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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한밤의 우편취급소☆]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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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우편취급소◎]
염창권 시집 / 현대시기획선 32 / 한국문연(2020.01.07)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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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우편취급소
소리 나는 쪽으로 한쪽 귀가 쏠렸어,
가랑비 속으로 누군가 오고 있는데 뿔이 달렸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마른 낙엽 긁어모으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은데 너는 올 수가 없으니 반짝이는 빈 우산을 펼쳐둔 곳에 네 자리를 정해 놓고 기다릴게
경적도 없이 바퀴가 지나가는 우편취급소엔 잉크가 말라붙은 종이가 잠들어 있지. 희붐한 창문 아래 색깔도 감촉도 중력도 없이 잠들어 있는 넌, 내 허무와 비참의 수신처일 터인데
잠이 덜 깬 공복감, 비릿한 키스, 아니면 입술 맛 같은 건 포장할 수 없지, 단지 네게 보내려는 건 타다 만 검은 심지, 빈 접시에 남겨진 얼룩, 뭉개진 칫솔, 끈 풀린 속옷가지
벌써부터 영원에 홀려버린 엽서들은, 맥박이 마구 뛰면서 날아가려고 파닥여서 물에 불은 커다란 우표로 눌러두었지, 그때에 톡, 톡, 이교도의 손가락이 아프게 내 가슴골을 노크했어,
두 번의 충격으로 심박기가 출렁이고 눈에 비친 유리창 너머로 검은… … 얼굴이, 문자로 전송할 수 없는 사물과 신체들이 쌓여 있는 복도를 스쳐갔지,
그게 너야?
흉터
논배미 진창에
발목까지 빠졌던 것인데
그 자국 몇 개가
흰 살얼음을 꽉 물고 있다
마구 갈고 지나간
바퀴자국에도
배를 길게 가른 소름이
하얗게 돋아나 있다
기울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이
버려두었던
상처가 못박힌 채
저리 춥고 외로왔던 것이다
허스키
1.
흐미라고 하는 몽골 음악이 있다 이것은 남자 가수가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는 Throat Song이다 대지의 울림처럼 저음과 가성이 공명하는 음역에 우주를 풀어 놓는다 그 사이에 여가수가 등장하여 고음의 살바람을 찢어놓는다 이건 마니경을 적은 깃발이 바람에 닳듯이 춥고 날카롭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의 소리가 갈린다 초원에서 흐미는 바람에 녹아 하늘을 지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땅을 메아리쳐 양떼를 모은다
2.
초등 여교사 십 년이면 목에 쇳소리가 들어선다 나는 그 소리가 좋다 온몸으로 젖 먹여 키우는 힘을 느낀다 장맛날 군불 지피듯 축축할 때, 말문이 넘칠 때도 목에 쇠가 걸린다 몸의 말씀인 저 울음 앞에서는 뭐든 켕긴다, 내가 잘못했다
나방
닫힌 문을 애써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나방만이 아닐 것이다 불빛 아래 파닥거리면서도 한사코 손 밖을 벗어나는 저 가벼운 들뜸, 우련한 회오 속에서 몸을 건져내려는 습관적인 뒤척임, 가끔씩 네 방문을 따고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었다
커튼에 드리운 그림자는 네 날개의 영역 표시일까?
불 없는 방에 앉아 있을 때도 너 생각이라는 흰 분말이 공중에 떠 있다 그걸 스치기만 해도 가려워 잠 이루는
정류장
고양이가 다녀갔다, 뒤져놓은 깡통, 접시, 비닐봉지, 나무젓가락, 일회용의 허기를 못 참고 돌아섰겠다 찾아왔다가 돌아서면서 하루도 숙박하지 못한다고 무의식이 멀리를 했겠다 떠돌 때는 태생의 부정이나 자해가 힘이 된다 의자 밑으로 축축한 보통이처럼 깔려 있는 흙바닥이 구두 굽을 이마애 박는다 나는 상처라고 말해둔다 종점이 생기기 전엔 마을 밖으로 저걸 찍고 나간 적이 있다 지네가 지나갔는지 궁둥이 밑이 근질근질하다
십 리 밖으로 새어나간 귀를 수습하던 어떤 노구가 입체경 같은 어둠에 기대어 울 때에 기다림의 어원은 자폐라고 뱉은 적이 있다 오늘 밤, 윤장대를 돌리듯 막차가 비었다 기다릴 것이 없어진 나는 어둠 속에서 예전의 그 노구이다
머리를 빗으며
머리를 빗다 보면
가지런히 쓸리는 가르마 위로 불쑥 솟는 것이 있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갓 뽑아낸 철근처럼
완강하게 직립하면서 희게 노려보는 것
그동안 누그려왔던 노여움이
저리도 삐딱하게 몸을 솟구치며 드러나는 것이다
내면에 감추었던 생각들을
들키지 않았으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머리를 빗다 보면 골라지지 않는 아픔처럼
날카롭게 혹은 삐딱하게 여기저기 솟구치는
흰 머리칼이 살아온 생을 내색하는 것이다
애써 감출 일이 아니다
슬퍼할 일이 아니다
나를 지나간 인간적인 일들이
하나둘 기억되면서
흰 등빛으로 밝아오는 것이다
하루
뒷집 마당에
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줄을 서서 배웅하던 나무들
말을 잃고 묵묵히 젖은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기댄 의자들도
햇볕에 졸던 한쪽 귀를 벌써 어둠에 묻었다
굴뚝에서 거먼 길이
흘러나올 때
다리를 저는 그림자가 잠깐 다녀간 듯
우물가에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
녹슬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
