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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시모음
문답법을 버리다 / 이성선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나무는 말을 삼간다 / 강수성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동네가 시끄러우면
건너편 산으로
휘잉 새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말 / 정원석
산에 사는 산사람은
말이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을
산에서 살다보니 말을 잃었다.
지저귀는 새소리 듣기 좋고
피고 지는 꽃들이 보기 좋고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구름도 좋고
그 많은 것 어떻게
말로 다 하나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본다.
난초 앞에서 / 고은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침묵하는 연습 / 유안진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묵언(默言) / 문태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비
묵언(默言)의 날 / 고진하
하루종일 입을 봉(封)하기로 한 날,
마당귀에 엎어져 있는 빈 항아리들을 보았다.
쌀을 넣었던 항아리,
겨를 담았던 항아리,
된장을 익히던 항아리,
술을 빚었던 항아리들.
하지만 지금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거꾸로 엎어져 있다.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시위일까,
고행일까,
큰 입을 봉한 채
물구나무 선 항아리들.
부글부글거리는 욕망을 비워내고도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항아리들!
침묵 수행 / 김종제
눈과 얼음으로
담벼락을 높이 둘러친
겨울숲이 안거에 들었다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으로 정진하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새 날아가는 소리도
멋모르고 숲속에 들어왔다가
얼어붙은 채 허공에 걸려있다
길도 끊기고
한 번 발 들이밀면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무덤 같은 곳이라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겨울숲에서는
살과 살이 붙어서내는
화로 같은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뼈와 뼈가 부딪혀내는
칼날 같은 소리를 잊어버릴 것이다
겨울숲에
한참 앉아있으면
안거 끝내고 나가는
나무가 하는 말이라든가
바위의 소리라든가
눈 깜빡거리며 들을 수 있겠다
말줄임표 / 심효숙
글자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보았니?
글을 읽다
만난
말줄임표(……)
생각의 오솔길
걸어가고 있는 게지.
우리가
생각의 발자국
따라갈 때처럼…….
침묵의 재구성 / 이영식
침묵의 구조는 단순하다
배경이던, 주인이던
맡은바 정물로 앉아 버티는 것이다
구르거나 되바라지지 말고
순정히 각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
그러니까, 침묵의 화법은
지퍼로 입성을 견고히 채우는 것
재갈을 물리는 일이다
침묵을 한 껍질씩 벗겨보면
속이 텅 비었음을 곧 눈치 챌 것이다
침묵을 뜯어먹는 일은
공갈빵을 씹는 것보다 더 허무하다
그러나, 침묵은 잴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우울과 몽상의 묵시록,
그 무게에 눌려
목을 달아 맨 사람도 여럿이다
말라바르 공중정원에는 침묵의 탑이 서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장례가 치러지는 곳이다
시신을 탑 꼭대기에 올려놓고 독수리가 쪼아 먹게 한다
(어느 쪽 눈알이 먼저 파 먹힐까)
차안과 피안을 가르고 남은 뼈가 탑 우물로 떨어져
아라비아海로 흘러들어갈 때
영원한 자유에 드는 법을 가르치는
死者의 書
사거리 길 모퉁이
오와 열을 맞춰 쌓아올린 탑이 있다
노파의 하릴없는 기다림이 내장된 사과 피라미드
틈틈이 박혀 붉게 타오르는 저 벽돌은
또 하나, 침묵의 재구성이다
*침묵의 탑(Tower of Silence) :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뭄바이에 있는 탑
침묵의 자세 / 이정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일찍 알았다
그리하여 침묵
말 할 수 있는 것과 말 할 수 없는 것을 지나는 동안
태양은 제 그림자를 밟으며 타오르고
기다리던 애인은 지쳐 떠났다
나는 나를 꿈꾸는 침묵
침몰하는 온갖 금기와 규정과 규칙들
바람에 맞서다 결국
제 키만큼 저로부터 멀리 쓰러진 갈대들
그리하여 침묵
고장 난 라디오에서 북북거리는 주파수처럼
태양의 모서리에 걸려 소란한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하는 말은 아니다
해야만 하는 말이 해도 되는 말은 아니다
마지막 말의 자세로 쓰러져
때가 되면 일어나 더 큰 바람을 맞이하는
침묵은 내가 가장 늦게 배운 언어이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비트겐슈타인'
시집 <침묵의 자세> 2009. 종려나무
침묵의 비밀 / 김자흔
쉬잇!
우리고양이 입은 비수 두 개로 받쳐져 잇고요
그래서 함부로 남의 말을 내뱉지 않고요
비밀 따윈 절대 발설하지 않지요
어떤 이들은 침묵의 틈새로 새 나오는
우리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귀 기울이면 어떤 비밀이
당신의 달팽이관으로 흘러들지도 모를 테지요
우리의 침묵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건
당신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테고요
언어를 끄집어내는 비밀과 그 비밀을 숨기는 과정은
매일 밤 자라나는 흰 수염에 있다는 것도
금방 발견해낼 수 있을 테지요
어쩌다 애꾸눈을 만나기도 할 텐데요
그러면 그 애꾸눈 속에도 어떤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구나 보면 틀림없을 거예요
우리가 언제 무슨 해답을 구한 적이 있던가요
그건 무엇보다 당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고요
무해한 말이 주는 오해는 이미 터득했으니
우린 다만 깊은 침묵으로 우리 고양이
언어의 그물망을 즐길 따름이지요
시집『이를테면 아주 경쾌하게』2017. 시인동네 시인선
엎드려 졸던 침묵이 / 김지향
초겨울 눈바람이
세상 한페이지를 북, 찢어낸다
엎드려 졸던 침묵이
왁자지껄, 일어난다
다 떨어지고 남은
마지막 한 개 잎이 입을 열고
달그락 달그락
창문에 끝페이지라 소리친다
세상은 일시에
침묵 속에 잠자러 들어간다
침묵 /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침묵의 모서리 / 김수영
우뚝 서 있는, 침묵의 짐승 같은 저돌
오늘도 그는 망치를 들고 돌을 내리친다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틈에 그는 쐐기를 박듯 정을 박는다
꿈틀꿈틀 검게 그은 그의 어깨죽지 수많은 예각이 모여 안으로 닫힌 형상을 이룰 때까지
맨머리에 떨어지는 망치소리. 이윽고, 그의 손 아래에서 입을 벌리는 침묵의 모서리들
침묵 속에서 / 정호승
이별의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는
사랑의 깊이를 모른다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
침묵 속에서 첫눈이 내리고
첫눈이 내 사랑의 말을 덮어버립니다
침묵 / 백무산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어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에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들이 먼저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인간은
입이 달린 앞으로 말하고 싸운다
말없는 등으로 기대고 나눈다
침묵 / 정희성
수업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주어도 아이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는 교실로
낙엽은 날아들고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나온
짧은 탄성 한마디로
눈시울이 붉어진 가을
가을만이 확실한
우리들의 감동이다
메마른 몇 개의 낱말과
눈먼 문법으로 어떻게
우리들의 삶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으랴
만약에 침묵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유일한 대답이라면
비본질적인 질문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으리라
아아 말 못할 우리들의 시대
이루지 못한 꿈의 빛깔로
낙엽은 저렇게 떨어져
가을은 차라리
우리들의 감동이다.
