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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야베스목사
나병환자의 치유(마8;1-4)
우리나라에는 외딴 섬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많은 섬들 중에서 ‘소록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소속되어 있는 외딴 섬입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문둥병 환자들을 몹쓸 병으로 알고 소록도에 집단으로 수용하면서 소록도 하면 문둥병자들의 수용소가 있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문둥병자들을 노역과 군사로 강제로 동원하고, 강제로 낙태수술, 불임수술을 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도 이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켜서 얼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강제노역을 하면서 너무 고생하다보니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에 병균이 침투하여 더 이상하고 흉측한 몰골로 바뀌어 가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나병이라고도 하고, 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노르웨이의 의사인 아르마우어 한센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은 나균이라는 병균에 의해서 전염되는 무서운 전염병임을 판명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그 의사의 업적을 인정하여 ‘한센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현대의학이 많은 부분에서 발전하여 거의 전염이 되지 않기도 하고, 좋은 치료약이 많이 나와서 거의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나병환자들이 사회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1963년에 문둥병은 전염성이 전혀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되어 강제 격리하던 것을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여전히 문둥병자들을 혐오시하기 때문에 음성나병환자들이 정착촌을 형성하여 사는 곳이 우리나라에 약 70여 곳이 있다고 합니다.
정착지마다 교회가 있습니다.
문둥병은 유전이 되지 않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부모가 자녀를 낳아도 그 자녀가 문둥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이 소록도에 문둥병자들을 강제로 수용하면서 강제로 불임수술, 낙태수술을 시키는 인권유린을 저질렀습니다.
문둥병은 몇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문둥병은 몸 속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나병은 “자기도 모르게 3년, 남도 모르게 3년, 자기도 알고 남도 알고 3년”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자기 자신도 그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몸 속 깊이 파고들어갔다가 해가 거듭되면서 몸 밖으로 서서히 그 증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온 몸에 퍼져나갑니다. 손에 걸렸으면 그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온 몸에 퍼지도록 합니다.
문둥병은 몸을 썩게 만듭니다. 문둥병 환처가 썩어서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기까지 합니다. 몸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문둥병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됩니다.
지금이야 전염이 되지 않는다고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따로 격리시키지 않지만 그 전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무조건 따로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회당이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완전히 격리되어 고립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죽으면 완전히 불에 태워야 합니다. 곧 화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살던 집이며 입었던 옷이며, 그가 사용하던 모든 것은 불에 태워야 합니다. 혹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잘 못 만지게 되면 전염이 될까봐 모든 것을 태웠습니다.
이 문둥병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진 죄악을 상징합니다.
문둥병의 특성이나 죄의 특성이 똑 같습니다.
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자신 속에 그런 죄악이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온 영혼을 죄악덩어리로 만들어버립니다. 아주 작은 죄의 뿌리가 온 영혼을 죄악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썩게 만듭니다. 죄가 썩는 냄새가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주게 합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죄악으로 파급되도록 만듭니다. 죄악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죄를 저지르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죽어 지옥에 들어가서 활활 타오는 영원한 지옥불에 온 영혼이 타들어가면서 ‘아이 뜨거워. 아이 뜨거워.’하면서 울부짖어야 됩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이요 죄의 모습은 문둥병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이 발달하여 문둥병이 불치의 병이 아니라 치유될 수 있는 병으로 알려지는 것처럼 죄악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면 죄의 문제가 완전하게 죄사함을 받고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모습을 잠시 묵상하려고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마태복음8;1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장, 6장, 7장의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이후에 마을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하신 산은 은혜의 산입니다.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자리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받은 은혜를 실천하고 나눌 수 있는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도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어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으면 다시 죄악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죄악과 더불어 죄를 지으면서 살려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된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변화받으라고 전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새소망과 행복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며 은혜 받으려고 하는 문둥병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셔야 우리들과 같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문둥병자는 어떻게 합니까?
문둥병자는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나오는 데는 용기와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을 숨겨야 되는 존재입니다.
어쩌다가 동냥이라도 하기 위해서 나오면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보자기 같은 천을 둘러쓰고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하면서 소리쳐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슬슬 그 문둥병자를 피해 갑니다.
그런 수모와 모욕을 참고 견디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울타리에서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문둥병자는 자신들의 울타리에서 나왔습니다.
자신들이 갇혀 살아야 되는 움막에서, 동굴에서, 집단촌에서 나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자신들의 질고가 치료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집에서, 울타리에서, 우리들이 갇혀 살고 있는 어둠의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나와서 예수님 앞으로 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 와야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됩니다.
자신을 거들먹거리면서 ‘야, 예수 선생. 당신 병고치는 능력이 많다며. 나 좀 고쳐봐’
이런 자세로 주님께 나아갔다면 그가 고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겸손해야 합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서 꿇어 엎드리는 자세는 오직 주님만이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면서 애원하는 것입니다.
