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1일(화)
* 시작 기도
주님...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며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은 개와 같은 자들이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기주장의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행한 자들까지도 행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했노라는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義이오니 이런 자가 바로 나임을 고백합니다.
진짜로 일생동안 계속 떨어지는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그런 나의 속성을 깨트리기 원하여 주의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뜻대로 마시고 오직 주님의 뜻에 연합하여 살아가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9:23-31
제목 :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날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나의 묵상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 소경이 되어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 아나니아를 만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보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지낸 후에 곧바로 회당으로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이 일을 지켜본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이상히 여겼지만 사울은 오히려 더 힘을 내서 예수를 증거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였다.
그런 모의가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 알려졌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성문까지 지켰는데 그의 제자들이 한 밤중에 사울을 광주리로 성벽에서 달아 내렸다.
그렇게 다메섹에서 빠져나온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과 사귐을 가지려고 하였으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믿을 수 없어서 적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에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길에서 주를 만났으며 주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일 그리고 그가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증거하였는지에 대하여 전하였다.
그렇게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을 하면서 헬라파 유대인들과도 변론을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를 안 사람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안정이 되고 터전을 튼튼하게 잡았고 무엇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정진해서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려고 할 때, 무두가 두려워서 그의 제자됨을 믿지 못하였다.
그 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가서 사도들에게 알렸다.
바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리고 바울이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히 증거하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바나바가 전한 이 3가지 사실은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의 증언으로 구체적으로 확정이 된다.
첫째 해보다 밝은 빛이 바울에게 비치고, 주의 음성이 그 일행에게 들렸다(행 26:13).
둘째 주의 말씀은 바울을 주의 증인으로 삼아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행 26:17).
이는 곧 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주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행 26:18).
셋째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전하였으며, 핍박을 당할지라도 주의 도우심으로 지금까지 증거하고 있다(행 26:19-20).
이렇게 해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이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까 그들이 죽이려고 하자 이 사실을 형제들이 알고 바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게 되었다.
한편 성도들은 주를 두려워하며 성령의 위로하심으로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다.
예전에 나의 목회의 모델은 소위 성공한 목사들이었다.
성장주의에 사로잡혀서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 일이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이는 영적인 탐욕이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사람을 많이 모아서 예배당 멋지게 짓고 목회에 성공하는 것이 목회의 최고 목적이었다.
사실 목회가 내 마음먹은 대로 잘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큰 목회,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목사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좋은 아버지 둬서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목회도 금수저 들고 하는 너희들이, 나같이 사회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어본 적 있어?
이런 생각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떤 내가 도대체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본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목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몇 차례 부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주님이 나에게 보고 듣게 하신 것이 다름 아니라 복음이다.
이전에 탐욕으로 하던 목회를 다 내려놓게 된 것도 바로 그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가장 충성스럽다고 생각했던 나야말로 가장 큰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달은 것이다.
주님은 이런 죄인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지만 그 심판은 진멸이 아니라 징계이다.
외적인 체험은 바울과 다르지만, 내적인 체험은 동일하다.
나는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죄사함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닥쳤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 결박과 환난이 임한다.
안팎으로 당하는 환난은 여전하나, 주의 인도하심으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복음을 등진 채, 종교적 전통과 유산이라는 알(卵) 속에 갇혀 있는 유대인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다.
바울을 대적하는 최고의 대적자들이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형제요 동족인 유대인들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 유대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종교적 전통과 유산이 최대의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을 가장 보호해줘야 할 유대인들이 자신을 대적하자, 그들을 버려두고 이방인에게로 향하였다.
바울이 버려두고 나왔던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과 유산이라는 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땅의 일, 사람의 일, 현세주의, 인생주의, 표면적 할례, 자기 자랑, 자기 의와 돈을 사랑함 등이다.
이것들이야 말로 진짜 십자가의 원수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빌 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조폭에 몸담은 사람이 그곳을 빠져나오려면 죽을 각오를 하고 그곳을 깨트리고 나와야 한다.
새알이 부화하고 나오려면 자신을 보호하던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
내어나려는 자는 자기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사는 자 곧 영생을 얻은 자는 단단해서 잘 깨지지 않는 아주 강고한 십자가의 원수들을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 들어가서 나비로 나오려면 비록 연약하지만 그 단단한 고치를 스스로 깨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고치를 깨는 나비가 너무 안쓰러워서 칼로 그 고치의 껍질을 조금 깨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나비는 고치 밖으로 나와서 잠시 푸덕거리더니 이내 힘을 못 쓰고 죽더라는 것이다.
새는 알을 깨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위로부터 아들의 생명을 얻는 자는 땅에서 난 아담의 생명을 깨트려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품속에 안길 수 있다.
하나님의 품속에 안긴 자의 영혼은 깃털처럼 가볍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며 현재로 영생을 누리는 자의 견증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약하디 약한 자요 어디에 내놓아도 부침과 힘겨움에 넘어지고 깨지는 자가 바로 나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날 때부터 팔삭동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돌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이제 백일이 지났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나는 자라는 내내 얼마나 병치레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폐암 수술을 했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받아 그 코로나 균이 약한 부위인 폐를 파고 들어 아주 위급한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후유증으로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지금도 여전히 걷는 게 힘이 듭니다.
이렇게 힘이 없는 나이지만, 육신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나의 육신은 비록 약할지라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약할 때 강함되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나의 자랑으로 삼습니다.
나를 이미 창세전에 택하시고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기에 그 언약에 근거하여 오늘도 당당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그러나 면목없음으로 나아갑니다.
나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