눈두덩이 부은 저녁이
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의자
의자는,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다리를 휘게 하면서
앉았던 바닥이 패어 있다
순간순간 몰려왔던 회오의 감정들이
탄식과 함께 흙바닥을 짓이기면서
작은 흉터를 남긴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자
인부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쌓아올린다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의자는
껴안거나 안겨 있는 한 덩이를 이룬다
끌고 온 기억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때
의자는 그릇처럼 잠자코 날 포개어 둔다
한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겹겹이 껴입고 있으니
오늘의 기억 속에
이전의 널 빼낼 수가 없다
무릎 관절이 꺾이면서
의자 위에 머무르는 시간
내 기억이 널 꼭 껴안고 있다
꽃의 기억
거실장 위에 놓아둔
장미 묶음이 말라가고 있다
석 달째, 생일의 기억은 덧없어지고
봄꽃이 가을꽃을 부르고 있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난다
밭두렁에 이파리 너울거리고
그 잎을 따낼 때
손에는 진액이 자꾸 묻었다
꽃대를 낫으로 치면 흰 피가 물큰했다
그 비린 피가 튀긴 옷에는
적갈색 반점의 냄새가 따라다녔다
연분홍 화관은 시든 지 오래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투면서
땀 냄새와 함께
잎담배 냄새가 물큰거렸다
그 일터에서 돌아온 지금
오래 꽂아둔 책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를 맡는다
지독한 활자들이
말라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멀어져 가는 것들은
희미하게 꽃의 기억을 품고 있다
길거리에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다
이제는……
닿지 못하는 곳이다
바닥에 매달린 자물쇠가 물에 젖은 채 차갑고 무성의한 시간에 쇠고리를 채우고 있었다 눈 더미는 분탕질 되면서 밀쳐둔 걸레처럼 군데군데 쭈그려 앉았고 손바닥으로 누르자 압착된 결의 같은 서늘한 것이 올라왔다 새벽 바오쩬 거리를 돌아 성큼 내 뒤를 따라오던 이가 길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 거리는 다시 평온해지며 간체자로 쓴 간판들이 술렁이며 내 어깨 위를 떠돌았다 간밤에 왔다가 오전에 이곳을 떠나는 나는 거리의 뒷모습을 상상하면서 눈 뭉치처럼 축축해졌다
내 눈물이 닿았던 곳은 난간 위에 찍힌 발자국이었다, 거리의 온갖 소음과 먼지들이 비켜난 곳에 올라선 발자국이 순결하게 반쯤 녹으면서 푸르스름했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의 발굽 넓이와 몸무게를, 그녀가 보았을 거리의 풍경과 은닉된 자기 현신을, 닿을 수 없어 점점 엷어져 가는 시간을
지금도 내 볼을 차게 물들이는 것은
강물이 숨을 쉰다
강물이 나직한 소리로
숨을 쉬고 있다
겨울이 한 자 두께로 얼음장을 깔아도
그 밑으로 깊이깊이 물줄기가 흘러간다
추운 날 손 입김을 불 듯
아침 강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이 있다
강이 정수리에
숨구멍 하나를 열어두기 때문이다
고래가 물구멍으로 물방울들을 내뿜듯
밤새 그 구멍으로
가쁜 숨을 돌려놓기 때문이다
내 가슴속을 흐르는 사람이 있다
섬
바다 위에 하얀 점으로 떠 있는 부표 하나
저 작은 섬이 나를 서성이게 한다
찻집에서 배달 나온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오토바이를 끌고 왔는데
팔목 위에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떤 폭력이 그녀를 지져버린 것인가
부표 같은 점 하나에 집중되었을 고통과 서글픔
나는 그 화상 자국에 다시 데어서
바닷가를 외롭게 떠돌며
내 전全 생애의 통점痛點 위에
섬 하나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나타샤를 생각하다
그녀는 북쪽 창가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광고지로 너덜거리는 거리를 사람들이 지나간 뒤
차량 몇 대가 빠져나갔다
보도블록 위엔 검은 먼지가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고
창틈으로 한랭 기류가 스며들면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아서일까
나는 울고 싶어졌다
창가에 앉아 있는 나타샤를 보면서 울고 싶어졌다
창밖에 눈이 내리기를
얼굴이 흰 그녀의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를 바랐으나
그 앞자리에 깊은 눈매의 나타샤 아들이 나를 건너서
분필 자국이 덜 지워진 칠판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헛기침을 하며 울고 싶은 생각을 거두었다
폭설에 덮인 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줄을 선 제설차들이
지저분한 오물과 함께 눈 더미를 밀어붙이며 지나가던 날
창밖으론 다문화반 개강축하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고삐에 묶여 어쩔 수 없어진 흰 당나귀를 생각하면서
다시 크게 울고 싶어졌다
그들이 돌아간 뒤 한참 후에야
*나타샤-백석의 「니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차운(次韻)
한 번의 마주침
일터에서 돌아가는 길, 굽잇길이
미래를 향해 직선으로 벋어 있다는 걸
