회)
<사진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두 번 클릭하면 원본의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 4월 10일 (월요일) * [EBC Trekking 제15일]
<루클라>(2,840m, 노르게이-힐러리공항)→ (하늘길)→ <카투만두> 말라호텔
* [루클라에서 카투만두로 날아오는 하늘 길] — 준열한 고봉설산의 장관
☆… 오늘은 히말라야 쿰부지역을 떠나는 날이다. 쿰부히말(Khumbu Himal)의 관문인 루클라(Lukla, 2,840m)의 ‘텐징 노르가이-힐러리공항’을 출발하여 카투만두 공항으로 날아가 카투만두 시내의 말라호텔(Malla Hotel)에서 여장을 풀게 된다. 그리고, 오후에는 파슈파티나트(Pashupatinath) 힌두사원을 탐방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저녁에는 특별히 초대를 받았다. 이번 우리의 히말라야 트레킹에 모든 편의를 제공했던 (주)아세아트레킹의 툭텐(Tukten) 사장이 우리를 자택의 저녁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오전 7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행장을 차렸다.
오전 6시, <파라다이스 롯지>의 식당에 내려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동쪽의 산이 높아 아침햇살은 서쪽의 산자락 위에 눈부시게 내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식사를 하는 사이, 우리의 카고백은 네팔 친구들이 공항에 옮겨다 주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공항대합실에서 그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깊이 감사했다. 아마 우리 생애(生涯)에는 다시 만나기 힘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나왔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그 환한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들은 대부분 셀파족으로 쿰중(Khumjung)에 집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제 이들은 홀가분한 몸으로 그들의 집이 있는 산중으로 돌아갈 것이다.
루클라의 파라다이스 롯지의 아침 / 네팔친구들이 우리를 전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루클라 <노르가이-힐러리> 공항 / 황금색 카타르는 파라다이스롯지의 여주인이 우리를 환송하는 뜻으로 걸어준 것이다
두드코시 대협곡으로 쏟아지는 루클라 공항의 길이 200m의 짧은 활주로
이른 아침 7시 15분, 우리를 태운 16인승 비행기가 계곡 방향으로 쏟아지는, 그 경사진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좁은 기내, 그러나 창으로 들어오는 히말라야의 산곡의 모습과 멀리 히말라야 설산 연봉이 아득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쿰부히말의 트레킹을 마무리하고 이제 세상으로 귀환(歸還)하는 하늘길이다. 다리에는 알이 배고 온몸은 쇳덩어리처럼 무거웠지만 마음은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며칠 전 우리가 이마를 마주했던 히말라야 설산연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 [히말라의 하늘 속의 명상] —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이에게 감사하며
모든 것이 감사하고, 감사했다. 히말라야 트레킹 동안 맑고 깨끗한 하늘을 열어준 하늘에 감사하고, 그 준열하고 아름다운 설산 고봉의 장엄함을 안겨준 히말라야에 감사하고, 아픔만큼 뜨거운 생명의 절절함을 느끼게 해준 험준한 여정에 감사하고, 고통의 여정을 동행한 우리 대원들, 네팔 친구들 모두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동안 떠나와 있던 우리 가족과 세상의 좋은 지기지인들에게 감사했다. 우리 집 <문향재> 가족의 면면히 떠오른다. 특히 사랑스러운 지윤이와 영민이의 모습이 떠오르고, 우리집 귀여운 연서의 재롱이 눈에 밟혔다. 모두 나에게 힘든 여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실어준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오전 8시,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주) 아시아트레킹에서 주무자와 기사가 공항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9시, 시내의 말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가 네팔에 도착한 첫날에 유숙했던 호텔이었다. 룸에 들어와 거울을 보니 갈라터진 입술이 아직 아물지 않았고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모습이 그간의 고행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오랜 만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곤하게 단잠을 잤다.