애원하는 것은 거지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동냥을 갔을 때 ‘밥 한 그릇이라도 주세요’ 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밥을 얻지 못하면 하루 종일 사랑하는 온 가족들이 졸졸 굶으며 긴긴 밤을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애절하게 애원하는 모습이 오늘 주님 앞에서 기도하는 자세, 간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오늘 꼭 은혜를 주십시오. 오늘 은혜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와서 꿇어 엎드리며 자신을 꼭 고쳐달라고 애걸하는 문둥병자를 보시면서 한없이 가여운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민망히 여기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불쌍히 여기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볼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이웃들에게도 버림받아서 저주받은 인생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볼 때도 그런 마음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아픔과 쓰라린 고통과 질고를 보시면서 똑 같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들을 만나 주십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지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만져주셨습니다.
지금이야 문둥병이 전염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문둥병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여 조금만 피부에 와 닿아도 금방 전염이 되어 문둥병에 걸린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문둥병자를 만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환자의 손을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한평생 어느 누구도 자기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주셨을 때 그 자체로만이라도 이적이요 기적이요 은혜요 능력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자기의 손을 붙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아픔과 질고와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들 성도님들에게 이 시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으로, 민망히 여겨주시는 마음으로, 측은히 여겨주시는 마음으로, 한없이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마음으로 만나주시길 원합니다.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어루만져주시길 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직접 문둥병자를 만져주셨지만 우리들에게는 영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주님께서 우리들을 품어주시고 어루만져주신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은혜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는 말씀을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곧, 즉시로 그의 문둥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지체하지 않습니다.
곧 바로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문제에도 곧 바로 해결해 주시길 원합니다.
4. 엄하게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떠벌리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광고하며 떠들기를 좋아합니다.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이제는 당신들과 똑 같은 사람이요. 난 이제는 더 이상 문둥병자가 아니란 말이요. 하면서 떠벌리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문둥이라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혐오스러워했던 이웃들, 가족들, 친지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고침받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나타내고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합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서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질병의 치료여부를 판단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질병이든지 특히 부정한 질병으로 판결되는 질병은 제사장이 반드시 치료여부를 확인하는 확인서가 있어야 마을에도, 집에도, 회당에도, 성전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문둥병, 나병에 걸렸다가 치료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물을 드려서 제사를 드린 후 1주일이 지나야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때 드려지는 예물은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입니다.
이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이 있는 성전으로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곧 질병 치료에 대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려서 쫓겨난 사람이 이제 완전히 깨끗하게 치료받아서 가정으로, 회당으로, 성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런 예물이 아깝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부족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제는 인간답게, 행복하게,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문둥병에 걸렸을 때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겨우겨우 연명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예물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일조예물, 감사예물, 각종 예물을 드리면서 ‘아유 아까워 죽겠네.’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떠벌리고 말았습니다.
똑 같은 사건을 마가복음1; 4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심심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고침을 받았다고 온 동네에 다니면서 자랑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이 생각없는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피하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온전한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조용조용하게 다니면서 하나님의 천국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이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조용한 곳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이렇게 온 동네에 다니면서 떠벌렸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적을 베푸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지 단지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떠벌리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만을 고치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질병, 육신의 문제만을 해결받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도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전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한 전도여야 합니다.
은혜받았다고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 간증하고, 저 사람에게 간증하면서 마치 은혜는 자신이 다 받은 것처럼, 자신만 그런 은사를 받고, 그런 응답을 받은 것처럼 떠벌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간증이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간증할 수 있도록 세우실 것입니다.
그 때 간증하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말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면 참고 절제해야 됩니다.
오늘 처음 시작하면 소록도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요.
소록도에서 목회 하시는 어느 목사님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목사님은 당황해졌습니다.
“아니, 어르신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목사님은 무언가 사연이 있나보다 생각하면서 자리를 권해 주었습니다.
노인은 자리에 앉자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 아이가 열한 살 때였지요.”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 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 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느냐고.......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게 내다 버린 채 한 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들의 소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선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6.25 전쟁 직후에 소록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에서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에서 파견 나온 간호사 선교사 한 사람이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아주 친절하게 간호하는 뜨거운 인간애의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
간호사는 이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사업가가 당황하면서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그 놀라운 사랑!
내가 그를 신뢰했을 때 나에게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지금 내 삶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미안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믿지 못하는 영혼들을 볼 때 한없이 불쌍한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미안은 더욱 더 문둥병, 나병 환자들을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문둥병은 격리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몰로카이’라는 섬에서 집단으로 격리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다미안은 문둥병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몰로카이로 갔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상한 마음을 가진 그들은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다미안을 거부합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자신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다미안이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미안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도 저 사람들처럼 문둥병에, 나병이 걸리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다미안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문둥병에 걸리게 해 주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다미안은 기쁨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그들을 섬기며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미안의 진심을 깨닫게 된 문둥병자들은 다미안 선교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오늘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이나, 다른 아홉명의 자녀로 인하여 인생의 허무를 느꼈지만 문둥병에 걸렸다고 내다 버렸던 그 아들로 인하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을 깨달은 노인이나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여 문둥병자를 돌보았던 간호사에게 임했던 그 은혜와 다미안 선교사를 통해서 온전하게 구원받은 문둥병자들에게 임했던 그 행복과 기쁨과 참소망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오늘도 임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