알기는 아는데
그 끝이 공포를 향해 열려 있다는 걸
알기는 아는데
생애 처음으로 네가 다가오더니 내 곁에 앉았지
손톱을 물어뜯더니 휴대폰을 열고 문자를 보냈지
가느다란 햇살이 풀어져 내리고 그 사이로
가볍게 들썩이며 부풀려지던 네 웃음소리
그동안에 난
흰 팔뚝과 가슴이 만들어내는 곡선과
입술 가로 투명하게 번지는 립스틱을 바라보고 있었지
순간, 내 인생의 나머지를 수정할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다고 다짐을 했지
오오, 야채 줄거리가 쌓여 있는
시장 골목에서도 버스는 멈추지 않고 달렸어
네가 날 향해 잠시 웃어 주었는데
네가 사심 없이 가방과 물병을
잠시 맡겨 두려고 했었기 때문
그렇지, 닥쳐올 생이 너무나 불투명해서
내가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결심하는 줄도
너는 몰랐으니까
간단한 화젯거리와 식사에 대해 물으려는데
너는 몰랐으니까
가방과 물병을 돌려받고
그냥 내렸을 거야
의자에 남아 있는 온기는
짧았던 네 현존의 흔적
일몰의 폭탄 속에서 버스는 붕붕거리며 달렸지
지상에 또 다른 길이 있어
가방만큼의 중량과 물병만큼의 온기를 남기고
골목의 일몰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
물들어가는 것
구월의 하루를 지나면서
마음이 자꾸 물들어버리는 것이다
너의 니트 옷 아래로
들숨과 날숨의 굴곡이 보일 때
바람이 나뭇잎을 들추고 갈 때
나를 물들이면서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양광이 가득한 거리에 나앉은
노인이 밝게 웃고 있을 때
바닷가에 내어놓은 배 한 척
그 목질을 쓰다듬으며
소금기에 절여 있는 한 생을 짐작할 때
나는 그만 물들어 버린다
그러나, 물들어버리는 것이 슬프다
네가 떠나면서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돌아설 때
그 말이 마치 위로의 말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슬프다
너에게 물들어가는 것이……
겨울 삼나무 숲
삼나무 숲에 내리는
폭설의 밤에
그리움의 뿌리가 자란다
창유리마다 눈발이 달라붙어
희붐한 추억 속에 잠기게 한다
산막에는 여자가 들었으나
그녀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세상의 인연은 한 줄 전선을
붙잡고 웅성거리다가, 흔들리다가
이윽고 등을 돌린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산막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을 쳐다보다가
낮엔가 마주쳤던
그 서글한 눈매를 생각하면서
한밤 내 서글퍼지는 것이다
그때 키 큰 삼나무가
우듬지를 흔들어
눈을 털어 내는 소리를
홀로 듣는다
여름의 깊이
우화羽化에 들어선 날
기분이 어떨까
이파리들이 바람에 살랑이면서
허공의 깊이를 재어 본다
매미는 공명통을 부풀리거나
긁어서 소리를 낸다
떨판 사이로 흘러나오는 진동음!
지난 수년 동안
땅 밑을 온몸으로 밀고 가면서
긁어대던 습관처럼
오보네 주자는
리드의 가느다란 관에
호흡을 집중시켜 진동음을 낸다
폐활량을 부풀리면서
소리 내지 못하는 생이
어디 있겠느냐는 듯
영겁의 시간을 빠져나온 햇살과
허공에 파장을 그리는 진동음이
내 피부 위에서
뜨겁게 미끄러져 내린다
나무는 제 품 안에
유충들의 시간이
함께 자라고 있는 것을 안다
생은
항상 가렵다
그릇
무덤 속에 그릇을 넣어둔 건
가는 길에 누굴 만나거든
물과 곡식과 고기를 나누어
먹고 마시라는 뜻이니
분화구 같은 이 사발 속엔
오랜 침묵의 행로가 담겨 있네
사랑에는 늘상
허기지는 날이 많아서
서로 만나 어루만질 때조차
갈증이 치미는 것
저승길에
덜 춥고 배부르더라도
이 접시를 깨지는 말게
노을 문에는
외젓가락빗장이 걸려 있으니
접시 위에
그대 눈물을 올려놓게나
달빛을 밟다
서릿발이 억새의 잎마다 흰 길을 내고 있었다
그믐달 빛을 밟고 능선을 오르면서
내 안에 있던 늑대가 파란 불을 켰다
이마에 외눈 라이트를 박은 사람들이
슬금슬금 비껴가면서 모퉁이를 돌 때
내 푸른 안광이 그 길 끝을 쫓았다
달빛 마늘에 한 땀 한 땀 꿰매지는 사람들
나는 푸르게 일렁이는 불꽃을 억누르지 못하고
발톱으로 허공을 긁었다
억새의 손가락이 터지면서 바람의 머리채가 다시 흩어졌다
오래 참았던 달의 목구멍에서
야생의 외침이 막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옻나무
가문 날들이 많아서인지
가문가문한 가을 길들이 자꾸 끊어진다
옻나무 가지가 내 팔뚝을 긁고 간다
줄기에는 독을 한 사발 품고 있으리니
내 몸에도 곧이어 홍조가 들 것이다
그녀가 끝내 허락되지 않았을 때
몸 안에서 검은 담즙을 뱉어낸 일이 있다
옻나무보다
맑고 선연하게 걸러낸 단풍 빛을 여직 본 적이 없다
독을 품고 있을 때
사람들은 지독하게 맑아져서
그 안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응相應
소한 지난 뒤의 하늘은
강물처럼 물이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일렬종대로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
날개 밑에 흔들리던 공기층이 물결치면서
앞에서 한 마리가 물살을 일구고 가면
뒤에 오던 것이 그 물살을 받아서 이랑을 만들고
그다음으로 오던 것이 그 이랑을 다독이면서
깊은 강물처럼 흐르게 된 것이다
겨울 복판을 흘러가면서
부표처럼 하늘에 떠서 부지런히 날개를 펄럭일 때
날개마다의 파장이 둥그렇게 퍼지면서
어떤 날개로도 다른 날개를 무찔러갈 수 없으니
날개 하나도 부딪히지 않게 순순한 비행을 이룬다
득량만 저쪽에서 시작한 발동선이
마치 황금색 벨벳 천을 끌어당기듯
물 자락을 끌고 오면서 황혼의 눈시울을 적실 때
날개 뒤로 둥글게 퍼지는 하늘 자락을 끌어당기며
편대를 지어 쓸쓸하게 흘러가는 기러기의 행렬
갸르륵 갸르륵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은
땅의 강물을 기억하면서 호흡을 돌려놓으려는 까닭!