카투만두 공항 국내선 터미널에 도착하여
카투만두 말라호텔과 그 정원(아래)
낮 12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에서 가까운 한식당 <에베레스트>에 갔다. 식당의 주인장 앙도로지는 부재중이었다. 우리는 냉면과 불고기 그리고 된장찌개와 밥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눈물겹게 맛있는 쌀밥이었다.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 힌두사원 탐방] … 힌두교식 화장장(火葬場)
☆… 점심식사를 한 후, [주]아시아트레킹에서 제공한 미니버스를 이용하여 카투만두 힌두교 사원인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를 찾았다. 사원(寺院)으로 가는 카투만두 시가지는 그야말로 ‘먼지 지옥’이었다. 네팔의 가장 심각한 세 가지 문제가 도로와 전기와 수도라고 하는 이 대장의 설명은 사실 그대로였다. 길거리는 사람과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엉겨 있고, 포장이 된 곳이나 안 된 곳이나 차들이 지나가면 누런 먼지가 일어 시공(視空)을 가득 채웠다. 그 속에서 길가이나 골목의 안쪽에 난장(亂場)이 들어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먼지와 자동차 경적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사고팔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가고 있었다.
☆…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 사원은 인도과 네팔을 통털어 4대 힌두교 사원 중의 하나이며 유내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네팔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다. 파슈파티낫트 사원과 그 안의 화장장(火葬場)을 관람하려면 우리 돈으로 약 8,000원 정도의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길 안으로 들어가니, 바그마티 강이라고 불리는 서울의 청계천 정도의 개천이 나타났다. 그 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거대한 힌두교 사원인 파슈파티낫트가 있고, 그 건너편의 천변에는 노천 화장장(火葬場)이 있다.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화장장은 상류에 2기, 하류에 4기의 노천화장장이 있었다.
개천 가까이 들어가니 탁하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후 후끈한 열기와 함께 역한 냄새가 숨을 막히게 했다. 화장장 몇 군데에서 꾸역꾸역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화장대는 개천 바로 옆에 가로·세로 3m 정도의 콘크리트 단(壇)을 일정한 간격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지금 막 화장이 끝나서 연기를 피우는 곳도 있고, 지금 불이 활활 타오른 곳도 있고, 붉은 천으로 덮은 시신을 옆에 놓고 장례 의식(儀式)을 진행하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화장장 건너편 계단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화장장에는 해당 가족이나 친지인 듯한 사람들이 긴 의자 주위에 몰려 있고, 또 동서양의 많은 관광객들이 화장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 한 여인이 애절하게 통곡을 하면서 우는 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했다. 화장대(火葬臺)에는 삼 단 정도의 장작을 쌓아 놓았는데, 이런저런 의식을 마친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딸 같기도 하고 손녀 같기도 한 어린 소녀가, 화장대에 올라가 쌀을 뿌리면서 시신 주위를 돌고 난 뒤, 시신의 머리에 이마를 맞대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어서 가족 친척 들이 차례로 나와 소녀가 한 것과 같이 그렇게 고인과 이승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의식을 진행한 후, 점화(點火)를 한다. 불길은 거세게 일었다. 그렇게 시신이 다 사그라질 때까지 태우고 난 재는 그대로 옆에 있는 개천에 쓸어 넣는 것이었다. 개천을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바그마티 강이었다. 이것이 힌두교식 장례였다.
불길 속에 타는 시신을 바라보며, 우리 인간의 생명, 누구나 똑 같이 겪어야 하는 삶과 죽음의 노정을 생각하며, 존재(存在)의 허무감이 가슴 아프게 밀려오기도 하고, 누구나 맞아야 하는 운명의 업보를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은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살아 있는 이 시간이 과연 무엇인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묵연히 이승의 마지막 불꽃으로 타는 시신을 지켜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개천을 성(聖)스러운 강(江, 바그마티 강)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강은 말라서 화장장 쪽으로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물에 손발을 씻고 나왔다.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 사원] … 힌두교 광신도 ‘사두(Sadhu)’
