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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기쁨의 고통, 기쁨의 십자가!
젊은 사제 시절 저는 갈곳없는 아이들을 위한 소규모 아동 양육 시절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담당했던 역할은 각 집에서 사고뭉치 아이들, 문제아들이 생기면 본부로 데리고 와서 모아서, 같이 지내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보내면 백 퍼센트 땡땡이치고, 선생님들 괴롭히고, 제가 모아서 공부를 좀 시키려 하면 즉시 졸아버리고, 저는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에 하루 온 종일, 일년 사시사철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아침 먹고 축구하고, 점심 먹고 농구하고, 저녁 먹고 게임하고, 주말 되면 피시방, 노래방, 등산 낚시 다니고, 정말이지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한번은 아이들 네 명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을 갔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절대로 크게 떠들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줬습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냉탕 속에서 수영을 하고, 물장구를 치고, 크게 떠들고 싸우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어르신 몇 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기 아이들 보호자 누구요?”
그때 저는 온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너무 창피한 나머지 몸을 더 깊숙이 탕속으로 담구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그러는 겁니다. “이 신부님이 우리 아빠예요!”
그러자 어르신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그러셨습니다. “세상 말세네. 요즘은 신부님들도 장가를 가시나?”
돌아보니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때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알 아이들 때문에 상습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그때 늘 1톤 트럭에다가 아이들 생필품 싣고 각 집에 배달을 다녔는데,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떤 때 운전하다가 심각한 교통 정체가 생기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려놓고, 일분, 이분, 핸들에 머리를 쳐박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가 뒤차가 빵빵 하면 일어나서, 다시 운전을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늘 온 몸이 피곤하고 뻐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겪은 고통은 괴로움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성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고통 역시 그런 고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내 한 몸, 몸이 으스러지도록 고통스럽지만, 나로 인해 너희는 살겠구나, 너희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겪는 기쁨의 고통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떨리는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 고통 잠시 후면 끝날 것이고, 내 인내와 희생으로 너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기쁨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었음을 확신합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고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통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면,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이사야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진리란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하느님 자녀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더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이끌던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에 처하게 되고 어떤 분들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 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이 순교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 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년 4월 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 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제’라는 정체성, 신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제다.’라는 정체성을 목숨으로 지켜내신 것입니다.
요한의 수난기에서는 두 인물이 대비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임을 포기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 두 인물을 대비하며 하느님 자녀로서의 신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 자녀는 십자가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라도에게 말씀해 주시려던 진리입니다.
유다인 입으로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려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위대한 성인으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訶川要産)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사 직전에 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구출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1909년 성탄절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고독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 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신조는 이것이라 합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피 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그러면 우리 살과 피가 이웃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에페 1, 7)
사랑을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인간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느님과 화해를,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안고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아드님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한 순명과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희생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셨고, 이제 순명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실 시간에 가까이 이르신다. 이때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밤이 늦도록 땅에 엎드려 당신이 당하실 수치스러운 고통과 모욕,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분은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혀 갖은 조롱과 매를 맞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자인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라는 말로 배반을 당하셨고, 온몸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넘어졌고, 결국, 갈바리아 언덕에 끌려가 온몸이 벌거숭이가 되어 굵은 쇠못으로 네 수족이 못 박혀 십자가 위 허공에 달려 강도들 사이에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자녀들을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마리아는 교회의 모습이 되셨다.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시고 이제는 “목마르다!”(19,28) 하신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목말라 하신다. 그러면서, “이제 다 이루어졌다.”(19,30) 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즉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더 당신의 영이 당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인간 위에 부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제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 위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파하고, 그 구원을 완성으로 인도하면서, 항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한 군사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인류 구원의 속죄물로 희생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드리신 순종이오,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여야 하겠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묵상하자.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6.25 전쟁 때, 외국에서 파견된 한 군의관이 추운 겨울에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리 밑에 벌거벗은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기에 동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품에서 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모든 옷을 벗어 아이를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다리 밑 양지바른 곳에 여인을 묻어주고, 이 갓난아기를 자기의 양녀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기가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성인이 된 양녀를 데리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 밑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의 주인공이 너의 생모였고 너를 살리기 위해 얼어 죽었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딸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시 뒤에 자기 재킷을 벗어 무덤을 덮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이 중첩됩니다. 주님께 우리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그때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어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특별히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을까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멸시와 배척을 표시합니다. 무한한 사랑만을 전해주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악의에 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한 마디만 남기시고 말입니다. 멸시와 배척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또 악의에 찬 목소리에도 묵묵히 계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십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역시 완벽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로레타 영).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18,36)
주님의 나라는
육의 나라가 아니라
영의 나라이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라라네.
그 나라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세상의 법을 거슬러
하늘의 법에 성실한 나라라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십자가란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의심케 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만큼이나 인간의 고통과 절망,
고독과 허무를 잘 드러내는 곳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매달려 계십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스럽게 하는
‘바로 그곳에’ 매달려 계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인류가 절규하고 신음하고 있는
‘바로 그 곳’에 2천 년 전 모습처럼
똑같이 매달려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아픔과 상처는 뒤로하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의 현존을 ‘바로 그곳에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 30)
주님께서는
삶의 마지막을
십자가에서
마치십니다.
십자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살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가
구원을
안고 갑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삶의 가치를
십자가에서
다시 찾고
만납니다.
하느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로
죄와 죽음을
지우십니다.
소금기둥이
아니라
십자가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는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우리가
주님을 알게되고
우리를
알게되었습니다.
사랑할수록
함께할 수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사랑을 고백하고
십자가의
목숨으로
하느님의
생명을 다시
쓰다듬습니다.
십자가는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열쇠입니다.
묶여 있던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따라
번지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 받으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의 수난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수난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습니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주님의종의 넷째 노래!'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세 시 경'에 돌아가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성찬 전례가 없는 날입니다.
파스카 성삼일의 둘째 날인 오늘, 교회는 어제 밤부터 시작된 밤샘 조배를 이어갑니다. 오후 3시에 함께 모여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저녁에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요한18,1-19,4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시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오늘 독서(이사52,13-53,12)는 '주님의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를 위해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52,1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53,3)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53,4-5)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이사53,10)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