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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노바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라는 항해사가 있었다.
콜럼버스는 일찍부터 신대륙 발견의 꿈을 꾸었다.
그의 꿈은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 나타나는 황금의 섬
'지팡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지팡구' 섬에는
황금이 모래같이 흔하여 건물의 벽까지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젊고 모험심이 강한 콜럼버스는 장차 선장이 되어
황금으로 가득찬 지팡구 섬을 탐험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마르코 폴로가 갔던 곳을 자기인들 못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육지로 낙타나 말을 타고 2년에 걸려서 간 동방을
콜럼버스는 배를 타고 바다로 갈 생각을 하였다.
콜럼버스의 생각, 즉 바닷길로 동방에 이른다는 생각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대서양의 서쪽으로 항해를 한다면 둥근 지구의 표면을 돌아 동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가졌던 신념이었다.
콜럼버스의 신념은
피렌체의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와의 서신 교환으로 더욱 굳어졌다.
콜럼버스가 토스카넬리에게 편지를 쓰자
토스카넬리는 격려의 글과 함께 지구 구형설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토스카넬리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콜럼버스씨, 당신의 생각이 옳소.
동양으로 가려면 육지로 가는 것보다 또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서쪽 바다로 곧장 가는 것이 훨씬 가깝다고 나도 굳게 믿고 있소.
나는 이미 내 생각을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전하여,
서쪽 항로를 탐험하도록 권한 적이 있으나 왕은 내 말을 믿지 않았소.
당신은 젊으니 계획대로 일을 성공시키기를 진정으로 비오.
당시 바다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같은 불바다' 또는 '지구의 절벽' 같은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먼 바다로의 항해는,
특히 해안을 따라서 운항하는 것이 아닌 수평선 너머로의 항해는 불안 그 자체를 의미했다.
항해의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에는 선박 자체의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고대 이래 지중해 무역에 사용된 선박들은 '갤리선'이라고 하여,
선박 옆구리에 노가 있고 노예나 죄수들이 북소리에 따라 노를 젓는 형태였다.
그러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저어 나가는 선박은
강한 바람과 파도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선박의 개량이 원양 항해에는 필수적이었다.
이 문제는 북해 노르만인들이 돛을 사용하는 '범선'을 개발한 것으로 해결되었는데,
이러한 범선들도 많은 선원을 태우고 장기간 항해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콜럼버스가 후일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라(Isabel)의 도움을 얻어 신대륙 발견에 사용한 '산타 마리아' 호도 배수량 230톤, 시속 5~9노트 정도의 범선이었다.
더욱이 범선은 바람으로 배가 나가게 되므로
바람이 없는 날에는 걸어가는 것보다도 느렸다.
이러한 선박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일은 큰 모험임에 틀림없었고,
배 위에서 승무원들의 생활 또한 견딜 수 없는 힘든 고통이었다
식량 문제 또한 비참하여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마른 콩, 비스킷, 소금에 절인 육류가 전부여서,
선원들은 영양의 균형을 잃고 신선한 채소 부족으로 말미암아
괴혈병에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음료수 문제도 심각하여 물은 얼마 지나면 썩기 때문에 포도주를 따로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원인들로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에 나선 선원의 3분의 2가 괴혈병으로 죽었고,
후일 마젤란의 세계일주 탐험에서도
출발 인원 256명 가운데 18명만 3년 뒤 생존하여 귀환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있던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의 모험을 시도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재미있게도 '착각'이었다.
콜럼버스의 '착각'이 역사적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흥미롭게 만든다.
그는 지구의 둘레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에라토스테네스의 측정값보다 6분의 1~4분의 1 정도로 작게 지구 둘레를 계산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지구의 반지름은 약 400해리로써 시속 3노트로 항해했을 때
한 달이면 동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서양의 넓이를 실제보다 좁게 계산한 콜럼버스가
만일 대서양을 건너면 아메리카 대륙이 있고 아메리카 대륙을 넘으면 대서양보다 더 넓은 태평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서쪽으로 해서 동양으로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착각은 신대륙 발견의 영광을 역사에 남겼으니
위대한 착각도 발견을 가능케 한다는 역설을 만든 셈이다.
콜럼버스는 신항로 발견 계획을 포르투갈에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미 희망봉을 돌아서 동방에 가는 항로를 어느 정도 확보하였으므로 그의 제안에 냉담하였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에 새로 그의 계획을 밝혔다.
여기에서도 처음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나,
포르투갈과 경쟁적 입장이었고 이슬람 추방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버스의 사업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업을 후원할 때 콜럼버스는 다음과 같은 특권을 요구하였고,
여왕은 그의 요청을 허가하며 세 척의 배를 제공하였다.