☆… 힌두교 사원은 크고 웅장했다.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 사원은 갠지스강의 상류이며, 성스러운 강으로 일컬어지는 바그마티 강의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데, 네팔 최대의 힌두교 사원일 뿐만 아니라 인도 대륙에 있는 ‘4대 시바사원’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힌두교의 3대 신 가운데 하나인 시바(Siva)는 ‘파괴의 신’으로 바이라브, 루드러, 마하데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는데, ‘괴수(怪獸)의 왕’이라는 ‘파슈파티낫트’도 그 화신 가운데 하나이다. 바그마티 강변의 길을 따라가면 키라테쉬르 사원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이곳에는 가장 오래된 ‘시바 링가’(남성의 성기를 묘사한 시바의 상징)를 모시고 있다. 현재 네와르족의 사두가 지키고 있다고 한다. 파슈파티낫트의 기원은 키라테쉬르 사원에 남아있는 시바 링가로 판단했을 때 적어도 기원 전 3세기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한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저자처럼 오고 갔다. 지붕과 높은 담장 위로 날랜 원숭이들이 날아다녔다. 사람과 동물, 종교와 삶이 그대로 어울려 사는 듯한 느낌이었다. 성(聖)과 속(俗)이 그대로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이 대장이 ‘이 사원의 명물, 이 사원에 사는 귀신들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행랑처럼 이어진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행랑채 안의 바닥에 는 모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정말 귀신인가 사람인가 옷을 걸쳤는지 벗었는지 수염과 머리털이 뒤엉켜 있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바로 힌두교 광신도인 ‘사두(Sadhu)’이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마당 안의 단 위에 올라앉아 관광객과 사진을 찍는 귀신도 있고, 뼈만 앙상하고 얼굴의 골이 깊게 파이고 산발한 머리의 어떤 사두는 같이 사진을 찍고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준섭, 기원섭 대원과 신은영 대원이 사두와 함께 사진을 찍고 돈을 주었다. … 뒷맛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승의 생명들과 강 건너 저승으로 가는 주검의 불꽃이 강하게 뇌리에 남아서 전신을 휘저었다. 사원을 나오자 서쪽의 수림 위어 벌건 햇덩이가 오늘 하루의 시간을 마감하듯, 소리 없이 지고 있었다.
광신 사두의 모습, 그 뒷맛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승의 생명들과 강 건너 저승으로 가는 주검의 불꽃이 강하게 뇌리에 남아서 전신을 휘저었다. 사원을 나오는 길, 서쪽의 수림 위로 벌건 햇덩이가 오늘 하루를 마감하듯, 소리 없이 지고 있었다.
*[파슈파티낫트(Pashupatinath)] …힌두교에 대하여
‘사두(Sadhu)’는 집과 일터, 가족을 떠나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힌두교 수행자들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반라(半裸) 상태에 진흙투성이인 채 거리를 돌아다닌다. 가진 것이라고는 뜨리술(trisul)이라는 삼지창과 걸식용 사발뿐이다. 일종의 힌두교 광신도(狂信徒)이다. 사두는 인도 대륙 전역에 있다. 때로는 카투만두의 파슈파티낫트에서 열리는 ‘마하 시바라트리(위대한 시바신을 기리는) 축제’가 있으면 도처에서 떼를 지어 모여든다. 관광객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얼마간의 박시시(bakshaeesh, 팁)를 받는다.
* 힌두교는 3,500년 전 인도 중부의 아리안 족에게서 기원한 다신교(多神敎)이다. 탄생-죽음-환생이라는 생명의 윤회(輪廻)를 믿으며 이러한 굴레로부터 ‘목샤(moksha, 해방)’를 목표로 한다. 환생할 때마다 목샤에 근접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그 결정적인 요소인 ‘까르마(karma, 업(業)’는 글자 그대로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생전에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까르마를 지어 저급한 존재로 환생하고, 선업(善業)을 쌓으면 고차원적인 존재로 환생하면서 윤회의 굴레에서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 힌두교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4권의 베다(Veda)가 가장 중요하다. 베다는 힌두교 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신성(神聖)한 지식’이다. 베다의 일부인 ‘우빠니샤드(Upanishad)’는 우주와 영혼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탐구하는 경전이다. 오래전 우리나라 법정스님이 번역한 우빠니샤드를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힌두교의 근간을 이루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뿌자(puja, 기도), 사망자의 화장(火葬), 그리고 카스트제도’이다. 카스트제도에는 4가지 주요계급이 있다. ‘브라흐만’은 승려, ‘끄샤뜨리야’(네팔의 경우 체뜨리)는 군인 및 정치가, ‘바이샤(Vaisya)’는 상인이나 농부, ‘수드라(Sudra)’는 육체노동자 및 장인이다. 모든 계급의 가장 하부에는 불가촉천민인 ‘하리잔(Harijan)’이 있는데, 카스트에 속하지 못한 채 주로 육체노동과 더럽고 험한 일에 종사한다.
