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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묵상글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지금 평화의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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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금 평화의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린 바이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은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이고
열두 사도를 파견한 얘기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파견된다는 면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가라는 것은 같지만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는 “가거라”는 명령어와
인사하지 말라는 말과 평화를 선포하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에게 가는 것보다 더 멀리 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방인에게 가야 하기에 단호히 명하시는 걸 겁니다.
가는 길에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먼 길 가야 하고 이방인에게 가야 하는데
이별 인사하지 말고 한가롭게 동네 사람들과 노닥거리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열두 사도 파견과 비교해서 더 중요한 차이점은 평화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우리가 일본에 가서 평화를 빌어주는 것과 같고,
프란치스코처럼 전쟁 가운데 있는 적국에 가서 평화를 빌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시대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키고 이슬람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와중에 평화를 가지고 술탄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방법도 평화로워야 하고
목표도 평화여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이러한 복음 선포가 왜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이 확전 일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강경파들이 연정을 펴고 있고,
하마스도 강경파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에는 평화가 없고 오직 전쟁에서 승리밖에 없습니다.
위기 상황을 조장하고 그러니 자기들을 지지하라고 국민을 압박하며,
군수 사업을 일으키고 군비 경쟁을 합니다.
그러니 이런 강경파와 군수업자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평화의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전파되어야 하고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중동 전쟁을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위험합니다.
이 정부는 힘들게 체결한 9, 19 군사합의를 깨겠다는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K-무기 수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며 9, 19 군사합의의 파기를 반대하는
여론 조사가 높게 나오자 발표하지 않고 조사 자체를 중단합니다.
이 정부는 북한이 장사정포를 발사하면 그것을 요격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아이언돔과 같은 요격 체계를 갖추면 된다고 하며
그런 방어 체계 구축에 애쓰는데 물론 그런 노력도 해야겠지만
그 이전에 평화 체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아이언돔이 수천 발의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한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무력화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떤 복음 선포보다도
평화를 평화롭게 전하는 복음 선포가 중요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루카 복음사가이고 일흔두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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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오늘은 성 루카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성취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구어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 준 그 평화를 형제들 안에 심고 가꾸고 일구며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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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고등학생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 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어느새 기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교 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분심, 잠념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이 시대에도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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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님의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산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격물치지는 흐트러진 것을 바르게 하면서 앎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다산의 글은 그래서 늘 정갈하고, 정확했습니다.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관리가 행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관리는 목민심서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다산은 완벽함을 추구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창의적으로 먼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다산과 같은 본당 신부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문학, 음악, 건축, 언어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여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게도 ‘팡세, 그리스 철학사, 예수’와 같은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산보도 늘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좋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연암은 ‘갈 길과 요령’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다산이 조선이라는 ‘틀’에서 격물치지를 했다면 연암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의 ‘틀’에서 갈 길과 요령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이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정책을 세운다면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암은 만주 벌판을 거닐면서 드디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듯이, 연암은 끝없이 이어지는 만주벌판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음’을 터트려도 좋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연암의 ‘열하일기, 호질, 허생전, 양반전’은 다산의 격물치지는 아니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한 자신의 생각을 요령껏 기록한 것입니다. 연암이 다산처럼 기록했다면 당시 조선의 법정에서 유죄판단을 받을 수 있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연암은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연암에게는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창조적인 문하생들이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에 다산의 ‘격물치지’와 연암의 ‘갈 길과 요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환상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격물치지를 따르기도 어렵고, 연암의 창조적인 갈 길과 요령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저 자신 매일 ‘묵상’을 나누지만 ‘갈 길’을 모르면 시간이 흘러도 글을 쓰기 힘들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에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려 할 뿐입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사가’ 루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두 개의 성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루카 복음이 우리에게 ‘갈 길과 요령’을 알려 준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격물치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루카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글을 썼기에 ‘갈 길과 요령 그리고 격물치지’가 조화를 이룬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에게 ‘갈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요령’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격물치지’는 겸손과 인내로 ‘칠죄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루가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만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도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 23장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모든 만남이 지향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끝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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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제자들의 임무는 이것입니다.
그곳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이것이 바로 파견된 제자들의 임무입니다.
이 임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도 병자들을 고쳐 줄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따스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손길로, 온정을 담은 음성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대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은 죽음이나 종말이 다가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그대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혹은 ‘하느님께서 그대와 함께 지내고 계십니다.’입니다.
즉 제자들과 우리의 의무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돌보며 동시에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임무는 주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시대부터 지금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두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베풀고 나누다가 지치면 잠시 쉬면서 나 자신도 돌볼 줄 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 옆에서 그분이 계시고, 나 자신도 내가 돌보아야 하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말에도 체온이 담긴다.
말에도 체온이 있다네요.
따뜻한 말
뜨거운 말
미지근한 말
차가운 말
냉랭한 말
늘 따뜻할 수는 없겠지요.
늘 뜨겁지는 못하겠지요.
그래도 자주 따뜻하기를….
그래도 자주 뜨겁기를….
만약
내 안에서 차가운 말이 튀어나오면
내가 나에게 말해주세요.
