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신부
복음; 마르12,28ㄱㄷ-34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 시다.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 다.’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2 그러자 율법 학 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 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 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 지 못하였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 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카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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