* 힌두교의 신(神)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수많은 신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이 가진 수많은 속성이 육화된 화신(化身)을 통해서다. 전지전능한 신(神)은 보통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 보존의 신 ‘비슈누’, 창조의 ‘브라흐마’로 화(化)한다. 한두교 사원은 흔히 이들 중 한 신(神)을 모신다. 하지만 실제 힌두교도라면 대개 바이슈나비떼(비슈누 신봉자) 혹은 사이비떼(시바의 신봉자)로 두 신 중에 하나를 숭배한다. 필자가 수년 전 탐방한 적인 있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은 비슈누신을 모신 사원이었다. 그밖에 힌두교의 신은 수많은 하급신이 있다. 또한 소를 신성시하여 네팔에서도 소를 죽이면 감옥에 간다.
* [툭텐(Thukten) 사장의 초대] … 정감이 넘치는 만찬의 환대!
저녁 6시, (주)아시아 트레킹의 툭텐(Thukten Sherpa) 사장이 우리를 자택으로 초대했다. 카투만두 도심(都心)에서 좀 떨어진 툭텐(Thukten)의 집은 대저택이었다. 주차장 건물이 따로 있는 마당이 넓은 집, 아주 규모가 큰 집인데 깨끗하고 반듯했다. 2층으로 된 건물의 외벽을 모두 흰색으로 외벽을 칠한, 그야말로 백악관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계단이나 마루 등 가구들이 모두 고급원목으로 되어있고 거실에는 히말라야 야크털로 짠 고급 카페트가 깔려 있었으며 ㄷ자 모양으로 놓인 소파가 짜임새 있어 보였다. 아주 복스럽게 생긴 부인이 나와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주) 아시아트레킹 전무(좌) / 오른쪽 툭텐 사장의 가족(부인과 아들)
거실의 탁자 위에는 네팔의 맥주 코르카(KORKA)에다 양주까지 준비해 놓았다. 부인은 가정부와 함께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그 키친 룸의 식탁 위에 뷔페식으로 음식을 차려 놓았다. 네팔의 전통음식인 ‘달밧(Dalbat)’과 신선한 채소, 그리고 치킨 등 간단하지만 꼭 있어야 할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해 놓았다. 음식은 맛깔스러웠다. 식사를 하면서 여러 차례 건배도 했다. 네팔에서의 권주(勸酒)는 특이하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잔에 계속 술을 따라 채워준다. 상대방에 대한 호의(好意)와 정성을 첨잔(添盞)으로 하는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데 이 대장은 몸으로 익힌 영어 실력으로 툭텐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툭텐은 이상배 대장을 두고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라고 말했다. 비록 토막말로 하는 영어지만 우리들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었다
*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 에드먼드 힐러리] … 사진으로 만나는 힐러리 경!
☆… 그런데 응접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니, 툭텐(Tukten) 가족과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Persival Hillary)와 함께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당시 젊은 툭텐(Thukten)은 힐러리가 1953년 5월 29일, 셀파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과 함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를 등정한 이후, 죽 인연을 맺어왔고 그 이후 힐러리가 쿰부히말 오지 마을 쿰중에 학교와 병원을 지을 때 모든 편의 제공했으며, 그가 네팔에 오면 늘 툭텐의 집에 와서 머물렀다고 했다. 올해가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등정한 지 꼭 64주년이 되는 해이다. 2008년 1월 11일, 힐러리 경이 타계하였을 때 툭텐은 직접 뉴질랜드의 힐러리 경 장례식에도 다녀오기도 했으며, 지금은 힐러리 경의 부인이 뉴질랜드에 홀로 살고 있는데, 2013년에는 힐러리 에베레스트 등정 6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뉴질랜드를 다녀오기도 했단다. 세계등반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힐러리(Hillary) 경(卿)과 부자(父子)의 정(情)을 맺은 툭텐(Thukten)의 집에 우리가 초대되었으니 이것도 하나의 역사적인 인연(因緣)이 아닌가 싶다. 생전(生前) 힐러리 경도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소파 어디쯤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툭텐 셀파 사장의 가족이 함께 한 사진
1953년 5월 29일, 힐러리와 함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를 등정한 셀파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 4월 11일 (화요일) * [EBC Trekking 제16일]
<카투만두>→<방콕공항>(00:30)→<인천>