곤곤한 일상을 마친 회귀의 시간에
좌우 편대를 이루어 활강을 준비할 때까지
사람들은 개미같이 작아진 몸으로
서쪽 하늘에서 밀려오는 유채색의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기러기가 그 채색된 구름을 타고 넘는 것을 보면서
밀려오는 산그늘에 하나 둘 몸을 담근다
저 어린 것들이
산 너머 강기슭에 안착하려는 시간에
눈이 내릴까, 눈이 내릴까
가슴에 묻어둔 여리고 보송한 깃털 같은 느낌으로
순결한 마음마다 눈발이 내리는 시간
우리들의 여정을 위해서도
소한 지난 뒤의 하늘은
강물처럼 물이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소리
새 한 마리
마른 나뭇가지를 쪼고 있다
수척한 근골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온 후로
어떤 계시 같은 것에 익숙해진다
새의 부리와 나뭇가지가 만나 이루는
골격이 뚜렷한 소리가
오후를 텅텅 울리게 한다
일어선 채로 북이나 종이 되다니……
나는 목어木魚소리를 제대로 들은 일이 없다
무엇보다 내장을 도려내고 껍데기인 채로
매달려 누구에겐가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매미처럼 몸을 두드려서
소리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불현듯 새의 부리가
내 정수리를 탁탁 찍어댄다
몸
-보洑이야기
보洑가 있다
봄이 손을 댔는지 몸이 아리면서 물기가 돌았다, 수십만 킬로미터의 실핏줄을 가진 보는 양수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씨앗 봉지처럼 몸을 불리다 보면 곧 젖 물릴 것이 그리워지면서 젖 냄새로 온몸이 들큰했다 이처럼 쌀눈 같은 이야기가 물길을 내고 있었으니 상류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중간중간의 작은 물길로 새어 나왔고 씨톨들은 저마다 멈춘 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혹은 기쁜 이야기의 틈에서 새들이 솟구치고 혹은 슬픈 이야기가 물길을 트면 들판이 영 초록빛이었다 생명은 항상 슬프디 슬픈 진초록이었다
보는 책보자기처럼 물을 가만히 안았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 손길이 아주 가지런했다 혹은 물의 총량을 담아두지 못할 때는 하류의 보에게 절반 이상을 넘겨주면서 뼈마디가 헐거워졌다 흘러가는 것들을 영영 가두어둘 수 없었으니 조금씩 가벼워지는 수량에 몸을 비우면서도 기쁘게 길을 내주었다
아주 먹일 것이 없어진 겨울에는 자궁 같은 아랫녘을 열고 허공을 끌어당겨 덮었다 몸으로 품었다가 내어주면서 차갑게 샅을 스치는 물길을 새기 낳듯이 잠시 잠깐씩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 꽁꽁 얼어붙은 그 문틈으로 하얗게 빛나는 얼음꽃들, 이토록 시린 몸으로 겨울 한 철을 공굴리고 있는데
실뿌리 끝으로 눈물이 핑 도는 날
그 눈자위에 여문 햇살이 기어들곤 했다
산딸나무 꽃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꽃을 피웠다
넉 장 꽃잎 날개가
나보다 먼저 알고 봄을 맞이했다
층층이 밀려오는 바람 속에서
수천의 연초록 바람개비가
소용돌이치며 나무의 몸을 흔들어댔다
그때 네가 내 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네가 지나가는 모습만을
무연히 바라볼 수 있었을 뿐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기억처럼
몇 번의 봄이 지나갔지만
나는 꽃잎을 지우기가 싫었다
바람 속에 입술이 하얗게 바래어가면서
바람개비의 중심축에
한 과의 사리 같은 푸른 열매를 매달았다
봄이 아주 지나가버렸으니
여름이 오기 전에
나는 꽃잎을 버려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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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오래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나이든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반갑다. 또 서글프다.
그 시간이 좀 오래되었다.