침묵 / 임선기
인간은 침묵에서 언어로 옮겨졌다
침묵의 집에 살다가
언어의 집에 산다
언어의 집에 산다는 것이
언어다운 집에 산다는 것은 아니다
침묵 지나
침묵 너머로 가려는 사람들
언어 지나
침묵 속에 산다
자연은 침묵 속에 있다
강아지도 강아지풀도 침묵 속에 있다
침묵 속에는
강아지의 언어와 강아지풀의 언어가 있다
언어 속에도 침묵이 있다
침묵의 언어는 우주에 펼쳐 있다
침묵은 미(美)처럼 펼쳐 있다
침묵 귀신 / 이시영
발도 없이 구두 한 켤레가 새벽의 자궁을 따고 나온다. 발목은 보이지 않는다. 검정 구두 한 켤레가 빌딩 속으로 급히 빨려 들어간다.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빨간 엘리베이터가 서고 짤칵, 바짓가랭이가 뒤우뚱거리며 나온다.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다리가 식탁에 놓인다. 나이프. 질겁을 하고 유리를 박차고 달아나는 四肢. 잿빛 거리 아래에선 팔다리도 없는 사람들이 어깨를 치고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군. 심장 속에서 새까맣게 탄 손을 꺼낸다. 자네 귀가 보이지 않아. 딱딱한 저녁 공기. 일렁이는 수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은 어디로 갔을까. 광장을 노리는 눈부신 선글라스 세 놈과 말에서 떨어진 강철의 노예 다섯. 3 대 5.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네 입이 이상해. 재갈을 물려야 겠어. 혓바닥 수천개가 아궁이에 부어졌다. 구들장을 들썩거리며 타는 노을. 눈이 멀어가는 군. 그래. 나는 침묵에서 온 귀신. 시인 마귀다. 잘 가라. 다시는 죽지 마라. 슬픈 책 한 권이 전차에 오른다.
침묵서약 / 김경미
나도 너희들이야 오전부터 지도 버리고
호숫가 나뭇잎 사이에 가만히 끼어 않는다
고딕식 햇볕의 그림자나 몇번씩 들어 옮겨 주면서
사진기도 말이 없고
유명하지 않던 벤치들도 한 번 앉은자리 그대로
끝내 조용히 겸손하다
한국관광버스들 지쳐 지나가는 길
다 읽은 책처럼 혼자 해 덮는 저녁노을
침묵 피정 / 전동균
빈 촛대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눈발들이 언 발 부비며 지나가도
어둠이 마른 입술 적시며 쌓여도
홀로 앉아 바닥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몸에
더운 피가 흐른다는 게 차라리
슬픔인 밤
촛대에 불을 밝히면
삶이 제 것이 아님을 알아버린 자들
한평생 무덤을 찾아 떠도는 짐승 발자국들이
낡은 성의트쵸자락처럼 펄럭이고
그러면 또 내 몸은 소리도 없이
쩍쩍 금이 지는 것이었다
제 뼈를 깎아 피리를 불던 탁발승의 입술이었는지 모른다
폭풍의 하늘로 솟구쳐 사라진 야생 날개였는지 모른다
너무 작아
책 한 권 놓으면 꽉 차고
너무 커서 온 세상 울음을 다 쏟아내도 남을
앉은뱅이 책상 하나
양들의 침묵 / 김희업
초원은 어제처럼 건조했고
초원을 둘러싼
강에는 뿔 모양 산이 돋아났습니다
양들이 풀의 젖꼭지를 빠는
간지러운 밤입니다
안개도 없는 밤에
늑대도 없는 밤에
사라진 양에 대해선
양들이 알 뿐, 그들은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으니
저로서는 알 길 없습니다
사라진 양에 집착하고부터
잠 못 이루고
되레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입니다
안개를 풀어놓은 밤에
늑대를 풀어놓은 밤에
양을 세다
사라진 양이 가여워
울다 잠든,
어린 밤을 기억합니다
안개보다 늑대보다 무섭게
비구름이 몰려옵니다
이제 그만,
양들을 불러모아야겠습니다
내일은 오늘 센 양의 수와 또다를 겁니다
침묵 / 유승도
골바람 속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침묵/ 이학성(1961~)
그는 천천히 어깻죽지의 날개를 제거했다
그로써 갈망하던 대로 착지를 얻었다
다음으로 그는 팔과 다리를 분질러 부동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기어이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입과 코와 귀마저 샐 틈 없이 봉해버리자
비로소 오감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가 그를 껴안았다
그가 바란 궁극이 그것이었으니
그의 선택이 옳다 그르다 우리가 관여하거나
판별하기는 적절치도 않거니와
이젠 그가 자유로이 허공을 떠돌던 영혼임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오래된 신비로운 언어를
마침내 터득했음을 감지할 따름이어서
제대로 알아들을 이가 고작 몇몇일까마는
지나가며 바위에 쫑긋 귀를 댔다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다.