☆… 오늘은 네팔(N데미)을 떠나 귀국 길에 오르는 날이다. 오늘은 카투만두공항을 출발하여 태국의 방콕공항에 도착한 후, 자정을 넘겨 새벽 1시 인천국제공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탑승하여 귀국 길에 올라 내일 새벽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우선 이번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칠수 있도록 하늘을 열어준 네팔 히말라야의 천지 대자연에 감사하고 숨 쉬기도 힘든 험하고 먼 고행길을 무사하게 동행한 이상배 대장을 비롯한 기원섭-이진애 님, 새재의 김준섭 님, 김미순 님, 독서클럽 북투어의 신은영 님, 거제의 김장재 님 등 모든 대원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험난한 산길을 한께 했던 네팔 친구들의 순박한 미소를 생각하며 다시 가슴 뭉클해졌다. 그리고 자나깨나 우리의 여정을 걱정하고 있을 우리들의 가족과 모든 지기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이른 아침 이발소를 찾았다. 귀국을 앞두고 히말라야 수염을 깨끗이 깎고 가기 위해서였다. 이발소는 말라호텔과 삼사라호텔 사이에 있는 만다라 스트리트 뒷골목에 있는 두어 평 정도의 작은 이발소이다. 눈이 깊은 장년의 이발사는 구면이었다. 2013년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 이상배 대장이 안내해준 이발관인데, 2014년 랑탕 트레킹을 했을 때도 이용했던 곳이다. 작은 이발소는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 장터에 있었던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편안하고 정겹다. 이발사는 얼굴에 비누거품을 칠하고 그 위에 뜨거운 물수건으로 피부를 따뜻하게 보습을 한 뒤, 가죽띠에 면도날을 쓱쓱 갈아, 이발사가 손수 면도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부드럽고 살가운 손길이 아주 능숙하고 친절했다. 면도를 하는 동안 살갗이 느끼는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이발을 하고 거울을 보니 히말라야 야인은 거기 없었다. 얼굴이 말쑥해졌다. 이렇게 하여 귀국의 예(禮)를 갖추었다.
오후 2시, 네팔의 카투만두 트리부반공항에서 타이항공기에 탑승하여 하늘 길에 올랐다. 방콕공항에 도착하여, 개인적으로 자유시간을 갖고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는 등 시간을 보냈다.
방콕공항 터미널 내 면세점 거리의 중심
▶ 4월 12일 (수요일) * [EBCT 제17일]
<인천국제공항>(06:30) 귀국→ 귀가
오전 7시, 인천국제공항에 안착 무사히 귀국했다. 이렇게 장장 17일의 히말라야 트레킹의 장정을 마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난 대한민국의 아침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고 눈부셨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 리무진 공항버스 안에서 맞은 대한민국의 아침햇살
* [2017-히말라야 트레킹 ☆ 에필로그] — 극한의 험고한 오지(奧地)를 다녀와서
히말라야 ‘에베레스트(Eeverest)’는 네팔에서는 ‘사그라마타(Sagramatha)’라 하고, 티벳에서는 ‘초모랑마’로 불린다. 에베레스트는 이 산봉이 세계 최고봉이라는 것을 입증을 이끌어낸 인도의 측량국장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everest) 경’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 지역의 고유한 이름인 ‘초모랑마’에는 모두 ‘세상의 어머니’, ‘세상 모든 어머니의 신’이라는 신비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정자는 1953년 5월 영국원정대에 속한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이며, 한국인으로는 1944년 고상돈이 4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최초로 등정(登頂)을 했다.
푸모리와 칼라파타르
해발 5,545m의 칼라파타르(Kalapatthar)
에베레스트(Eeverest) - 뒤쪽은 검은 설산암봉 / 오른쪽은 눕체(가까이 있어 높게 보인다)
쿰부히말의 계곡의 최상류인 쿰부빙하(Khumbu Glacier)는 에베레스트에서 만년설에서 쏟아져 내려서 굳어진 빙하(氷河)를 말한다. 쿰부히말(Khumbu Himal)은 ‘사그라마타국립공원’으로 일반인들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곳이다. 쿰부희말의 관문인 루클라까지는 네팔의 국내선 17인승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몸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쿰부히말의 최상류 쿰부빙하에는 에베레스트 등정의 기지인 베이스 캠프(B.C)가 있고 세계의 최고봉을 마주하여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칼라파타르(Kalapatthar)가 있다. 절정(絶頂)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빙하(氷河)와 만년설의 파노라마를 만날 수 있는 감동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티벳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와 정착한 셀파족(Sherpa)의 본거지이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고산족인 셀파족의 문화, 티벳불교의 깊은 신앙을 만날 수 있는 가슴 벅찬 감동의 트레킹 코스이다.