그때의 지금을 뭉뚱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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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권 詩集 [※한밤의 우편취급소※]
[ 염창권의 시세계 ] -
기억의 밀도와 시간의 질량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명예교수
기억은 안개와 같다. 김승옥은 그의 걸작「무진기행」에서 안개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중략)…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이 문장의 ‘안개’를 ‘기억’으로 바꾸어도 문맥의 대부분은 통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의 의식을 둘러싸고 있고 외부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차단한다. 사람의 힘으로 기억을 헤쳐 버릴 수 없고 손으로 잡아챌 수 없다. 그것은 감촉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타인으로부터 우리를 격려한다.
기억을 뒷받침하는 것은 시간이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 계측의 수단으로 시간, 분, 초를 설정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러한 측정 단위에 제어되지 않는다. 1시가 있고 1시 1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끊이지 않고 물처럼 흐른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지평에 무시로 기억이 출몰한다. 기억이 시간 순서로 전개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기억은 시간의 지평 위에 보존되고 전개되지만 시간의 진행을 수시로 초월한다. 어제의 기억과 그제의 기억이 혼재되고 때로는 내일의 기대가 과거 기억의 내피에 접합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의식의 장난이다.
염창권의 시는 기억이 서정을 주도한다. 기억이라는 마법의 손길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서정의 수로를 펼친다. 시간은 기억의 후경에서 정서의 진폭을 조절하고 공감의 밀도를 강화한다. 시집 첫머리의「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오래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나이든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반갑다. 또 서글프다//그 기간이 좀 오래되었다//그때와 지금을 뭉뚱그렸다”라고 적었다. 이 문장은 시집의 성격을 단적으로 요약한다. 30년 전 학창시절의 친구는 기억 속에 젊은 얼굴로 남아 있다. 현재의 그는 “나이든 얼굴”이다. 시간이 만든 생리적 변화를 넘어서서 그러한 시간의 격차를 ‘뭉뚱 그려’과거와 현재를 융합할 때 시인의 내면에 화학작용이 일어나면서 서정이 발생한다. 시인은 그것을 언어로 재구성한다.
기억은 시적 정서의 촐발과 확산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래서 스위스의 문예학자 에밀 슈타이거는 ‘서정적인 것’의 기본적 특성으로 회상(Erinnerung)을 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상황으로 연결되어 떠오를 때 서정적 정조가 탄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만으로는 서정적 정조가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현재의 자극이 개입해야 과거의 기억이 서정적 질료로 작동하게 된다. 요컨대 현재의 자극이 중심이 되고 그것을 초점으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상이 현재의 상태에 회귀되는 것이다. 독일어‘Erinnerung’에는 그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슈타이거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시를 깊이 조명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생각이다. 1910년에 간행된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도 이와 유사한 사유가 담겨 있다. 릴케는 시인이 체험한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용해되었다가 언어를 통해 새롭게 현현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인의 체험과 기억은 시간의 깊은 숙성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상황에 재구성되어 현현된다. 그러니까 시인이 체험하는 시간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지만 그것은 현재의 상황에 융합된다. 슈타이거가 서정시의 시상時相을 현재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는 기억의 소산인데 시인은 현재의 시점으로 그 기억을 실현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체험한다고 할 수 있다.
염창권의 시집에서 기억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하루」,「의자」,「타인의 방」세 편이다. 이 중「하루」는 미시적 관찰이 작품의 축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뒷집 마당에
검은 구덩이 새로 패였다
줄을 서서 배웅하던 나무들
말을 잃고 묵묵히 젖은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
담벼락에 나란히 기댄 의자들도
햇볕에 졸던 한쪽 귀를 벌써 어둠에 묻었다
굴뚝에서 거먼 길이
흘러나올 때
다리를 저는 그림자가 잠깐 다녀간 듯
우물가에 체인이 벗겨진 자전거
녹슬어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
눈두덩이 부은 저녁이
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하루」 전문
감정의 개입 없이 정경의 외관을 보여주는 이 시는 대상이 관조를 통해 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계절은 문명치 않고 저녁이 어둠으로 물드는 한 시간 남짓한 정경의 변화를 묘사했다. 제시된 정경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게 의미있는 징표는 보이지 않는다. 대상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정밀하게 관조하는 시인의 눈길이 의미가 있고 의미없어 보이는 사물 주변에 펼쳐진 음영이 의미가 있다.
늘 보던 뒷집 마당에 없던 구덩이가 새로 파인 것이 검게 보인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저편에 산이 있는데 그 나무들의 음영이 산그늘을 덮었다고 했으니 나무와 산그늘과 산기슭이 하나로 이어져 보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배웅하던 나무들”이라고 했는데 그 나무들은 무엇(누구)을 배웅한 것일까? “말을 잃고 묵묵히” 산그늘을 끌어 덮었다고 했는데, ‘묵묵히’라고 해도 될 것을 “말을 잃고 묵묵히”라고 한 것을 보면 시인이 이 풍경에서 이별과 침묵의 상황을 두드러지게 인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루가 저무는 것은 일몰의 정경에서 그의 기억에 내장되었던 이별의 정황과 이별에 처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했던 안타까움의 정서가 자신도 모르게 연상된 것이다.
담벼락에 기대어 무연하게 햇볕을 쪼이던 의자들도 어둠에 묻혀 삐죽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둠이 더 짙어지니 굴뚝에서 거먼 길이 흘러나오는 착시 현상이 일어날 만하다.