침묵 / 이창수
아버지 참나무 베어다
어머니 목욕물 데운다
더운물에 찬물 붓는 소리
더운물에 손 담그는 소리
다시 한 바가지 찬물 붓는 소리
손으로 물 휘젓는 소리
치매 앓는 어머니 안아다
아버지가 목욕시키는데
머리 감기는 소리
물 끼얹는 소리
침묵은 참나무보다 무겁고
산불 지나간 자리
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
침묵의 입 / 나금숙
수상생활을 하는 바자우족 마리아는 배 위에서
셋째를 낳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배 위에서 산 일생이
그때서야 외딴 섬 깊은 흙 속에 안식했습니다
음악행상에게서 노래를 사서
노란 비밀을 노래에 숨겼어요
노래를 들으면
비밀이 향기처럼 흘러나옵니다
눈도 안 뜬 아기를 두고
흙 속에 묻힌 마리아
죽어가는 어린 돌고래를 등에 업어
숨 쉬게 하는 어미돌고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노래를 사서 노래에 침묵을 숨겼어요
보호종료가 끝나 보육원을 떠나는
열여덟 살 은이는
어디로 가야 하지요?
마음의 근육 기르기에 좋다는
오래된 차밭을 찾아가는 길
왜 슬픔을 먹는 포식자는 없는 걸까요
새벽에 보는 죽은 이의 전화번호
페북 속 환한 얼굴이
깨달음은 늘 뒤늦게 온다고 속삭입니다
고요한 시간
시간의 등 뒤에 서 있으면
침묵의 중얼거림
침묵에도 입이 있습니다
어느 몽상가의 푸른 침묵 / 이성임
네 번의 탈피를 막 끝낸 누에가
채반 위에서 꼼질거린다
사각사각 한 수레의 뽕잎을, 초록을, 사각을 먹어 치운다
가랑비 소리를 토해 낸다 하루가 다르게
몸을 키우는 저 몽상가,
알에서 깨어나던 때보다 몇 십 배 키운 몸집,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구멍투성이 앙상한 뽕잎의 길
누에의 몸으로 옮겨 앉은 한 수레의 초록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텅 비운 하루는 투명으로 충만하다
입을 뻥긋 거릴 때마다 환몽의 악보처럼 뽑아 낸 한 가닥 말
한 채의 집이 되었다 선정 삼매에 들 터이다
몽상가의 푸르고 견고한 침묵 앞에
후욱- 발끝에서 끌어올린 내 심호흡
무채색 투망을 친다
불필요한 침묵 / 채수옥
입 안 가득 물고 있는 물고기를 토해내 봐 어떤 증상처럼 파닥거리는 실마리가 잡히겠지 물고 있던 침묵에 비늘이 돋아 날거야
침묵이 금이 되는 걸 본적 있니
우두커니 서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뭉텅뭉텅 하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목련나무를 봐 온 우주를 돌아와 기어코 하고 싶었던, 끝내 해야만 했던 말
묵묵부답은
바위의 구조일 뿐
꽁꽁 묶여 감금당한 그날의 시간들에 대해 얘기해 봐 물속에서 마른 뼈들이 풀어지는 미역처럼 산란하는 햇빛처럼 바위를 열고 침묵을 꺼내봐
잠복해 있던
어둠이 쏟아져 나올거야
강요당한 별빛과 달빛 사이에서 여자들의 입술이 뭉개지고 찢어지고 있어, 초고처럼 어설픈 입장으로 울음을 삼키겠지
입속에 백만 마리의 물고기를 물고
돌이 되어라
불필요한 주문을 외우겠지
침묵의 도서관 / 오정국
죽고 사는 일이 물소리처럼 아릿하다, 여기는 온통
침묵을 베껴 적은 일생일대의 저작물들
죽음은 없고 묘비만 남은 생애들, 온통 여기서
황금빛 서가를 물들이고 있다
형체는 없고 기억만 살아 있는, 여기는 온통
끝없는 갈림길의 문장들, 침묵의 발걸음이
한 뼘 두 뼘 숨을 쉬고, 서가에 이마 기댄 이들의
일평생, 한낱 꿈으로만 흘러갈 순 없으니
오늘 하루의 회전문 곁에
빗물 젖은 우산이 꽂혀 있다
창밖의 나뭇잎을 흔드는 빗방울들
영원의 찰나를 깨워놓는데
사진 속의 여자는 말이 없다 등을 구부린 채
한사코 액자 밖으로 팔을 내뻗고 있다
백 년 전의 이야기처럼
하루의 길이는 달라지지 않는데
일몰의 빛은 짧고
침묵의 투숙객이 펼쳐놓는
방명록, 묵직한 손 글씨가
그 일생의 행적을 말해주는데
결국은 모래시계처럼 비워지는, 여기는 온통
침묵에 대하여/ 고재종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침묵의 폐허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달빛은
이것이 무장무장 은산철벽을 치는 것이어서
용과 거북이의 뿔 자라는 소리 듣다 보면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 생각한다
침묵을 버티는 힘 / 기 혁
할 말을 찾지 못한 감정이 추락했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껌뻑일 때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깊고 시린 절벽 아래로 하얗게
얼어붙은 눈꽃이 되어 흩날렸다
날이 저물면 벼랑에만 둥지를 튼다는 독수리와
허기진 들짐승이 찾아왔다
구전(口傳)의 틈새로 흘러내린 설인은
괴물도 친구도 아니었으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털 뭉치 같았다
절벽 위에선 몇 번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럴 때마다 폭설이 내렸다
기도가 감정적으로 되풀이되기도 했으며
해석에 둘러싸인 진리는
자신의 눈물과 함께 얼어붙었다
신화와 이념의 주인공들마저
제풀에 못 이겨 몸을 던져버렸다
폭설로 마음이 고립되면 동굴 깊은 곳에선
모닥불을 피우고 절벽 위를 상상하곤 했다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눈꽃송이가
어떻게 목덜미를 깨우는 것일까
서로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어째서 슬픈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일까
오해라는 의미가 다녀가기 전
작은 틈새에 불과했던 절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던 시절도 있었다
처음 발을 들인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사랑을 하고 감정적으로 아이를 키웠다
마지막 뒷모습을 보여준 한 사람이 떠나갈 때까지
눈이 내리면 아침에 내뱉은 목소리를
가죽 부대에 담아 남녀노소 한 모금씩 마시고
취했다고 한다 호기심 많은 녀석들이
이따금 절벽 밖으로 눈을 뭉쳐 던지면
할 말을 찾지 못한 감정에도 시퍼런
멍 자국이 남는다
침묵은 구원이 아니지만 천사의 흔적 같았다
깨문 입술에서 탄생한 소외의 몽고반점이었다
침묵은 금이 간다 /서 하
해바라기를 집에 두면 부자가 된다는데
식탁 위 화병에 꽂혀 있는 천성이 造花인 그는 침묵이다
그 옆에 보초선 술병, 실눈으로 째려보며
⸺ 너거 아부지가 먼저 죽어야 될 낀데
머리숱이 빠져 가르마도 없는 엄마는 자식이 가져간 전복죽을 먹으며
무슨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만난 듯
전복 껍데기 같은 말 툭툭 내뱉는다
이쯤 되면 예방주사 맞기 싫어 맨 뒷줄에 설 때처럼
불안에도 소리 없이 금이 가고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자주 더 실금이 갔고
아버지 덕분에 힘껏 아프기도 한데