따뜻하게
따뜻하게
지금의 그대 체온과 같은 온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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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님께서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방귀를 ‘뽕’ 꾸고 말았습니다. 신자들 앞에서 소리가 났다는 민망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방귀 뀌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이해해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웃으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어이없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우리 신부님께서 신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바지에 똥 쌌다.’라는 소문입니다.
사실 소문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계속해서 살이 붙어서 사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가장 재미있는 말이 ‘뒷담화’라고 하지만, 재미를 떠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성인’의 길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고 있었을까요? 분명히 엄청나게 빠른 전파 속도를 가지고 있는 ‘말’인데, 우리는 다른 부정적인 말에 대해서는 소문의 속도에 더하고 있지만 정작 주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우리 신앙 선조들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가 있는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셔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소식은 우리 구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빨리 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식을 전하는 일꾼으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소식이 아닌 다른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반대자로 사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루카 복음사가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성모님과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더 가까이 그리고 생생하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게 하는 주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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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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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님의 제자이자 복음 선포의 사도로-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하나입니다. 교회에 속한 믿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이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인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에 은혜로이 확인하는, 주님께 불림받은 자, 파견된 자로서의 우리의 복된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원을 자각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선택하여 살 때 아름답고 자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요, 제1독서 ‘티모데오에게 보낸 둘 째 편지’의 주인공 성 바오로요, 여기 독서에서 언급되는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입니다.
그리고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 10월1일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873-1897)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예전에는 포교사업의 수호자 성녀 대축일로 지냈습니다. 성녀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올해 교황님의 53개 항목들로 이뤄진 “사도적 권고”중 감동적인 대목과 마지막 기도문도 나눕니다. 교황님이 얼마나 성녀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성소, 마침내 나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내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분은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나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참 좋을 성녀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의 우선적 자질이자 조건입니다. 이어 마지막으로 바치는 교황님의 아름다운 고백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 데레사여!
교회는 복음의 빛을,
복음의 향기를, 복음의 기쁨을 반사할 것을 필요로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장미꽃들을 보내주소서.
당신처럼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당신의 거룩함의 ‘작은 길(little way)’을 닮게 하소서. 아멘”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와 제1독서의 성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주님 사랑 역시 참 놀랍습니다. 늘 주님과 함께 사셨던 성인들이요, 언제 어디서나 이들의 영원한 정주처는 주님이였습니다. 제1독서에 소개되는 바오로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이 결속된 친밀한 우정관계인지 깨닫습니다. 모두 다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바오로와 함께 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짧게 언급되는 구절에서 정말 성 바오로에게 루카는 얼마나 ‘의리의 협조자이자 동역자’인지 깨닫게 됩니다. 다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인 의사였던 루카의 자랑스런 행적을 소개합니다. 말 그대로 지칠줄 모르는 복음 선포의 일꾼이었습니다.
성인은 51년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을 수행하며 힘껏 도왔고,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면서 공동체를 지도한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여행때도 동반합니다.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재차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던 의리의 협조자 루카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인은 성모님을 만나 뵈었고 맨처음 성모님의 초상화도 그렸다 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서에서 성모님을 실감나게 묘사하는가 봅니다.
성인은 루카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을 썼으며, 여기서 전반부는 성 베드로에 집중했고 후반부는 성 바오로에 집중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만큼 겸손함을 견지한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성 바오로의 순교이후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순교로 마감했다는 전승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순교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고난으로 점철된 순교적 삶에 항구했기에 모두 순교자로 인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성 루카는 복음서에서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으며 의사와 화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성 루카는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성인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합니다.
언젠가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요셉 형제님의 “신부님의 강론 스타일을 루카와 같습니다.”라는 극찬에 고무된 적이 있는데, “소(牛)띠”인 저이기에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흡족해 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은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와 소나무이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소씨라면 성명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신학자 형제님이 주신 제 강론에 대한 평, 넷은 제가 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1.쉽다.
2,깊다.
3.아름답다.
4.울림을 준다.
강론도 삶도 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는 이들이라면 자주 확인하여 신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로 하면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관상과 활동처럼 한 실재의 양면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불림받아 주님곁에 제자로 머물던 일흔 두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수확할 밭은, 복음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을 청하기에 앞서 내 친히 주님의 일꾼이 되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 때 주님은 선물처럼 당신 일꾼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이리떼 세상 가운데 양들 같은 순수와 열정의 주님의 일꾼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인 사도요 선교사는 하느님의 섭리와 이웃들의 환대에 의존한 ‘무소유의 전사’, 또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는 ‘평화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이며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꿈을, 비전을 지닌 사랑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고, 어느 곳에 머물든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그대로 이는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된 제자들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죄도많고 병도 많고 이리떼 괴물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앞서 주님의 힘으로, 성령으로 완전무장하여 내 친히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가 되어 살면서 주님의 평화와 주님의 치유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된 우리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치유의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 힐링하시어 세상에 당신 평화의 전사로 파견하십니다. 미사야 말로 주님의 참 좋은 힐링센타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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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파견된 사람>
가고픈 곳이
아니라
가라하는 곳으로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있고픈 곳이
아니라
있으라는 곳으로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계시려는 곳으로
하고픈 일이
아니라
하라는 일을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하시려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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