첫째, 콜럼버스는 새로 발견하는 섬과 육지,
그리고 바다에 있어서 여왕 다음의 부왕(副王) 겸 통독이 된다.
둘째, 거기에서 얻은 보물, 기타 모든 이익의 10분의 1은 콜럼버스의 소유이다.
셋째, 새로운 영토의 재판권을 갖는다.
넷째, 위에 언급한 세 사항의 권리와 명예는 콜럼버스 자손대대로 물려받는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팔로스 항에서
산타 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의 배로 탐험 선단을 출범시켰다.
여기에서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즉 선원이 모두 160여 명 정도 필요하였는데,
먼 바다를 탐험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도 선뜻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선원을 후한 대접으로 모집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여 감옥의 죄수를 해방시켜 자리를 메웠다.
콜럼버스가 중간 보급 기지인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한 것은 8월 중순이었고,
다시 9월 초 이곳을 떠나 41일째 되는 10월 12일,
오늘날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하여 '산 살바도르'라고 이름 지었다.
콜럼버스는 1493년 3월 리스본에 돌아와서 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콜럼버스는 명예를 얻었으나 그는 또 한번 착각을 하였다.
즉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의 서쪽으로 굳게 믿은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얼마 뒤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다른 항해사가 이 땅이 서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사람들은
신대륙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본따서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지었다.
콜럼버스는 끝까지 자기가 발견한 지역이 인도의 어느 곳,
적어도 '지팡구' 근처라고 믿어 3회에 걸쳐서 탐험하였으나,
향료와 황금을 찾는 데 실패하였다.
에스파냐 왕실도 이 사업이 실패하였다고 인정하고 후원을 중단하였으므로
콜럼버스는 더욱 실의에 빠졌다.
사람들은 그를 야유하며 심지어 '모기 제독(Admiral of Mosquitoes)이라 불렀다.
이러한 것이 다음의 일화를 만들었다.
콜럼버스를 헐뜯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게 되자
어떤 사람이 콜럼버스를 잡고 대들 듯 말하였다.
"자네 아니면 신대륙을 탐험할 사람이 없겠는가?
아무라도 배를 몰고 대서양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가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 말에 콜럼버스는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렇다면 달걀을, 뾰족한 곳이 밑으로 가게 탁자 위에다 세울 수 있겠소?"
"뭐라고, 탁자 위에다 달걀을 세우라고?"
"그까짓 걸 못해?"
큰소리치던 사람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제각기 애썼으나 아무도 달걀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그건 이렇게 하면 되지 않소?"
콜럼버스는 달걀의 뾰족한 부분을 탁자 위에 툭 쳐서 약간 깨뜨린 다음 똑바로 세웠다.
"그렇게 세우는 거야 누가 못해!"
여러 사람들이 제각기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누가 세운 뒤에는 아무라도 쉽게 세울 수 있지요.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탐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누가 한 다음에는 아무라도 쉽게 하는 법이오.
그러기에 남이 하지 못한 일을 처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쓸쓸히 자리를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서방 항로 탐험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래서 에스파냐의 항해사 발보아(Balboa)는
파나마 지협을 건너 처음으로 태평양을 바라보았고,
마젤란(Magellan)으로 하여금 세계일주의 모험을 시도하게끔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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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東方見聞錄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여행을 다닌 이야기를 기술한 여행기이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정보를 소개해 대항해시대를 연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여행자는 (진위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마르코 폴로이지만 여행기의 저자는 마르코 폴로 본인이 아니다. 마르코 폴로가 1296년경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 제노바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있었을 때 같이 갇혀 있던 죄수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기록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동료 죄수는 '루스티첼로 다 피사(Rustichello da Pisa)'라는 사람이었다. 이는 기록으로 확실히 남아있다. 이후 피사공화국이 일궐부진으로 1046년 피사는 결국 신흥의 프로렌스공화국에 탄병되고 만다. 피사를 격파한후 제노아와 베네치아가 지중해의 주요한 해상세력이 되어 이후 수세기동안 지중해의 무역과 정치를 주도한 것이다. 메크리아 해전에서 루스디첸이란 피사의 포로가 제노아의 감옥에 갇혀 베네치아인의 전부인 마르코폴로를 만나 같은 방에서 마르코폴로가 동방에서 겪은 신기한 역정을 여행기로 구술하여 기록한후 유명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탄생한 것이다. 2. 