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는 숭불(崇佛) 의식이 강해 승상(僧像), 즉 승려의 초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통일신라시대(813년) 단속사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고승(高僧)의 초상은 주로 추모와 공경의 마음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초상화의 한쪽에는 찬문(讚文)을 적어 넣음으로써 법통과 추모,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
특히, 고려시대 의천(義天)은 자신의 초상을 보고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많은 찬사를 남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분위기 때문에 승상 제작은 많이 줄어들었고, 찬문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국가에 공을 세웠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승려는 초상을 제작하였는데, 삼성(三聖: 나옹, 무학, 지공)과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초상이 대표적이다.
오른쪽을 향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대부분인 이들의 초상은 고려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중국의 송,
원대의 선종계 진영과 비슷하다.
고승의 초상은 제자나 신도들에게 감계(鑑戒: 교훈이 될 만한 본보기)가 되는 동시에 각 종파의
입지를 다지고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승의 초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산대사(西山大師)라는 호로 잘 알려진 휴정(休靜, 1520-1604)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서 국왕과 나라를 구한 충신이다.
선조의 부탁으로 임진왜란 때 전국에 격문을 보내 승병의 궐기를 호소했고, 1,500명의 승병을 조직하여 평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에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으로 임명했지만, 나이가 들어 늙었다는 이유로 제자인
유정(惟政, 사명대사)에게 그 직책을 물려주었다. 그는 선조를 궁까지 호위한 뒤 묘향산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으며, 1604년에 원적암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그림 속의 서산대사는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왼손은 불자를 들고, 오른손은 팔걸이를 붙잡고 있다.
얼굴은 하얗게 처리한 다음 이목구비를 선으로만 나타냄으로써 일반적인 승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온화하고 강직한 성품이 잘 묘사된 이 초상은 서산대사가 입적(入寂)한 후에 그려진 것으로서 그
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의미로 제작되었다. 그림 상단에는 선조가 내린 존칭인
‘국일도 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가 쓰여 있다.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유정(惟政, 1544-1610)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전공(戰功)을 세우고,
「임진록(壬辰錄)」이라는 고전소설에 영웅으로 등장할 만큼 민족의식을 발현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사명당(四溟堂)으로 유명한 그는 임진왜란 때 스승인 서산대사의 지휘 아래 활약하다가,
스승이 은퇴하자 그 직책을 물려받아 승군(僧軍)을 통솔하여 유성룡(柳成龍),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가 1604년(선조 37)에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온 이야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 초상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사명당은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백묘법(白描法),
즉 가는 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대체로 온화한 모습이나, 눈매만큼은
날카롭게 그림으로써 건장한 어깨, 긴 수염과 더불어 승병장의 기백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림 하단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로 보아 1796년에 진영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전해오는 10여 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蛇足:사명대사는 일개 승려의 몸으로 조선인 포로 3천 5백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동안 북한을 방문하여 많은 도움을 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왜 단 한 명의
납북인사나 국군 포로를 데려 오지 못 했을까? 참으로 복장 터질 일이다.
조선시대 여인(女人)의 초상과 두 의기(義妓)의 초상
조선시대는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 중심의 사회이다 보니 초상화 가운데 여인의 초상이 제작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 초기에 주로 왕비의 초상이 제작되었을 뿐,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거의 없고 극히 일부 몇 작품만 전하고 있다.
일반 여인의 초상으로는 사대부가의 여인상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반부인상」을 들 수 있다. 비록 조선 후기의 이모본이지만 조선 초기에 제작된 범본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외에 여인의 그림은 신윤복의 미인화나 기녀 및 여인들의 그림이 있지만 그림 속 인물이 명확하지 않아 이 부류의 그림은 초상의 범위에서 제외하였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여인의 초상은 모두 의기(義妓)로 알려진 여인들의 그림이다. 계월향과 최연홍의 초상은 그녀들의 사후에 추모의 의미를 담아 사당 배향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여성의 지조와 충절을 강조하는 계몽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계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계월향(?-1592)은 조선 중기의 평양 출신 기녀이다. 김경서(1564-1642)의
첩이었던 그녀는 임진왜란 때 평양성이 함락되자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을 참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의기로 논개와 더불어 여인의 충절과 지조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에 그녀는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에 봉안되었다.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된 계월향 초상은 좌안칠분면의 전신좌상으로 머리 모양은 계월향 생존 대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복식은 19세기 이후의 것을 취하고 있다. 얼굴은 가는 눈썹과 얇은 눈꺼풀, 오뚝하고
작은 코, 붉고 작은 입술로 그려져 있으며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이 초상은 그림 상단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계월향이 죽은 지 한참 뒤에 사당 배향용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초상 속의 모습은
생전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최초로 ‘엄마와 아기’를 주제로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1914년에 그린 「운낭자상」은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라는 기녀를 그린 그림이다. 최연홍은 평안남도 가산 고을의 청기(廳妓)로
홍경래의 난(1811년) 때에 사망한 가산 군수 정시(鄭蓍)와 시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냈고,
시동생을 극진히 간호했다. 난이 평정되자 조정은 그녀를 기적(妓籍)에서 제외하고 표창하였으며,
사후에는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운낭자상은 살구색의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옥색 치마를 입고,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을 살짝 보이는
여인이 해맑은 표정의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전신입상의 초상이다. 간략한 필선과 부드러운 담채로
인물을 표현한 이 초상은 전반적으로 18~19세기의 미인도 특징과 근대기 회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어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 있는 ‘雲娘子二十七世像(운낭자이십칠세상)’이라는 기록에서 이 초상은 운낭자의 27세 때
모습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石芝(석지), 定山郡守蔡龍臣信章(정산군수채용신신장)’이라는 날인을
통해 채용신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채용신은 고종의 어진을 그렸을 만큼 당대 초상화로 명성이
"文대통령님, 金위원장님… 제발 우리 아버지 돌려보내주세요" 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 YS-11기… 당시 두 살이던 황인철씨의 외로운 투쟁기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YS-11 항공기 안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영동방송(현 MBC 강원영동)의 3년차 PD였던 황원(당시 32세)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보도부장을 대신해 떠난 서울 출장길. 전날 부부싸움을 하고 나온 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행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인 낮 12시 25분쯤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을 가장한 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그는 돌을 막 넘은 아들, 백일이 갓 지난 딸이 있었다.
그때의 핏덩이 아들이 쉰 넘은 중년이 됐다. 황인철(51)씨는 아버지 송환 운동에 20년을 바쳤다. 통일부와 외교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우리 정부는 '고도의 정치·외교적 사안'이라며 회피했다. 북 정권은 아예 대꾸도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국제법 책을 펼쳐놓고 난생처음 듣는 조약과 국제 협약을 공부했다. 100만인 서명을 받고자 팔도를 누볐고, 제네바와 뉴욕에서 '눈물의 증언'도 했다. 그렇게 부친의 납북 문제를 국제 사회에 공론화했다.
첫댓글 귀한사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