스무네 살에 떠난 형이 남긴 금은 좀체 아물 기미가 없고
둘러보면 금 간 것이 적지 않아 친정집엔 돈보다 금이 많다
저녁연기가 금간 하늘을 비낀다
양들의 침묵 / 이현호
그대가 풀어놓은 양들이 나의 여름 속에서 풀을 뜯는 동안은
삶을 잠시 용서할 수 있어 좋았다
기대어 앉은 눈빛이 지평선 끝까지 말을 달리고
그 눈길을 거슬러오는 오렌지빛으로 물들던 자리에서는
잠시 인생을 아껴도 괜찮았다 그대랑 있으면
그러나 지금은 올 것이 온 시간
꼬리가 긴 휘파람만을 방목해야 하는 계절
주인 잃은 고백들을 들개처럼 뒤로하고
다시 푸르고 억센 풀을 어떻게 마음밭에 길러야 한다
우리는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지나며
두 발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네 발 달린 마음으로 갔었지
살기 위해 낯선 곳으로
양들이 풀을 다 뜯으면 유목민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다
지금은 올 것이 오는 시간
양의 털이 자라고 뿔이 단단해지는 계절
이끼가 침묵할 때 /김월수
변하지 않는 바위의 생각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가장자리 끝에 매달린 움직임을 본다
이끼는 스미는 습관을 내세워 백 년 동안 천천히 바위 위를 걷는다
가쁜 숨을 내쉬는 누룩뱀의 겁먹은 눈동자와
둥지 잃은 새끼의 철딱서니 없는 추락을 보고도
바위 속에 갇혀 있는 단칸방이
누구를 위한 독방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기에
느린 걸음을 불평하지 않는다
공중에서 길을 잃은 빗방울의 흔적에서
쑥쑥 자라는 침묵의 냄새가 난다
누구의 허락을 받거나 누구에게 허락을 할
필요조차 없는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추스르려는 일관성을
이슬의 눈으로 바라본다
궁금한 것이 많다고 이끼의 침묵을 죄로 물을 수는 없는 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 숲의 일원이 되려는 가열찬, 저 직진
한 뼘 더 자라난 목마름을 알아차린 것은 오직 바위 하나뿐이다
침묵들 / 박도희
(불확실해도 좋은………… 나무)
나뭇잎 제로의 아주 큰 나무예요
굵은 가지 위에 나란히 세 사람이 걸터앉아 있어요
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지만 중요하지 않아요
단순하고 복잡한 쓸쓸함을 왜 배경처럼 붙들고 있을까요
빈 창고 같은 나무는 어떤 이정표를 불러들여야 하나요
(불가능해도 좋은………… 불빛)
나를 보살필 어둠을 보내줄래?
불빛이 취소 금지 요청의 아수라장이 되고 있어요
저 퇴화한 날개를 다 처리할 수 있을까요
좁은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내가 그 위에 가로누우면 십자가가 될 수 있을까요
(불일치해도 좋은………… 하늘)
어떤 사람이 마당에 있는 관 앞에서 두 손 들고 기도를 해요
관에 박힌 못이 연민에 튕겨 나갈 것 같아요
아, 세상은 무슨 헛소리의 개입이 필요한가 봐요
독하지 않게 새의 입장을 차단시키면
저 알 수 없는 고요가 계속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실내악(窸內樂)*
—침묵과 바닥 2중주
정재학
어린 비
젖은 시멘트 마당
나에게 침투한 침묵과 난
이미 어색하지 않은 사이여서
그 바닥에 우울을 두고 왔다
낡은 커튼을 들추었더니
움직인 시간보다
움직이지 않은 시간이 더 많은
혓바닥들이 쌓여있다
결국 바닥은 다시 시작이어서
꿈틀대지 않았지만 그 혀들은
침묵하는 동안에도 고요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나는 속살처럼 약해서 갑옷이 필요하다
얼굴에 돌이 찬다
얼굴이 바위가 된다
바닥과 돌은 친분이 깊다
침묵지대 / 조용미
카르투지오 수도원 입구에 있는 표지판
—침묵지대(Zone de Silence)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봉쇄수도원
여행객들은 왜 침묵을 엿보려 하는가
수도사들의 침묵과 고독을 엿보려 하는가
카르투지온들의 하얀 언어를 훔치고 싶어 하는가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지대는 툰드라지대처럼 추운가
낮게 가라앉은 빛들이 들끓는가
침묵은 규정될 수 있는가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침묵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한가
침묵은 들을 수 있는가 침묵은
느낄 수 있는가 침묵이, 침묵을…… 괴롭히지 말자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지대라는 표지판을 걸어 두면 침묵이
샘물처럼 생겨나게 될까 침묵이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침묵 아닌 것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침묵이 숙연해질까
수다스러운 침묵이 꽝꽝 고요해질까
하여간 침묵지대가 필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침묵 사제 / 조용미
그는 침묵을 관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일은 침묵을 세심하게 관리하기 쉽도록 분류해두는 것이다 그는 침묵을 장악하지는 못하더라도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침묵의 분류 관리 통제는 그의 업무 전반에 걸친 일인데 모든 침묵이 간단하게 분류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는 침묵을 맡아 다루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생의 후반부를 온전히 바쳐야만 했다
침묵은 명령할 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사명감은 약간 헐거워졌다 침묵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그는 침묵이 점점 싫어졌다
그는 침묵을 규정하여 품목별로 분류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 모든 침묵에는 무엇보다 그가 좋아하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어 세부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침묵의 불합리와 모순은 그에게 크나큰 시련이었다 침묵은 입을 다물기보다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침묵을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침묵을 관리하는 일은 수많은 침묵의 소란을 견뎌내는 일이었다
침묵 /채길우
찻집, 볕이 드는 창 너머로
야외 탁자에 앉아 수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저 언어의 자명함을 이해할 수 없다.