이 장면은 사뭇 음산하다. 굴뚝과 관련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착시의 음울함이 “다리를 저는 그림자”로 굴절되었다. 유령이 등장하거나 다리 저는 불우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인의 기억은 어둠의 저변으로 침잠한다. 우물가에는 체인이 벗겨진 녹슨 자전거가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다. 이러한 사정을 통해 시인이 바라보는 저녁의 풍경이 그리 유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의 기억에서 도출된 것이지만 기억과 연관된 과거의 사연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시인의 의식이 어두운 장면 주위를 서성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이나 회한의 심정은 드러내지 않고 지금의 음울한 풍경을 다독이는 듯한 긍정적인 시행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거라고”라는 말에는 분명 상황의 부정성에 대한 의식이 투영되어 있지만 어감은 긍정적이다. 요컨대, 어둠이 짙어질수록 음산한 풍경이 두드러져 보이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이 풍경은 비극적이 아니며 이 정도의 균형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대견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인다는 의미를 전후의 문맥에서 감지할 수 잇다. 그런 메시지를 전한 주체가 “눈두덩이 부은 저녁”일 수 있다. 눈두덩이 부었다는 것은 울었다는 뜻이다. 저녁은 왜 눈두덩이 부을 정도로 눈물을 흘린 것일까? 앞에 잠시 암시된 이별 때문일까? 인간만사 어디서나 벌어지는 이별의 사연이 여기서도 전개된 것일까? 그래서 눈두덩이 부은 저녁이 이 처량한 풍경을 잠시 달래주듯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애쓴 것이라고 위안의 말을 던지고 길가에 한참 서 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시인의 기억에 내장된 사연과 정황을 대체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시인은 이 시「하루」에서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의자를 보여주었다. 의자는 기억을 내장하고 있는 상징적 아이콘이다. 의자 위에 사람들이 앉아 일을 하고 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의자에는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루」의 연장선상에서「의자」라는 시가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자는,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다리를 휘게 하면서
앉았던 바닥이 패어 있다
순간순간 몰려왔던 회오의 감정들이
탄식과 함께 흙바닥을 짓이기면서
작은 흉터를 남긴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자
인부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쌓아올린다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의자는
껴안거나 안겨 있는 한 덩이를 이룬다
끌고 온 기억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때
의자는 그릇처럼 잠자코 날 포개어 둔다
한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겹겹이 껴입고 있으니
오늘의 기억 속에
이전의 널 빼낼 수가 없다
무릎 관절이 꺾이면서
의자 위에 머무르는 시간
내 기억이 널 꼭 껴안고 있다
-「의자」 전문
시인은 시의 첫 행에서 “의자는,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이라고 쉼표까지 찍어 의자가 기억의 아이콘임을 뚜렷이 밝혔다.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무슨 일을 했는지 의자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의자는 다리가 휘어 있고 다리가 닿았던 바닥이 깊게 파여 있기도 하다. 엉덩이가 닿는 깔개 부분에도 여러 가지 징표가 남아 있다. 때로는 회오와 탄식의 감정을 토로하고, 때로는 환희와 갈채를 터뜨리며, 사람들이 의자 위에서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때마다 의자에는 상처가 남고 기억의 잔상이 남는다. 행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의자를 접어 한쪽으로 붙여 세운다. 그 움직임은 기계적이다. 의자에 남긴 사람들의 감정이라든가 기억 따위는 안중에 없다. 오히려 기억의 중압에서 해방되려는 태도를 취한다. 의자에서 과거의 기억을 떨쳐내고 새로운 행사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정리된 의자는 개별성을 잃고 “한 덩이를 이룬다”. 개성을 억누르는 집단은 늘 가혹하다. 그 의자에는 나와 너의 기억도 담겨 있지만 모든 기억은 한 덩이로 묶여 폐기된다. “끌고 온 기억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뿐이다. 의자가 겹겹이 쌓여 포개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기억도 개별성을 잃고 거대한 집단으로 유형화된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무릎 관절을 접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시간만큼은 “내 기억이 널 꼭 껴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고 기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의 지속일 뿐이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기대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비정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지나면 주인공은 의자를 떠나고 주인을 잃은 의자는 한쪽 구석에 겹겹이 포개지고 만다. 이것이 의자의 운명이고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 존재의 숙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자는 기억의 아이콘,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억의 개별성과 시간의 지속성을 결합하여 기억을 종합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타인의 방」이다. 이 시는 1과 2, 두 장면으로 구성된 길이가 긴 장편이어서 전문을 인용하기 벅차다. 어느 방에 들어가니 누군가가 남긴 눅눅한 입김이 코에 감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이 방에서 목구멍에 핏대를 올리며 격한 소리를 토해냈을지 모른다. 그 눅눅한 냄새에 “먼저 도착한 내 유령”의 몸짓도 가세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여기서 ‘유령’은 기억의 지평을 이동하는 자신의 분신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기억과 시간에 집중하는 시인의 의식이 ‘유령’이라는 허구의 분신을 창안한 것이다. 침대 위에는 살구 향을 풍기는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두 줄기 남아 있다. 이것 또한 어느 여성 유령이 남기고 간 “시간의 형해”다. 누군가의 체취와 눅눅한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의 유령과 누군가의 유령이 얼굴을 마주하고 조우하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2에서 장면이 바뀌어 시선이 외부로 향한다. 밖으로 공간이 넓게 확장되어 바닷가를 떠도는 습기와 해안의 차가운 안개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시간과 기억의 향연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상가는 밤이 되어 문을 닫았고 기차가 “지친 쇠바퀴를 긁어대”며 역사에 몸을 들이민다. 플랫폼의 불빛이 기차 창문의 내부를 비치자 기차에 탄 유령들의 형현한 눈빛이 유리창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유령은 속절없이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다. 사람들은 서둘러 내려서 어디론가 자기의 갈 곳으로 몸을 옮긴다. 그들의 움직임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병자처럼 음울하다. 마치 종착역으로 향하는 듯한 종말감을 안겨준다. 이러한 장면을 바라보며 새벽의 시간을 맞은 나의 유령은 기다림도 기대도 없는 어둠 속에서 ”구긴 종이 냄새의 나뭇잎 이불을 끌어당“겨 아침잠을 청한다. 이 쓸쓸한 장면의 열거는 인간은 누구든 타인의 방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고전적인 주제를 새로운 상황과 이미지로 재구성했다. 인간은 유령이고 시한부 환자에 불과하다는 음울한 의식이 내재해 있다.
