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거 저거 뭐하는 거야. 어이구 춥지 않아요? 지금 겨울인 거 알아요? 근데 춥지 않아요?”
60대가 된 엄마와 30대 중반이 된 딸이 죽도 해변에 섰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풍경이 또 있냐며 차가워진 바닷바람에 옷깃 여미길 여러 차례. 갑자기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바다로 뛰어드는 생면부지의 처자를 붙잡았다.
“차갑긴 한데 바다 속에서 뒹굴다보면 잠수복 속으로 땀이 흘러요. 그럼 전혀 춥지 않아요.”
중년여성의 돌출행동에 살짝 놀란 처자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질문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 바다로 사라졌다.
“여기가 서핑의 성지래. 저기 저 서퍼들에게 강원도에서 파도가 가장 좋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1년 내내 서핑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래.”
엄마의 행동에 한참을 웃던 딸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서퍼들의 천국, 강원도 양양 죽도해변의 또 다른 별칭이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제법 높은 파도에 서핑 마니아들이 하나둘 늘더니, 이들을 위한 맛집과 카페, 강습소까지, 해변에 이국적인 간판이 걸리기 시작했다. 윗동네인 하조대와 아랫동네인 인구해변도 마찬가지. 어딜 가나 보드가 낯설지 않고 몸에 착 달라붙은 슈트를 입은 이들이 바다로 향한다. 겨울을 여름처럼 지내는 이들이라니….
이곳에서 즐기는 산책의 느낌은 여름의 그것일까, 아니면 바닷바람 매서운 겨울일까. 죽도해변에서 죽도를 거쳐 인구해변으로 돌아 나오는 죽도 산책로에 들어섰다. 아침부터 바다로 뛰어든 이들의 생경한 풍경에 겨울바람이 후텁지근했다.
죽도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모습
▶새벽부터 시작되는 파도타기
“여름 지나 가을까진 정말 복작거려요. 그에 비해 겨울엔 찾아오는 서퍼들이 더러 있지만 기대보다 많진 않아요. 여기가 전국에서 가장 파도가 좋다나, 뭐 그러더군요. 매출이요? 여름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뜸한 건 아니니 문 열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문을 연 편의점에 들렀더니 자리 지키고 있던 사장님의 해변 자랑이 이어졌다. 한여름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파도를 즐긴다나 뭐라나. 겨울엔 주로 남자들이 파도를 타는데 요즘은 여성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귀띔이다. 그의 말마따나 파도 위에 올라선 이들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새벽부터 나섰는지 땀인지 바닷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짠물이 이마에 잔뜩 맺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구항
“서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일정한 파도예요. 해변 전체에 파도가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부서지면서 한쪽이라도 제대로 들어오면 거기가 바로 서핑 스폿이에요. 죽도해변만큼 파도가 일정한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곳에 오는 거죠.”
마침 해변 앞에 문을 연 카페 사장이 초보 서퍼들을 앞에 놓고 한동안 설명이 이어졌다. 그 카페 앞에 ‘입문강습(장비 포함) 8만원’ ‘보드·슈트 렌털 종일 4만원’ ‘패들보트 2시간 3만원’ ‘ 샤워(온수 OK) 인당 5000원’이라 쓰인 게시판이 삐죽이 몸을 내밀고 있다. 그러니까 마음만 있는 초보들이 달랑 몸만 와서 빌리고 배우며 파도에 맞설 수 있는 시스템이다.
마음만큼 몸이 따라준다면야…. 아쉬운 마음 뒤로하고 죽도해변 끝자락에 도착하니 죽도 산책로로 들어서는 오르막이 시작됐다. 2㎞ 남짓한 죽도해변을 거쳐 죽도, 인구해변에 이르는 산책은 넉넉히 1시간 반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다.
죽도 산책로 병풍바위
▶해변산책부터 짧은 산행까지 아기자기한 길
해변에서 일출을 본 후 걷게 된 산책로는 바닷가에 비해 고요했다. 이건 원래 정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아침부터 바다에 뛰어든 이들이 산책하는 이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그런데 이 길, 짧지만 허투루 볼 그저 그런 길이 아니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자리한 해안산책로부터 죽도 봉우리에 철골 구조물로 만든 거대한 전망대까지 산행코스도 마련돼 있다. 철제 계단과 데크길로 이어지는 해안산책로에는 300년 전 어느 유학자의 한시에도 등장한다는 죽도 절구바위의 선녀탕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선녀가 목욕하던 전설이 깃든 곳이다. 4계절 내내 물이 빠지지 않는다는데 그 모양새가 오묘하다.
그 옆에 자리한 신선바위는 말 그대로 신선들이 놀던 바위다. 지금이야 관광객들의 포토 스폿이자 낚시꾼들의 주요 포인트가 됐지만 주변의 암석들과 함께 수많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연이어 자리한 부채바위는 멀리서 봐도 부채를 닮았다. 너른 품이 바람을 막고 있어 죽도의 소중한 일출 장소가 됐다. 해안산책로는 크고 작은 바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관광 코스가 된다. 커다란 바위에 올라 낚시에 나선 강태공들도 여럿이다.
죽도 정상의 전망대
부채바위를 뒤로 하고 나무 데크로 오르면 여기부터 짧은 산행이 시작된다. 중간쯤 오르다보면 죽도정이라는 잘생긴 정자가 자리했는데, 코로나19 탓인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논 것이 아쉬웠다.
조금 더 오르면 죽도전망대다. 죽도 정상 부근에 철제 계단을 이어 붙여 멋들어진 모양의 전망대가 완성됐다. 이곳에 오르면 죽도해변과 인구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두 해변가의 멋진 카페와 레스토랑을 일컬어 양리단길이라 하는데, 전망대에서 대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지척이다.
전망대를 기점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인구해변으로 나서는 길이 이어진다. 한산한 인구항을 지나 해변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해변에 물보라 가득 품은 파도가 몰려온다. 항구도 그렇지만 이 해변도 사진 배경으로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짧은 산책이 아쉽다면 차로 5~10분 거리에 자리한 휴휴암(休休庵) 산책도 추천한다. 쉬고 또 쉰다는 뜻을 담은 이곳은 묘적전이란 법당 하나로 창건된 사찰이다. 1999년 바닷가에 누운 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발견되며 불자들 사이에서 명소로 부상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죽도해변
▷찾아가는 길
양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 지경리 버스 승차→죽도해수욕장 정류장 하차→해변까지 도보 이동(약 250m)
▷죽도 산책로
죽도해변→방선암→청허대→주절암→부채바위·신선바위·선녀탕→쉼터→죽도정→죽도전망대→쉼터→성황당→인구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