햇살은 곧 시간을 돌아 내 얼굴가에 닿지만
눈매를 찌푸려 안 보이는 것들을 자세히 뭉쳐주는
눈부심이 환한 빛 때문만은 아니고
한 모금의 커피를 머금어
새까만 궁금증이 따뜻하고 동그랗게 입안에 머물 때
뱉어 낼 수 없는 질문들이 쓴맛의 거친 어둠뿐은 아닌 곳에서
나는 저들의 대화가 마음에 든다.
뜻을 몰라도 아름다운 무반주의 안무처럼
소리 나지 않아도 음악인지 알 수 있는 공감각의 색깔처럼
내가 오래 바라보아도 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햇빛이 대신 고개를 기울여 이곳을 향해
동작과 색채를 건네주기 시작한다.
손 뻗어 유리를 만지면 차갑구나, 단단하구나
그러나 깨끗한 표면에 비친 미세하고 물결 많은
속삭임의 투광도를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밝고 맑고 정확히 보이는 오해의 투명함
입김 불어 써둔 글자처럼 지워진 손짓으로
떨리는 온기가 지나가는 오후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면
아직 소리가 아닌 움직임의
소란스런 묵음들이 잘 읽히는 위치에 남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도, 이게 다 진짜는 아니더라도
들썩이는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고 그림자를 모아서
새로운 인사 하나를 만들어 보았다.
이제 햇살은 그늘의 끝으로 밀려나 창밖에만 머물고
모두가 일어나 떠난 빈자리가 커지는 동안
여기는 당연한, 말 아닌 것들로 가득해진다.
천사들의 침묵 /이재연
말 한마디 없이
오래전에 아버지는 죽었다
사적으로도 죽고 공적으로도 죽었다
죽어라고 독재를 반대하던 사람도 죽었다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우리엘의 눈동자여
그대들이 본 것을 말해 주시오
이제 아무도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의 연애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장에도 맑은 오후에도
사람들이 말하기를, 쉬운 일은 없다
하늘은 물론이고 우리의 꿈조차도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 순간도 자연도
무한한 침묵도 그들의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돌아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불안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쭉쭉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두 손을 공처럼 둥그렇게 모으는 습관이 있다
공손한 두 손은 이 도시의 패자에게 남은 모든 것이다
진짜 큰 도적들은 밀실에서 돈을 세고
있는 자는 태연하게 감옥에서 나오는
추억은 매우 나빴다 죽은 자와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장례식장에는
알맞은 침묵, 알맞은 기억이 있다
죽은 자의 이름을 자꾸 떠올린다
연기와 재만 남는다
————
* 영화 「토리노의 말」대사 인용.
침묵수도원* / 류인서
침묵은 귀밝은 늙은 동물,
놀랍게도 그 굽은 등을 지반 삼아 집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선잠 든 침묵의 귓불을 건들지 않으려 가만가만 시간을 벽돌 쌓으며 걷는 젊은 수도사의 조심성 많은 뒷모습을 보았다
가을겨울가을겨울 더 깊어지는 회랑(回廊)이 침묵의 방벽이 되어주는 말없음의 시간을 보았다
삼엄한 침묵의 경계(警戒)를 피해 수도원 담장을 혼자 넘어나가는 벙어리 신이 떠올랐다
황무지 눈밭을 발자국 없이 뛰놀고 있었다
봄잠 든 침묵의 콧등을 밟고 골짜기 숲으로 산책 나선 천진한 밝은 얼굴의 노수도사들도 있었다
소리, 소리들을 보았다
수도원 뒤쪽 산맥 넘어 흰눈이 걸어 내려오는 소리
마당을 지나는 바람의 나무구두 소리
저녁 종을 당겨 새의 길을 봉쇄하는 소리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하는…… 그런 소리들을
*영화 <위대한 침묵>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만들어진 침묵 / 정숙자
떠도는 생각
밀어 넣은 말
비극이 된 사랑
바다로 간다. 약속한 바 없건만 모두 바다로 간다. 바다에 가서도
떠돌 뿐
밀어 넣을 뿐
출렁거릴 뿐
그리하여 맨 처음 침묵을 만든 건 수평선이다
그리하여 맨 처음 침묵을 간직한 건 수평선이다
만들어지는 거라고
만드는 거라고
만든 거라고
꾹 다문 한 줄
넓게 깊게 높이 또한 쓸쓸히
우그러뜨리거나 느슨하지도 않은 한 발 한 발 팽팽히 무너지면서
뜬구름과 빗돌
모래 언덕과 태양
눈보라와 먼 섬
균형 잡는 수평선 수평
가도 가도 끝없이 무엇이 부서진다 하느냐?
가도 가도 끝없이 무엇이 밀려온다 하느냐?