개괄적 내용 처음에는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인 니콜로, 숙부인 마페오가 동쪽으로 여행했다가 서쪽으로 돌아온 후에 마르코 폴로도 이를 따라 여행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서문에 따르면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들이었고 처음에 무역을 위해 흑해 연안과 볼가강 유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원나라의 사신을 만나 부하라(현 우즈베키스탄)를 거쳐 베이징까지 함께 이동하게 된다. 이들의 두 번째 기행에서는 아들 마르코 폴로가 함께하며 쿠빌라이 칸이 요청했던 로마 교황의 친서를 지참하고 페르시아를 거쳐 다시 베이징까지 이동한다. 17년을 중국에서 보낸 후 이탈리아에 돌아올 때는 배를 타고 해상으로 페르시아까지 이동했다. 책의 후반부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본, 원나라의 수도,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중국의 동남부, 인도양, 대초원 등을 기술하고 있다. 3. 명칭 한국에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본에서 알려진 이름을 가져온 것이고,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한다. 중국 역시 이를 받아들여 마르코 폴로 유기(馬可·孛羅遊記)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백만(Milione)이라 이탈리아에서는 '백만의 책'(Il Milione)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왜 '백만'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는 확실한 정설이 없고 다음의 견해가 공존한다. 일단 동방견문록 책 머리에 떡하니 "밀리오네라고 불린 마르코 폴로가 구술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본인이 원치 않는 조롱성 명칭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4. 일화 동방견문록은 현대인 기준으로 터무니 없는 내용이 많다. 특히 중국 외의 지방에 대한 내용이 그렇다. "내가 들은 얘기인데, 인도 쪽 어디에는 사람 잡아가는 귀신 같은 괴물새가 산다 카더라, 뭐 또 이상한 동물이 산다 카더라, 또 어떤 거는 내가 직접 봤는데 이러이러한 동물이 있는데 신기하지?" 등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근현대의 사람들은 거짓부렁이라고 비웃었고, 별로 의미있는 증거로도 채록되지 않는다. 다만 일설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의 협소한 고산지대에서 마르코 폴로 본인이 직접 봤다고 얘기했던 일부 동식물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각수에 대한 이야기는 코뿔소에 대한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또는 파미르 고원에 "마르코 폴로 양(羊)"이라는 산양종이 있는데 이 이야기일지도. 물론 확실한 근거는 못된다. 반면 중국에 대한 서술은 현대에 봐도 상당히 정확하다. 특히 그가 '천상의 도시'라고 지칭한 항저우의 경우는 서호 일대의 묘사가 상당히 정확하다. 일본을 뜻하는 지팡구 전설 역시 동방견문록에 나온 이야기이다. 단, 일설에 '초가집을 보고 금으로 착각했다'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팡구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만 적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그런 착각을 했을 순 있어도 마르코 폴로가 착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가 과장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거나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서 약간 과장되게 적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둘 다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폴로는 일본에 대해서 원나라가 함대를 파견해 일본을 정복하고자 한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을 뿐이다. 내용 대부분은 원나라 함대가 전쟁을 치르고 패배하고 태풍을 겪은 일에 대한 것이지, 황금에 대한 내용은 스쳐지나갈 뿐이다. 동방견문록을 중요한 원 사료의 하나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동방견문록 군데군데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또한 마르코 폴로가 과장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사례와 같이 마르코 폴로의 말을 기록한 저자가 창작해 넣은 부분도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야 떨어질지라도 일반인의 경험담으로 보자면 비교적 객관적이다. 애초에 동방견문록은 국가 기관에서 역사를 저술하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정사류 서적도 아니다. 이런 류의 경험담은 군대 무용담에서 알 수 있듯 부풀려서 말하는 게 보통이다. 유럽의 어느 평범한 보부상의 아들이었던 소년이 며칠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고, 당시 유럽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신기술과 사치품, 희귀동물이 넘쳐흐르던 동방의 대륙을, 그것도 칸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귀족사회에서 견문하였으니, 일부러 부풀릴 생각 없이 설령 자기가 받아들인 감상만 적었다 해도 과장이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다른 대륙은커녕 자기 나라, 자기 동네도 벗어나보지 못한 당대 사람들 읽어보라고 집필한 것치곤 오히려 그런 욕구를 억제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의 인식 수준을 감안한다면, 현대에 보나마나한 거짓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을 당시에는 진실로 믿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백만인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거대한 제국을 묘사하면서 "백만"이라는 수사를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마르코 폴로의 인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동방견문록에 등장하는 다양한 설화는 최소한 당시에는 사실로 믿어졌고, 따라서 당시의 기준에서 동방견문록은 사실을 기록한 여행기로 보아야 하며,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