염창권이 이렇게 음울한 기억의 스펙트럼을 지속적으로 산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기억의 저층에 어떠한 앙금이 침전되어 있기에 시간의 저속 항해를 계속하는 것일까? 그의 시「비 그친 뒤」에서처럼 “까막총각이던 때” 풋가슴을 열어젖혀 보인 “첫사랑의 빛깔”이 남아 있어서일까? 아직도 그의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들끓는 마음” 때문인가? “가슴에 들끓는 피 한 사발/간장 종지처럼 짜글짜글/졸아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사랑의 순정은 평생을 지속해도 퇴색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포함하여「철근」,「오후의 산책」,「고미집」,「입동」,「거미줄」등에 나타난 “생활의 근력”이 기억과 시간의 지층 탐구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굴삭기가 허물고 간 뒤
시멘트 더미에서 비어져 나와
뭉툭하게 잘린 손가락을
허공의 곳곳에 쑤셔 넣고 있다
벌건 수심을 흘리며
구부러져 가던 저 노령의 건물을 버팅긴 것은
바람 든 뼈대가 아니라
기억의 끈을 조이는 철근의 인장력이었으니
먼지 속에 풀썩 주저앉은
철거민의 몸에도
수천의 신경선이 가닥가닥 꽂혀 있는 것인데
모래먼지 같은 살 틈에서
乙자로 구부러진 채 팽팽한
이 견딤은
내던져질 때마다 상처를 들쑤시며
목을 빳빳이 세우는
-「철근」 전문
기억 시편과는 조금 화법이 다른 이 시는 철거 현장에 굴삭기가 헤치고 지나간 다음에 남아 있는 철근 더미를 소재로 한 것이다. 굴삭기가 낡은 건물을 허물며 후비고 다녔으니 시멘트 더미 여기저기에 골조를 지탱하던 철근 뭉치들이 사납게 솟아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뭉툭하게 잘린 손가락”처럼 흉하게 보이는 물체지만, 그것은 건물을 끝까지 버텨온 장력의 중심이었다. 시인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여기서도 “기억의 끈을 조이는 철근의 인장력”이란 말을 썼다. 건물을 지탱하는 힘이 철근이듯 기억의 끈을 조이는 것도 철근의 인장력인 것이다. 그런데 그 철근의 힘이 “먼지 속에 풀썩 주저앉은/철거민의 몸에도” 꽂혀 있다고 했다. 철거민은 현장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도 철근의 인장력으로 생의 한 고비를 견딘 것이다.
그는「머리를 빗으며」에서 아무리 눌러도 솟구쳐 오르는 흰 머리칼을 “콘크리트 더미에서 갓 뽑아낸 철근”에 비유하기도 했다. 외부의 압력이 아무리 강해도 팽팽히 견디며 “목을 빳빳이 세우는” 생명의 힘이 낡은 건물을 지탱하게 하고 철거민들의 마지막 생존을 버티게 하고 시간의 침식에 시달리는 기억의 희미한 육체를 끝까지 지킨 동력이다. 그 동력을 그는 말바우 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 여자의 “생활의 근력”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철사보다 강하게
허공을 버팅기는 저 생활의 근력들
허공이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린다
부유하는 시간들이
눈썰미 곱게 내려앉는다
그 기운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고무밴드로 후려잡아 질끈 동인다
그러나 머리에 인 함지박 밑으로
짧게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있어
역광으로 희게 부서진다
함께 동여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마침내 바람 속에 몸을 부실 때는
눈이 시리다
내 동창이었던 여자
전봇대 쪽 골목을 돌아가서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미줄」 부분
고무 밴드를 똬리 삼아 머리에 두르고 함지박을 거뜬히 머리에 인 시장바닥의 여인이 힘차게 살아간다. 그 여인에게는 과거의 회상은 일종의 사치고 허영이다. 유령처럼 떠도는 나약한 기억의 거미줄은 생활의 근력 앞에 무기력하다. 기억은 허공의 대기 속에 분수처럼 포말로 흩어지지만, 생활의 근육은 철사보다 강하게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러니 “허공이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고 “부유하는 시간들이/눈썰미 곱게 내려앉는다.” 기억의 유령들과 추억에 잠기는 것은 낭만주의자들의 허황한 사치다. 허황한 낭만의 무리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 여인은 고무 밴드를 후려잡아 질끈 동이고 머리에 함지박을 인다. 시인은 그 장면을 보고 “눈이 시리다”고 느낀다. 세월의 변화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의 강인한 근력에 경이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생의 현장에 기억의 재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공에 도전하는 생활의 근력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활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 세상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그 여인의 강인함을 재인식하는 것도 기억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대비적으로 조명하고 자신과 거리를 두고 그 여인을 성찰했기에, 역광으로 빛나는 생활의 힘을 더 잘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인식과 발전의 촉매 역할을 한다. 기억은 인식과 발견을 성숙한 방향으로 완성시킨다. 허공에 포말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억의 조각들이 의미 있는 형상으로 결합되어 인간 사유를 새로운 발견으로 이끌어간다.