저녁 일곱 시에 나는 침묵한다 / 고성만
뱃속에 검은 연기가 가득 차는 것 같아
유리창 앞에 서서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숨 쉬기가 어렵다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 대신 캐리어 끌고 인솔교사 따라 수학여행 떠났는데 배가 뒤집혔다니 수 백 명 갇힌 선실에 물이 차올라 살려달라 울부짖는데도 구하지 않았다니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니
생-
때-
같-
은-
자식들을-
아아아아---- 가슴 쥐어뜯는 부모들
물이 뚝뚝 듣는 교복 벗고 영어책 수학책 집어던지고 환히 웃으며 달려올 듯한데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늠름한 청년들 아리따운 처녀들 수줍게 입 맞출 듯한데
시르죽은 태양은
오늘 하루 마지막 빛을 태운 후
위령 조곡 울려 퍼지는 계곡으로 사라지고
내게 따뜻한 피 흐른다는 사실이 슬프다
벼락 떨어지지 않을까
마른하늘 올려다보는데
아이들이 퉁퉁 부은 팔다리 들어 무어라 외치는 소리 들리는데 복수는 나의 것, 망치와 해머 휘두르며 마스트 거꾸로 처박히고 흘수선 위로 드러낸 배를 사정없이 부수는데 부수어 어디론가 끌고 가는데
북쪽 산록
하나 둘
가로등 피어나는
저녁 일곱 시에 나는 침묵한다
붉은 색에 도착한 침묵 / 최서진
아이스크림과 사람은 아쉽고 새빨갛다
괜찮아 내가 먹어버린 달콤한 과일의 냄새를 자르듯이
유일한 나의 붉은 이웃들
눈이 떨어져나가 거울 속의 빨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부정하면서 부인하면서 붓에 묻은 물감의 표정으로
사라지는 것들과 공손한 악수와 이 거리의 색깔에 대해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며 신발을 바꾸고
쉽게 고백하는 새벽의 찬바람을 만난 적 있다
누군가 공을 던지고 지구가 멀어진다
이 모든 거리의 목마름에 대해 침묵하기로 하자
식어버린 정거장의 냄새와 입모양으로
사랑스러운 연인과 실패한 저녁을 남기고
너무 쉽게 짓는 웃음과 남은 낱말들을 삼킨다
모든 색과 어둠이 속수무책으로 섞이는 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이 거리에 짐작할 수 없는 꽃들이 자란다
얼음행성에서 꽃 피는 시간의 침묵을 귀로 받았다
나무들은 침묵보다 강하다 / 조용미
나무들은 한낮의 햇빛 속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한낮에도 서늘한 어둠을 불러들이는 건
죽은 자들이 아니라 저 나무들이다
십자가를 만든 나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시퍼런 길
검은 초록의 터널
사이프러스 한 그루가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이 섬에서 나비처럼 알게 되었다
한 그루 길 위로 구름이 걸린다
저 나무는 어두운 내면을 초록으로 오래 위장해왔다
나무 속으로 가끔 새들이 빨려 들어가 푸득거린다
우듬지 근처로 분명 어떤 새가 지나갔다
순식간이어서 보지 못했다
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새를 바라보지 않았는지
나비처럼 알지 못한다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묘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햇빛이다
한낮의 정적 속에서 나무들은 맹렬히 솟이오른다
이곳의 나무들은 침묵보다 강하다
침묵의 발견 / 이만섭
수문을 열고 나오는 저수지의 물은 파죽이다
제 안에 침잠하던 고요가 사자후처럼
기세를 내뿜는 사이 난간에 피워내는 물꽃
울음의 형식으로
폭죽의 형식으로
폐부가 이렇다는 듯 고요를 쏟아 꽃 피워낸 물의 사연을
새끼줄 같은 내력으로 잇고 가는 강,
말은 애초에 미약해서
도리 없이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귀의 입으로 소리를 삼키며 천천히 몸속에서 숙성한 말들은
뼈에서 가져온 듯 밀밀해져 마침내
다물어진 관자놀이로 온점을 찍고 나온 듯
침묵 끝에서 울음이 되고 폭죽이 되고
괄호에 묶인 말의 통로는
활주로처럼 단단한 육질의 언어가 되었다
씨앗으로 파종하여 꽃처럼 피워낸 말이
침묵의 갈피에서 가져온 문장이었던 것이다
해변의 침묵 / 곽은영
심해어들의 시체가 해변을 채웠다
나는 2km를 달렸고
두려웠다
달렸다
러닝슈즈가 무거웠다
하늘과 바다는 무심했다
부패의 냄새
이곳의 냄새
무거웠다
인간이 돌고래가 되려면
넘어가야 하는 푸른 경계가 있다
저 물고기들은 그곳을 넘어왔다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
불안처럼 구름장이 덮쳤다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도는 시곗바늘
숨이 차고 답답했다
나는 다만
달렸다
갈매기 떼처럼 기자들이 올 것이고
곧 해변의 무거움을 잊을 것이다
러닝슈즈를 벗었다
달리기는 가벼워지는 일이지만
이 달리기는 달릴수록 무거워졌다
해변의 풍경을 메고 되돌아가야 하는 2km
어깨를 누르는 죽음의 질량 때문에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은 흐렸고 바다는 철썩였다
침묵들 / 김원경
죽은 자작나무에서 버섯이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말이 있어
손톱을 기르는 것처럼
육체가 조금씩 액체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말을 잃고 미세하게 돋아나는 불안을 얘기하자
나는 간신히 침묵이 떨어지는 순간을 본다
나의 이 불안이 누군가 죽음 이후에 심어 놓은
미세한 균사체가 아닐까 의심될 즈음
나는 자꾸만 투명한 내장을 꺼내서
최후의 수분까지 증발시키려는 순간과 악수한다
왜일까 왜 그래야만 할까를 생각할 때
이미 난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건
세수할 때마다 떨어뜨린 긴 속눈썹
파르르 떨고 있는 한 줄 현(絃) 위에서
발목을 잃은 무용수의 창백한 울음소리
때론 침묵이 너무 진지해
게바라의 별은 어느 날 전광판에서 더 빛나고 있다지만
바람 불지 않아도 바람개비는 계속 돌고 있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처럼
서로 다른 속도로 흩날리며 다가와
읽혀지는 순간 머나먼 곳으로 사라지는 침묵들
침묵은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
수천 개의 긴 문장을 투명한 액체로 쓰고 있다
나는 이 한 문장을 해독하는 데 한 생을 다 보내고 있다
침묵 연주가 / 차주일
숲에 들어 음가 없는 바람을 코로 들이켠다.
숨 뱉지 않으려 용쓰며 견뎌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파열음으로 터지는 숨,
인류를 멸종으로부터 지켜준 최초의 음가,
내 숨소리에 기어코 발설해야만 하는 침묵이 배어 있다.
숨소리만 뱉어내는 나무 아래 서면 슬픈 노래가 들린다.
아주 우연히, 내 감정인 양 따라 부른 나는
누군가의 슬픔을 수혈한 것.
침묵이 성대에 고인다는 것을 알아챈 뒤
목소리를 몸 밖에 감춘다. 이로써
몸속에 감춘 내 감정을 누구도 찾을 수 없다.
성대는 소리로 들키는 몸 박에서 뛰는 심장이어서
누군가 악보용 펜촉으로 내 목소리를 찍어 간다.