쿰부빙하(Khumbu Glacier) / 멀리 아마다블람 -강테카-담세르쿠 연봉
* [쿰부히말 최고의 뷰포인트] — 해발 5,500미터 칼라파타르에 올라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와 칼라파트르가 있는 쿰부히말의 최상류 고락셉(Gorakshep)은 등반가에게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는 시작점이요, 일반 트레커들에게는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이다. 고락셉의 칼라파타르는 에베레스트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있는 산봉으로 트레커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 중의 하나이다. 고락셉에서 약 400여 미터를 오르면 칼라파타르(Kalapatthar), 에베레스트뿐만 아니라 로체와 눕체 그리고 쿰부히말 지역의 고봉설산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쿰부히말 칼라파타르 트레킹 원정대는 3월 27일 인천공항을 출발, 태국의 방콕에서 일박한 후, 네팔의 카투만두행 비행기로 환승, 28일 네팔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쿰부히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에베레스트의 관문인 ‘루클라’까지는 17인승 소형비행기를 타야 했다. 본격적인 트레킹은, 예정보다 하루 늦은 3월 30일 해발 2,870m의 ‘루클라(Lukla)’에서 시작하여 남체(3,340m), 포르체(3,810m), 딩보체(4,410m), 투글라(4,620m), 로부체(4,910m)를 경유하여, 8일 만인 4월 6일에 해발 5,140m 고락셉(Gorakshep) 롯지에 도착했다. 눈 뜨면 걷고 해지면 침낭 속에서 잠을 자고, 다시 해 뜨면 고산의 험로를 숨 가쁘게 걸어가는 여정이었다.
히말라야 ‘쿰부히말(Khumbu Himal)’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로 들어가는 험난한 산곡이다. 지구의 극점(極點), 공기 중 산소가 희박하여 세상에서 온전하게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오지(奧地)이다. 그래서 네팔 현지인들도 이곳은 사람이 아닌 신(神)의 영역으로 생각하여 경외(敬畏)를 하는 지역이다. 사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설산연봉과 위압적인 암봉, 그리고 빙하지대의 얼음과 바위, 모래사면이 쏟아져 내리는 험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高地)에서는 산소가 희박하여 고소증(高所症)이 엄습하여, 호흡이 곤란하고 두통과 멀미 증상이 나타나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5,000고지에는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황무지(荒蕪地) 그것이었다.
우리는 트레킹의 마지막 롯지가 있는 ‘고락셉(Gorakshep)’에서 이번 트레킹의 정점(頂點)인 해발 5,545m의 칼라파타르(Kalapatthar)에 올랐다. 그것은 험난한 고투였다. 거기에서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한 거대한 히말라야의 설산거봉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회에 젖었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거봉 에베레스트 정상은 지상(地上)의 지극한 그 무엇과 천상(天上)의 계시가 만나는 비경(秘經)으로 다가 왔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살아온 내 생애(生涯)를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생애의 목숨값을 생각하며 조용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서 있는 칼라파타르는 내 칠십(七十) 인생의 고갯마루이고 저 에베레스트는 내가 우러러 지향하는 절대선(絶對善)의 위엄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한 감격이나 감상이 아니었다. 늘 부족했던 자신의 삶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그날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 천년 함묵(緘黙)으로 솟아있는 설산거봉 앞에 내 영혼(靈魂)의 알몸은 차갑게 전율했다. 이제 나의 생애도 산(山)을 내려가듯이 남은 목숨의 시간을 자각하는 자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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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대서사시를 읽었습니다ㆍ태고의 땅에서 두발로 땅을 밟고 하늘을 보면서 대자연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시간들이였고. 그 시간을 함께해서 좋았습니다ㆍ감사! 감사합니다
긴여정 잘읽고 즐감하고
많은것을 가지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