장마 그친 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실비단 손수건 하나 걸려 있다
바람이 그 허공을 들여다보며 펄럭거린다
햇살이 은빛 천 위에 부서지며 땀을 닦는다
그가 번지점프를 하듯 허공을 건널 때
바람의 실날같은 희망이 풀려나오면서
직선으로 대각선으로 때로는 타원형으로
몸을 겹치거나 만나거나 이윽고 헤어지며 짜올린 덫
그 덫에 내가 걸려서 허우적거리며 거미를 기다린다
허공에 길을 이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거미의 행적
저 부유스런 꿈의 파동을
청명하게 엇갈린 햇살 틈으로
바람의 맨발이 넘나들고
풀려나온 꿈의 입자들은 가볍기만 하다
어느덧 끈적이다가 낡아버린 꿈의 실꾸리를
이제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
햇살 속에서 곱게 삭아갈 것이다
-「거미줄」 전문
이 시는 희미한 거미줄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상징의 형상으로 제시했다. 허공에 “실비단 손수건”같은 연약한 거미줄이 걸려 있다. 바람이 불면 거미줄이 흔들리고 햇살이 비치면 잠시 거미줄에 은빛 물결이 일기도 한다. 거미는 허공에 거미줄을 짜 놓고 먹이를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허공의 거미줄은 거미의 생존 방식이고 자신의 꿈을 공중에 옮겨 놓은 것이기도 하다. 거미는 거미줄을 틀어야 생존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거미줄을 다시 보니 청명한 햇살 사이로 “바람의 맨발”과 “꿈의 입자들”이 가볍게 넘나드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거미줄은 공중에 부착된 생명 유지의 도구가 아니라 시인의 소망을 담은 아름다운 ‘꿈의 입자’로 상승한다.
거미는 자신이 만들어낸 “꿈의 실꾸리”를 공중에 달아두고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자신이 펼쳐낸 운명의 길을 걷는다. 거미줄이 “햇살 속에서 곱게 삭아갈” 때까지 자신의 길을 지키는 것이 거미의 운명이다. 염창권 시인에게 기억의 영상은 바로 이 거미줄과 같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지도를 기억으로 직조하여 허공에 걸어놓은 것이다. 꿈을 담은 기억의 지도가 “햇살 속에서 곱게 삭아갈” 때까지 그는 자신의 서정을 펼쳐갈 것이다. 그 서정이 그의 존재를 지탱하는 “생활의 근력”이자 “생존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시인의 행로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그 즐거운 동행이 우리의 꿈을 이루는 방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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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기억의 밀도와 시간의 질량
기차가 “지친쇠바퀴를 긁어대”며 역사에 몸을 들이민다. 플랫폼의 불빛이 기차 창문의 내무부를 비치자 기차에 탄 유령들의 형형항 눈빛이 유리창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시인은 기억의 지도가 “햇살 속에서 곱게 삭아갈” 때까지 자신의 서정을 펼쳐갈 것이다. 그 서정이 그의 존재를 지탱하는 “생활의 근력”이자 “생존의 근거”이다. 나는 이러한 시인의 행로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그 즐거운 동행이 우리의 꿈을 이루는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숭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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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권廉昌權 시인∥
∙ 1960년 보성 출생.
∙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1991년 『소년중앙』에 동시가, 1992년 『겨레시조』에 평론이 각기 당선되었다.
∙ 시집으로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일상들』
∙ 시조집으로 『햇살의 길』『숨』『호두껍질 속의 별』『마음의 음력』
∙ 평론집으로『존재의 기척』등이 있다
∙ 박용철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시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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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염창권의 시는 기억이 서정을 주도한다. 기억이라는 마법의 손길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서정의 수로를 펼친다. 시간은 기억의 후경에서 정서의 진폭을 조절하고 공감의 밀도를 강화한다. 염창권이 이렇게 음울한 기억의 스펙트럼을 지속적으로 산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기억의 저층에 어떠한 앙금이 침전되어 있기에 시간의 저속 항해를 계속하는 것일까? 그의 시 「비 그친 뒤」에서처럼 “까막총각이던 때” 풋가슴을 열어젖혀 보인 “첫사랑의 빛깔”이 남아 있어서일까? 아직도 그의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들끓는 마음” 때문인가? “가슴에 들끓는 피 한 사발/ 간장 종지처럼 짜글짜글/ 졸아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사랑의 순정은 평생을 지속해도 퇴색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포함하여「철근」「오후의 산책」「거미집」「입동」「거미줄」등에 나타난 “생활의 근력”이 기억과 시간의 지층 탐구의 진정한 동력이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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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