한 사람에게 우연히 불리기 위해 지어진 노래;
침묵은, 얼마나 완전한 슬픔인가.
침묵이란 미완성곡을 완창하면
펜촉에 고인 시간은 내가 부를 사후가 된다.
나는 마지막 음표 뒤에 되돌이표를 찍는 사람,
감은 눈으로만 감상할 수 있는 추억이 시작된다.
추억은 내가 죽은 나에게 부여하는 시간.
우연히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자주 끊기는 것은
죽은 자가 내 추억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
사후의 첫 음표를 보아버린 그 순간,
금단이라고 믿었던; 몸속에 감춰 둔 내 감정에
누군가 찍어 놓은 수많은 쉼표가 드러난다.
숲에 널브러진 씨앗들을 암송한다.
내 숨으로 모두 틔워내야 한다는 듯 침묵을 서두른다.
누구인가?
내게 숨 쉬는 의무를 강요하는 이.
내 숨소리를 엎질러 제 다녀간 흔적을 기르는 이.
물의 침묵 / 수피아
물은 돌의 입을 빌려 말한다
먼저 흐르던 물이 돌, 외치면
뒤에 따라가던 물도 돌, 하며 흘러간다
물이 물을 만나면 말이 많아지고,
차곡차곡 쌓인 돌로 가슴은 무거워지고,
말과 말은 한데 뭉쳐서 힘없는 누군가에게 날 선 칼이 된다
돌돌, 돌돌 수군거리는 떼거리가 된다
보이지 않은 칼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와서는
계곡의 옆구리를 깎고 할퀴고 물어뜯는다
급하게 휘돌아 나가는, 위태로운 삶의 급경사에 이르면
상처 많은 계곡의 거친 물소리가 들린다
물은 커지는 말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사나워진 말의 물살을 가라앉히기 위해,
때로는 낭떠러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처럼 포효한다
높은 곳에서 시원하게 몸을 던지며
말을 떨쳐내는 폭포수의 용기는 장엄하다
비워진 자신을 이끌고 떨어진 물은 강으로 간다
소한(小寒)에 강둑을 걸어보면
열반(涅槃)에 든 침묵하는 언 물을 보게 된다
침묵을 버리다 / 강미정
난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욕설 같은 바람이 얇은 옷을 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앞쪽은 젖은 옷처럼 찰싹 붙고 그 뒤쪽은 불룩하게 헐렁한,
마음이 바람의 날을 벼리고 있잖아
절규하며 날뛰는 힘을 견디며 파랗고 날 샌 노래를 부르잖아
봐, 깊게 사랑했던 마음이 들끓을 때
당신은 울음소리에 몰두할 수 있지
당신이기에 어느 한 가슴이 가장 먼저 울 수도 있지
내가 알았던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다시 당신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여,
저기 망망대해를 펼쳐두고 출렁임을 그치지 않는
당신의 침묵이 폭풍우가 되는 바다가 참 좋더라
폭풍우에 스민 울음소리가 들리잖아
나를 부르는 웃음소리가 들리잖아
마음이 바람의 날을 세워 밀며 밀리며 견디는
저 애증의 극단 중간에 침묵을 두고
세상이 되고 길이 되었던 당신이 가슴으로 와서
폭풍이 될 때 나는 휘몰아치는 바다가 좋더라
침묵수도원* / 류인서
침묵은 귀밝은 늙은 동물,
놀랍게도 그 굽은 등을 지반 삼아 집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선잠 든 침묵의 귓불을 건들지 않으려 가만가만 시간을 벽돌 쌓으며 걷는 젊은 수도사의 조심성 많은 뒷모습을 보았다
가을겨울가을겨울 더 깊어지는 회랑(回廊)이 침묵의 방벽이 되어주는 말없음의 시간을 보았다
삼엄한 침묵의 경계(警戒)를 피해 수도원 담장을 혼자 넘어나가는 벙어리 신이 떠올랐다
황무지 눈밭을 발자국 없이 뛰놀고 있었다
봄잠 든 침묵의 콧등을 밟고 골짜기 숲으로 산책 나선 천진한 밝은 얼굴의 노수도사들도 있었다
소리, 소리들을 보았다
수도원 뒤쪽 산맥 넘어 흰눈이 걸어 내려오는 소리
마당을 지나는 바람의 나무구두 소리
저녁 종을 당겨 새의 길을 봉쇄하는 소리
한 자루 촛불로 천년의 침묵과 어둠을 봉쇄하는…… 그런 소리들을
*영화 <위대한 침묵>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시간의 침묵 / 박지우
천안함 침몰 5일째 3월 30일
침묵의 두께는 40미터, 수압으로 봉쇄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야*
어둠을 뜯어먹던 구덩이의 한 문장이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눈은 자꾸만 밖으로 나간다 구름다리를 건너 출입구가 없는 절벽에 매달려
타란튤라의 동굴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침몰 7일째 4월 1일
내 눈 속에 박힌 새떼들이 날아갔다
사람들은 바다를 믿지 않았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안개 같은 대본은 수시로 수정되었다
심해처럼 어두워진 유족들
아슬아슬하게 시간 위를 걷는 눈
죽음의 냄새를 감추고 있는 바다의 절망을 읽는다
침몰 8일째 4월 2일
희망은 납덩이를 채운 채 깊은 수심을 헤맸다
결국, 죽은 자를 구하기 위해 산 자를 바쳤다
생존한계 70시간이 지나가고
바쁘게 걸어온 기억들로 둥글게 발화점을 찾는 눈
슬픔이 시간의 줄을 타고 더 깊어질 바다의 한 페이지에 출렁인다
바다는 거대한 묘지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침묵하는 산 / 신승근
오랫동안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산도 자주 내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침묵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입니다.
구름 한 점이 이마를 툭 치며 지나갑니다.
하늘이 산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느러미 붉은 물고기 하나가
물에 빠진 산 그림자를 뚫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가슴 밑바닥부터
환하게 밝아옵니다.
그 경계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침묵의 미로 / 신철규
통화 중에 금방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은 네가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 옆에서 서성대다가
열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책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따라가다가
다시 전화기를 본다
검은 액정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약속이 있고 시간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제는 씻어야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양치질하는 동안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입가에 치약 거품을 묻힌 채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샤워기를 틀기까지 또 몇 초간 기다린다
미지근한 기다림이 계속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고
비누칠을 하기까지 몇 분간 나는 덩그러니 욕조에 서 있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노트북에 커피라도 쏟은 걸까
행인에게 갑작스럽게 폭행을 당한 건 아닐까
피가 흥건한 단도가 햇빛 가득한 보도 위에 반짝이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몸으로 욕실화를 신은 순간
다시 전화가 온다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간신히 전화기를 부여잡는다
무슨 일이야? 큰일이라도 난 거야?
아니야 그냥 전화했어.
담장에 장미가 많이 피었어.
거울 속에 눈물이 가득 차 쏟아질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피가 온몸에 장미 문신을 그려놓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그을음이 목구멍을 가득 메운다
침묵의 언어 / 최종천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반짝이는 것이
사람으로 치자면 말을 하는 것일까?
이 그늘 아래서라면 나는 입을 다물고
나무들이 읽어주는 경전을 들어보리라
해마다 수천권의 책이 출판되고
영화와 연극이 공연되는 대명천지에
지금은 헤어진 그녀도 나더러
주둥이 하나로 먹고 살 생각을 하라고
이제 노동을 그만 하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눈부신 지식산업과 문화의 세기에
나무들은 부는 바람에 춤을 추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일을 하는구나, 땅을
깊고 넓게 일구고 있구나.
말이야말로 기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여호와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맨 처음
입을 열어 핑계를 댄 아담 정도는
되어야 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훔쳐간 한권의 시집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으리라
내가 생산한 의미를
누군가가 써먹고 있을 것이다.
나무그늘 아래서 나무가 쓴 경전을 읽어본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 자체이다
나무의 언어는 나무로 實存하고 있다.
나무의 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언어를 듣기 위한 언어이다.
노동은 본래 그런 침묵의 언어였다.
나는 人權대신 物權을 주장하리라.
사물이 나에게 증여한 이 언어로
봄날 나의 침묵은 /조용미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봄날 나의 침묵은 꽃 핀 나무들로 인한 것,
하동 근처 꽃 핀 배나무밭 지날 때만 해도
몸이 다시 아플 줄 몰랐다
산천재 앞 매화나무는 꽃 피운 흔적조차 없고
현호색은 아직 벌깨덩굴 곁에 숨어 있다
너무 늦거나 빠른 것은 봄꽃만이 아니어서
한잎도 남김없이 만개한 벚꽃의
갈 데로 다 간 흰빛을 경멸도 하다가
산괴불주머니 텅 빈 줄기 푹 꺼져들어가는 속을
피리소리처럼 통과해보기도 하다가
붉은 꽃대 속에 갖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몸이 견딜 만하면 아팠을 때를
잊어버린다 내 몸이 늘 아프고자 한다는 걸,
누워 있으면 서 있을 때보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이유를 또 잊어버린다
통증이 살면서 등 뒤로 와 나를 껴안는다
몸을 빠져나간 소리들 갈데 없이 떠도는
꽃나무 아래
다만 침묵 속에 있을 뿐 / 이영진
죽음이 스쳐 지나간 길가엔 흔들리는 풀잎들도 말씀을 안다. 생선가게 목판 위로 불어가는 더운 바람이나 푸른 배춧단을 싣고 달리는 짐바리 자전거, 그 바퀴의 회전에 튕겨나오는 햇살, 튀김가게 끓는 기름 속에 던져지는 밀가루 반죽의 살 터지는 소리까지 모두 다. 말씀으로 살아 가슴에 생피가 돈다. 금동시장 천변가를 걷다 보면 다 보이고 다 들린다. 똥물보다 더 검게 흐르는 물 위로 무엇이 스쳐 지나갔는지 남광주역을 출발해 남행을 시작하는 기차들이 느린 몸짓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다 들을 수 있다. 사랑이 스쳐 지나 간 이 거리에 서면 언제나 잠든 피들이 살아나 우리의 이 평범한 시간들 속에 묻힌 말씀을 흡입한다. 아무렇지 않게 다만 침묵 속에 있을 뿐 이 거리의 모든 허공 속에 가득한 말씀, 다 들을 수 있다.
침묵 속에서 깨어져나간 슬픔을 본다 / 이기인
어루만지는 돌의 침묵 속에서 깨어져나간 슬픔을 본다
바람이 불면 어데서 온 빛깔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잎사귀처럼 사람들이 붐빈다
서럽게 아름다운 꽃잎이 무성해서 못생긴 상처의 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꽃잎 사이로 날아가는 나비의 허공 아래로
소포처럼 와서 불록하게 앉아 있던 기념석이 툭 갈라 터져서
좌르르 길바닥으로 쏟아진다
껌벅껌벅 졸던 돌의 뒷목에서 흐르는 땀을 병정 개미들이 순찰을 돌며 마주친다
까딱하지 않고 참 오래 버티고 앉아 있던 이의 서러운 투쟁은 보랏빛 수국처럼 휘청 무겁다
고개를 떨어뜨린 자의 기다란 울음은 돌처럼 깨어져나가는 슬픔을 놓아준다
연어가 지나가는 도시의 침묵을 듣는다 / 고형렬
연어가 지나간다 소리와 침묵 사이 꼬리로 물을 흔들며. 하지만 느리지 않다, 그 몸에 광선이 부딪치고, 연어는 죽 음의 집을 향해서 천천히 가고 있다, 연어는 죽음이 친숙 하다 즐겁다 생만큼, 연어는 아름답다 세상 모든 것 중에 서, 그가 바다를 지나가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진다 연어가 해가 뜬 물에 가을을 지나간다, 연어는 사람 보다 완전한 몸을 하였다, 나는, 연어를 들여다본다 지금 바닷가에 나와서 물속에 지나가는 잘생긴 은빛 연어를보 고 있다, 그뿐 생명들이 오고 있는 내 마음, 다시 혼인하 고 싶은 가을, 연어를 보고 있을 뿐 나는, 이렇게 망연히 바닷가에 나와 연어를 보고 있을 뿐, 아무 소용 없이가을 햇살에 여치, 귀뚜라미, 메뚜기 울음소리 가득한 바닷가 에 나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